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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부장 Aug 27. 2019

14.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야

one-way ticket project #14 오슬로


오슬로에 온 첫날 도시 곳곳에서 유독 심상치 않아 보이는 것들이 내 시선에 들어왔다. 카를 요한 거리에 매달려 있던 평범치 않아 보이는 곰인형들이 그랬고, 거리를 걷다 보면 자꾸만 마주치게 되는 무지개 깃발들이 그랬다. 특히 이 무지개 깃발은 온 도시를 뒤덮고 있다 할만했는데, 오가는 버스부터 레스토랑, 심지어 어제 방문했던 오슬로 시청사 정문에까지 걸려있었다. 뭐지? 그냥 이쁘라고 설치해둔 건 아닌 거 같은데... 아마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데... 종일 나를 따라다니던 특별해 보이는 그것들에 대한 궁금증은 저녁에 숙소 로비에서 우연히 집어 든 팸플릿에서 마침내 풀렸다.  



“ Oslo Pride ”



도시는 지금 페스티벌 중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슬로 전체에 그토록 컬러풀한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팸플릿만으로는 무슨 행사가 진행 중인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결국 호기심만 더해져 그곳에 적혀있는 사이트에 들어간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알파벳 약어를 보게 된다. 


LGBT... 이게 뭐지? 행사와 관련된 내용인 거 같은데... 이 단어를 Google에 넣자마자 나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현재 머물고 있는 바로 이 도시에서 얼마나 흥분할 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에.


LGBT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의 앞 글자를 딴 약어. 바로 성적 소수자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그랬다. 지금 이 도시는 성소수자 축제가 한창이었던 것이다.






페스티벌 기간의 끝자락에 오슬로에 온 나는 운 좋게도 행사 마지막 날 열리는 퍼레이드와 파티를 즐길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여행 중 만나는 이런 우연은 언제나 엄청난 횡재를 한 것 마냥 사람을 들뜨게 한다. 그 횡재를 빨리 눈 앞에서 확인하고 싶기도 했고, 성소수자 축제라는 타이틀이 주는 호기심에 계획보다 서둘러 짐을 챙겨 숙소를 옮겼다.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스케줄에 맞는 값싼 호스텔을 구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중심가의 호텔로 숙소를 옮기게 된 건데 그게 오히려 도움이 되어버렸다. 행사의 퍼레이드 행렬이 내가 묵는 숙소를 지날 예정이었으니 말이다. 


퍼레이드 행렬을 눈 앞에서 보기 전까지 나는 약간 긴장하고 있었다. 성소수자들의 행사인 만큼 정치적이거나 투쟁에 가까운 구호가 강하게 들리고, 무리를 휘감고 있는 분위기는 뭔가 비장하고 무겁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퍼레이드는 말 그대로 페스티벌 그 자체였다. 거리에 흐르는 흥겹고 신나는 음악의 비트는 구경하는 이들의 어깨마저 들썩이게 했고, 요란한 복장으로 한껏 꾸민 행렬과 그 행렬을 구경하는 일반 시민들의 경계는 모호했다. 말이 퍼레이드였지 모두가 함께 즐기는 축제의 현장이었다. 



퍼레이드에 참가한 사람들은 각 무리 별로 개성 있는 복장을 하고 무지개 깃발을 흔들며 걷고 있었다. 특정 지역이나 특정 커뮤니티에서 참가한 것 같은 퍼레이드 속 사람들은 한눈에 보아도 이 행사를 위해 오랜 시간과 정성을 투자했음을 느낄 수 있다. 행렬 속에는 때론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 참가자들도 있었는데 - 아무리 기다려도 우리나라 참가자들은 만날 수 없었지만 -  각양각색의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차림새로 줄지어 걷는 퍼레이드 속에서도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의 동일한 메시지였다. "Love is Love!!". 그렇다, 사랑은 그냥 사랑일 뿐이다. 당신과는 조금 달라 보일지 모르겠지만, 여기 모인 우리들 모두는 바로 당신과 똑같이 사랑을 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심각하거나 진지한 어투로 메시지를 외치지 않는다. 웃음기 가득한 환한 얼굴로 구호를 외치고, 신나는 음악에 맞춰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며 자신들의 사랑을 당당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시민들도 같이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같이 박수치고 노래하며 그들을 응원한다. 행렬이 지나갈 때마다 "Happy Pride!!"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때로는 행렬에 있는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도 나눈다. 그냥 신기한 구경거리로 만 여기고 온 나도 언제부턴가 어깨를 들썩이고 다른 이들과 함께 목청껏 "해피 프라이드!!"를 외치고 있다. 그러다 문득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감동적인 것인지 깨닫게 되자 주책맞게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일반인들과 성소수자들이 뒤섞여 한바탕 축제의 현장이 된 모습을 보니 잔잔한 감동이 몰려오더라.






퍼레이드가 끝나는 오슬로 국립극장 앞 공원에는 커다란 야외 클럽도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에선 행렬에 참가한 주인공들도, 행렬을 구경하던 사람들도 모두들 다 같이 모여 늦은 밤까지 축제를 즐긴다. 혼자인 관계로 잠시 머뭇거렸지만 분위기에 취한 나도 결국 자석에 이끌리듯이 야외 클럽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공원의 중심에 마련된 대형 무대에선 게스트 공연으로 행사를 축하하고, 클럽음악, 유로댄스 등 장르별 음악이 나오는 간이 천막에는 춤을 추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한 여름의 늦은 밤, 술과 음악이 가득한 야외 공원. 알코올에 취하고 흥에 취한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될 법도 하지만 작은 사고 하나 없이 다들 이 시간을 즐길 뿐이다. 행사를 진행하는 관계자들도, 중간중간 보이는 경찰들도 단지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지켜볼 뿐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 박자에 맞춰 발을 구르고 있을 뿐. 북유럽 사람들의 시민의식이란 것에 존경스러운 마음이 생길 때쯤 화장실 앞에 걸려있는 그것(?)을 보고 피식 웃음이 터지고 만다. 이 사람들 참... 대단하구나. 실용과 유머를 겸비한 소품(?)의 절묘한 배치라니!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Oslo Pride는  그 끝에선 소름과 감동이 남겨지고 있었다. 여러 모습의 성소수자가 함께한 퍼레이드는, 그 자체를 행복하게 즐기는 행사의 주인공들, 그들과 같이 행진하는 시민들, 그리고 그런 그들 옆에서 박수치고 응원하는 관람객까지 모두가 함께하는 하나의 큰 축제였다. 이 속에선 그냥 다 같이 현재를 즐기는 사람일 뿐 무언가의 기준으로 서로를 나누고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였다. 특히 서로가 서로에게 "Happy Pride!!"라고 외치는 모습은 이 페스티벌이 주는 감동의 하이라이트였다. 


늦은 시간까지 축제를 즐기고 숙소를 향하는 길, 퍼레이드에서 본 문구 하나가 계속 머릿속에 남는다.


‘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야. 세상에는 다른 잘못된 일들이 많아. ’


그래, 정말 어쩌면 세상에는 그보다 진짜 나쁘고 잘못된 일들이 훨씬 많을지도 모르겠다...






[D+35] 2018.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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