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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부장 Jun 27. 2019

13. 여행이란 낯섦을 대하는 마음자세

one-way ticket project #13 스톡홀름


오슬로행 야간 버스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출발하지만, 늦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다른 도시로의 이동이 예정되어 있는 날은 괜히 마음이 조급하고 여유가 없다. 딱히 무엇인가를 준비해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예정되어 있는 것이 있다면 다른 일은 손에 잡히지 않는 이상한 성격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처럼 하루를 보내보기로 한다. 특별한 일정 없이 유유자적 한가로운 하루를.


스톡홀름에 대한 여행정보를 찾다 보면 생뚱맞게 공공 도서관이 하나 등장한다. 건물의 생김 자체도 특이하지만 무엇보다 내부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단다. 마침 내가 묵고 있는 숙소에서 많이 멀지도 않고... 그래서 오늘 하루는 그곳에서 보내기로 했다. 도서관 내부 구경도 하고, 점점 밀리고 있는 사진 정리, 지금껏 사용한 여행비용도 정산해보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노르웨이 피오르 여행 계획도 짜야한다.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거나 하지는 못하겠지만 - 순전히 언어적인 문제로다가 - 난 현지인들 속에 섞이는 것을 선호하는 여행자인 만큼 오히려 어제나 그제의 스톡홀름 구경보다 마음이 훨씬 더 설렌다.


『스톡홀름 시립 도서관(Stockholm Public Library)』은 그 이름 그대로 정말 스톡홀름 시민들이 이용하는 공공 도서관이다. 도시의 명물인 만큼 관광객들도 꽤 있겠거니 했지만 의외로 이방인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료를 찾고 책을 보고 공부하는 시민들로 가득한 별다를 것 없는 도서관이다. 하긴 도서관에 오면서 난 대체 뭘 기대한 걸까, 도서관이 그냥 도서관이지 ㅋㅋ. 관광객들의 카메라 셔터 세례가 없는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 조용히 앉아 자신들의 하루에 열중하고 있는 그들을 보니 나도 빨리 그 속에 풍덩 빠져들고 싶어 진다. 


자리를 잡고 얼마나 지났을까, 13인치 노트북 화면에 빨려 들어가 한참 동안 정신이 없던 내게 한 사내가 접근해왔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니 아랍계 사람인 것 같은 외모다. 불쑥 다가오긴 했지만 예의가 없어 보이지는 않는 행동으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푯말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무어라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 이거 또 돈 달란 얘기구나. 온 유럽이 아랍 이민자들로 골치라더니 북유럽까지도 이미 퍼져있는 모양이네.'


어차피 그가 뭐라고 얘기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정황상 본인을 도와달라는 말과 행동임이 분명해 보였다. 나름 여행 좀 다니다 보니 이와 같은 상황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그에게 영어로 말을 건네었다.


"난 지금 당신이 뭐라고 말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어요. 당신네 말을 이해 못하거든요."


그렇게 잠시 동안 그와 서로 할 말만 주고받고 있는데 그전부터 옆 자리에서 나처럼 조용히 노트북만 두드리고 있던 한 친구가 갑자기 뭐라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조심해!!! 걔 지금 너 핸드폰 훔쳐 가려는 거야!! 얼른 책상 밑으로 숨겨!!!"


그 친구는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어쩌면 아랍계인 그 사내가 못 알아듣게끔 영어로 크게 말해주고 있었다. 어쩜 이런 위급한 상황의 영어는 그리도 귀에 쏙 들어오는지. 정신이 번쩍 들어 책상을 내려다보니 핸드폰이 보이지 않는다. 노트북 옆에 무심코 두었던 핸드폰 위로 그 사내의 푯말이 가리어져 있었던 것이다. 내가 눈치를 채자 결국 그 사내는 슬그머니 손에 든 푯말을 거두고 다른 자리로 옮겨갔다. 그리고 이내 멋쩍은 듯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한국을 떠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숙소 이외의 장소에서 바지 주머니 밖으로 절대 나온 적 없는 핸드폰이었는데, 익숙한 일상의 어느 날로 돌아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 이곳에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소지품을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것이다. 해외여행 중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가장 기본적인 주의사항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렸다. 북유럽이라고 너무 안심했던 것일까, 아니다 그보다는 도서관이란 공간이 주는 특수성 때문에 너무 안일했던 것 같다. 여행이 시작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일을 겪는 건지... 온 천지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남미에 가서는 어떻게 하려고 나답지 않게 방심하다니.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며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뻗어 준 옆자리 친구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연거푸 전했다. 물론 그 친구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시크하게 이미 다시 자기 볼일을 보고 있었지만 말이다.


혼자 하는 여행은 어쩌면 긴장의 연속이다. 익숙지 않은 타지에서 소문으로만 듣던 나쁜 일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선 항상 주위를 경계해야 하고 나에게 다가오는 낯선 이를 조심해야 한다. 그동안 많은 곳을 다니면서도 안 좋은 일을 겪지 않았던 것은 다 예민한 성격에서 나오는 끊임없는 긴장과 의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경직된 자세와 마음으로 하는 여행은 사람을 쉽게 지치게 한다. 당연히 여행의 즐거움과 재미도 반감되게 마련이다. 여행이, 특히 혼자 하는 여행이 안겨다 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란 지금껏 지내온 틀 안에서 나를 꺼내 처음 마주하는 세상이란 드넓은 들판에 오롯이 나를 던져두는 것인데 혹시 모를 사고에 다치지 않기 위해 자꾸 내 주위에 벽을 쌓는다면 여행이 주는 해방감을 누릴 수가 없게 된다. 여행이란 길목에서 만나는 많은 낯선 이들과 친구가 되기 위해선 마음의 벽 사이로 작은 창을 내어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니, 먼저 다가가 그들 앞에 놓인 문을 노크해야 한다. 하지만 적절한 Open과 Close의 유지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사건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의심과 다른 이와 친구가 되기 위한 믿음의 그 중간 어디쯤. 혼자 하는 여행이 행복하고 즐겁기 위해선 그 중간 어디쯤에 내 자신을 잘 놓아두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번 여행에선 부디 현명한 그 지점을 발견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D+33] 2018.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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