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way ticket project #15 오슬로
여행이 주는 재미라는 것을 이제 막 조금씩 알아가던 초보 여행자 시절 - 여행이라는 장르에 초보니 고수니 이런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어쨌든 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몇 해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그때는 어느 도시에 가던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을 모두 들러보려 무던히 애를 썼었다. 여행이란 건 원래 그런 것을 하러 돌아다니는 일인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스스로 만들어 놓은 빡빡한 일정 속에서 어렵게 들른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의 경험이 이후에 어떠한 깊은 인상이나 기억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결국 그런 일들은 그냥 남들이 다들 하니까, 그저 여행안내서에 나와있으니까 따라 하는 맹목적인 답습이었음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전의 루틴을 따라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 후론 여행 중에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아가는 일은 가장 후순위로 밀리게 되었다. 말이 후순위지 하고 싶은 다른 일들이 산더미인데 그것에 까지 시간을 내어주는 경우는 흔히 않게 되었단 의미다. 정말 꼭 한번 보고 싶은 무언가가 전시되어 있지 않은 한 이제는 여행 중에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는 일은 거의 생기지 않는다. 그 시간에 차라리 떠돌듯 이 거리 저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일이 나에게는 훨씬 큰 즐거움이 되었으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미술관에 들르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미술에 대해서는 1도 알지 못하는 미. 알. 못.이지만, 시선이 꽂히는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진 경험은 몇 번 가져본 터라 그나마 가끔 들르곤 하는 것이다. 비록 세상 사람 누구나 알 법한 그림은 나도 한번 보아야 한다는 의무방어전 성격으로 찾는 미술관이지만, 의외로 별다른 이유 없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그림들과 마주하게 될 때면 정말 한참 동안 넋을 놓고 그 앞에 서서 바라보게 된다. 그 순간에는 마치 전혀 다른 공간으로 차원 이동을 한 듯 눈앞의 그림과 나만이 존재하게 되는데, 둘만이 함께하는 시간이 주는 희열이란 것이 또 참으로 오묘하다. 이 재미를 몇 번 보고 나서부터는 여건이 허락하면 미술관 정도는 종종 찾으려고 하는 편이다.
그런 연장선에서 오슬로에서는 미술관에 한번쯤 들러야 했다. 이 도시에는 누구나 한 번은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그림 하나가 전시되어 있는데,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 에는 바로 뭉크의 '절규'가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남들 다 한다고 따라 하는걸 아무리 좋아하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뭉크의 '절규'인데... 오슬로까지 와서 이 작품을 만나지 않고 간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겠지. 그래서 이 도시에서는 오랜만에 미술관 나들이를 해보려 한다.
예전에 뉴욕의 MOMA와 메트로폴리탄에 갔을 때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따쥐에 갔을 때도, 그 어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갔을 때도 항상 같았던 그 기억을 나는 왜 순간 잊었던 것일까.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 앞에 서서 한가로이 작품을 감상하려던 설렘 가득한 나의 기대는 모두 부질없는 상상이었다. 그 설렘과 기대를 나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세계 어느 미술관을 가더라도 내가 알 법한 유명한 작품 앞에는 항상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순간 잊고 말아 버렸다. 조용한 감상은커녕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관람객들을 뚫고 그림 앞으로 다가가는 것조차 만만치 않은 일이다. 결국 세상 다시 볼 일 없을 뭉크의 '절규'를 나의 인증샷 앵글에 담아두는 것으로 만족하고 나는 그 난리통을 벗어나야 했다. 오히려 그보다는 바로 옆에 있던 'Ashes'라는 작품이 더 인상에 남는다.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두 남녀가 보여주는 절절한 절망의 모습이 어쩌면 또 다른 '절규' 같아 보이기도 한다.
