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 깜딱이야..
퇴근길에 지하철을 내려서 집으로 걸어오면 직선으로 뻗은 길을 650m 정도 걷게 된다. 오른쪽은 차가 다니는 도로지만 왼쪽은 올라갈 수 없는 언덕으로 이루어진 비탈길이라서 가로수 사이로 걸어가는 길이 꽤 좋다. 가로수의 뿌리가 올라와서 보도블럭이 울퉁불퉁하여 바닥을 보면서 걸어야 하는 길이지만 익숙해지면 적당히 피해서 걸어갈 수 있다.
여기에는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가 4개가 있다. 처음엔 1개 뿐이었는데, 가끔씩 걸어가던 사람들이 앉아서 쉬기도 하고, 유모차나 아이들 자전거가 멈춰서 부모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자동차 불빛과 가로등을 잘 받는 날이면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지나가기도 한다.
퇴근길이 늘 그렇듯이 가방을 메고 에어팟을 낀 상태로 노이즈 캔슬링 모드로 음악을 들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보고 있긴 했지만, 보도블럭을 잘 살펴야 하는 길이라서 폰과 바닥을 번갈아 보는 중이었다. 신호가 걸려서 도로에 차가 지나가지 않는 그 타이밍에 맞은 편에서 하얀 얼굴 하나가 쓱 튀어나왔다. 까만 잠바를 입고 까만 머리라서 스마트폰 불빛을 받은 얼굴만 하얗게 동동 떠서 오는 것 처럼 보였다. 살짝 놀라기는 했지만 상대방은 여전히 폰만 보며 지나갔고, 각자의 방향으로 멀어져갔다.
옛날에야 하얀 소복 입은 귀신을 길에서 만나는 공포가 있었고, 이어폰을 끼고 걸을때면 뒤에서 소리없이 달려오는 자전거나 퀵보드가 놀라게 했다. 이제 각자의 화면에 몰입하다가 앞을 보면 만나는 하얀 얼굴도 무섭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안방이나 마루, 거실에 모여서 하나의 티비 채널을 같이 보면서 공감하던 시절이 있었다. 4인 가족 이상의 대가족 시대에 스크린은 하나였다. 같은 뉴스, 일기예보, 드라마, 영화를 보면서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주제가 있었다. 지금은 N-스크린의 시대가 되어서 가족 단위는 더 작아졌지만 함께 보는 콘텐츠는 별로 없는 시대가 되었다.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폰으로, 각자의 관심사를 소비한다. 거실의 티비는 꺼진채로 놓인지 오래거나 사라졌다. 두자릿수의 시청률을 기록하던 드라마도 이젠 없고, 조회수 선두를 다투는 콘텐츠도 유튜브에 있다. 연말에 각종 시상식들의 일정이 줄줄이 있지만 올해도 누군가와 함께 보는 건 없을 것 같다.
개별적인 개인 콘텐츠의 시대. 공감하고 나누기에 쉽지 않은 시절이다.
20251120. 1,164자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