사실 그 그림이 있는 방만 제외하고 나면 나머지 전시관에서는 여유롭게 그림 감상을 할 수 있다.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바쁘게 움직이는 단체관광객들이 유유자적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낼 일은 만무하니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내가 이 미술관에 온 본래 목적은 일찌감치 상실되었으니 이제는 정말 발걸음 닿는 대로 이곳저곳을 다녀본다 (라고 말하고 실은 미술관 내부 안내도를 펼쳐 들고 하나하나 찾아가 본다).
자의 반 타의 반 그렇게 시작된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 유람에서 나의 걸음을 멈추게 한 두 개의 작품이 있었다. 그림의 주제가 어떻든 둘 다 빛과 관련한 이유였는데, 하나는 그림 속의 빛, 다른 하나는 그림 밖의 빛이었다.
첫 번째 그림은 '태풍'인가 '태풍 이후'였나 하는 제목이었는데... 정확하진 않지만 여하튼 연관 단어 중 하나였을거다. 제목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내가 느낀 감동이 중요하지. 흐음... 어쨌든 그림 속에는 하늘 가득 뒤덮고 있었을 검은 먹구름이 걷히고, 해변을 향해 다시 내리쬐는 한줄기 햇살과 그 햇살 아래서 해변을 거니는, 아니 실은 달려가고 있는 듯한, 뭔가 근심 가득해 보이는 엄마, 그리고 그런 엄마를 애타게 쫓아가고 있는 아이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 자체도 눈길을 끌었지만, 처음 작품을 봤을 때 그림 속 해변을 비추고 있는 햇살이 얼마나 강렬해 보였던지 미술관 천장에 매달려 있는 할로겐 조명 탓인 줄 알고 자꾸 위를 쳐다보게 되더라. 아닌 걸 알면서도 한동안 바보처럼 조명과 그림을 번갈아 보았다. 어두움이 사라지고 광명과 같은 햇살이 다시 찾아온 그 시점에 엄마는 뭐가 그리도 걱정이었던 것일까. 그림 속에 표현된 햇살에 대한 착시로 시작된 작품 감상은 엄마와 아이의 사연에 대한 생각으로 한참을 그림 앞에 주저앉아 넋을 놓고 바라보게 했다.
두 번째 그림은 미술관 구경을 거의 끝내고 나오다 계단에서 마주한 그림이었다. 빼꼼히 열린 창문 사이로 나와있는 누군가의 손을 향해 애타게 빵 한 조각을 갈구하고 있는 아이들에 대한 그림. 하얀 눈이 쌓인 추운 겨울, 한눈에 봐도 그 겨울을 지내기가 만만치 않아 보이는 가난한 아이들, 그런 아이들의 간절한 시선이 머무는 어느 창문. 아이러니한 것은 우연히 미술관 천장에 있는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바로 그림 속 아이들의 시선이 머문 그곳을 비추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그곳에 일부러 그 그림을 걸어둔 것처럼. 배고픔과 추위에 지친 아이들에게 누군가 나눠주는 빵 한 조각은 희망 그 자체일 것이다. 바로 그 희망의 손길이 뻗어있는 자리에 하늘에서 내려온 빛이 비치고 있다니. 기가 막힌 위치에 기가 막히게 들어온 한줄기 빛이 그림 속 아이들의 애절함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하고 있었고, 마치 내 눈앞에 실제 있는 것 같은 그들의 힘겨운 삶이 가슴 한편을 더욱 저미게 하고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세상에는 별다른 이유 없이 나의 마음을 잡아끄는 것들이 있다.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사람이 있고,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괜히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은 장소가 있다. 문외한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끔 미술관을 찾는 것 역시 이유를 알 수 없이 빠져드는 그림을 만나는 중독의 경험 때문이다. 이런 경험들이 반복되다 보면 간혹 미술 감상에 대한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건 생각까지 만이다. 나란 사람이 절대 거거까지 나아갈 일은 없으니까. 그보다는 조금 현실적인 목표로 다음부턴 마음에 와서 박힌 그림의 제목 정도는 좀 메모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다. 잠시나마 내가 열렬히 빠져들었던 그림의 작가와 제목 정도는 기억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D+36] 2018.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