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꾼의 진심
굳이 MBTI 따위를 묻지 않아도, 일상의 면면에 그 사람을 파악할 수 있는 힌트들이 널려 있다. 샴푸 하는 모습 하나만으로도 우린 그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헤드앤숄더나 TS 샴푸를 쓰고 있다면 비듬이나 탈모가 고민이구나, 아이보리 비누 하나로 머리부터 샤워까지 다 해결한다면 무던하고 효율적인 편이겠구나, 친환경 브랜드의 샴푸바를 사용한다면 환경적인 이슈에 관심이 있구나, 트리트먼트나 컨디셔너를 반드시 쓴다면 머릿결이나 외모 관리를 중요시하는 편이구나-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어느 브랜드의, 어떤 가격대의, 어떤 향기의, 어떤 용량의 샴푸를 사는지, 샴푸를 얼마나 자주 하는지, 매번 같은 상품을 사는지, 아니면 매번 새로운 것을 사는지 등 샴푸 스타일 하나에서도 특정인의 성향이나 취향, 심지어는 신념까지 드러난다.
나는 이렇게 사람들의 머리 감기 행태가 천태만상인 것이 제법 맘에 든다. 물도 대충 적시고 비누 대충 비벼서 대충 거품만 헹구는 사람부터, 온열 커버까지 쓰고 15분 헤어팩을 거르지 않는 사람까지, 또 쓰다 보면 갈라지고 지저분해 보이지만 그 모습마저 시크한 샴푸바부터, 샴푸로는 보이지 않는 근사한 용기에 담겨 그 자체로 욕실의 디자인 오브제 역할까지 해내는 고가의 샴푸까지- 모두가 각기 다른 모습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이 다양한 모습들이 반영하는 것이 취향일 수도, 성향일 수도, 또는 신념일 수도 있다. 매일 사용하는 소비재일수록 개개인의 특징을 더욱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화장품 브랜드에서 상품의 기획부터 개발, 마케팅까지 모든 것을 담당하게 되면서부터 지금까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고 답하고를 반복하는 질문이 있다. "무엇을 만들까"와 "어떻게 팔아야 할까"다. 최초의 답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잘 팔리는 상품’. 그리고 수년간의 피보팅을 거쳐, 지금은 '개개인의 취향과 중시하는 가치를 존중하는 상품'이라는 답에 이르렀다. 이 답에 이르기까지 많은 경험과 레퍼런스가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인터뷰 하나를 소개해본다.
나는 자타공인의 막장 드라마 마니아다. 1990년대부터 무수한 막장드라마들을 섭렵해왔다. 이 막장 드라마들은 내게 단순히 드라마가 아닌 '덕질'의 영역이었다. '아내의 유혹'도 과장 없이 100번이 넘게 봤다. 봐도 봐도 재미있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작가는 왜 이런 드라마를 쓰는 걸까. 내가 '아내의 유혹'을 좋아한다고 하면 돌아오는 대부분의 비슷한 반응들이 있다. 단순한 드라마의 시청자로서도 이런 취급을 받는데, 이 드라마의 작가는 어떻게 이 일을 반복하고 있는 걸까. 드라마의 기저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심리나 본성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은 그 어느 대단한 작가 못지않은데 분명, 이 작가는 억울해서 도대체 어떻게 견디는 걸까. 그리고, 왜 이런 '쓰레기 드라마'를 써내는 걸까. 그렇게 김 순옥 작가를 구글링 하면서 그녀의 지난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지금은 '팬트하우스' 덕분에 이 인터뷰마저 유명해졌지만, 나는 그때 정말, 삶의 커다란 깨달음을 하나 얻은 기분이었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저는 드라마 작가로서 대단한 가치를 전달하고 싶다거나 온 국민을 눈물바다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요. 제가 바라는 건 그냥 오늘 죽고 싶을 만큼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들, 자식들에게 전화 한 통 안 오는 외로운 할머니 할아버지들, 그런 분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는 거예요. 제 드라마를 기다리는 것, 그 자체가 그분들에게 삶의 낙이 된다면 제겐 더없는 보람이죠. 위대하고 훌륭한 좋은 작품을 쓰는 분들은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불행한 누군가가 죽으려고 하다가 '이 드라마 내일 내용이 궁금해서 못 죽겠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드라마, 드라마를 통해 슬픔을 잊고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그런 드라마를 쓰고 싶어요. 마치『마지막 잎새』속 노화가가 그렸던 그 잎새 같은 작품을 쓰고 싶은 거죠. 사람들이 드라마에 대한 기다림을 통해 삶의 의욕을 얻는다면, 그게 제 드라마가 이뤄낼 수 있는 최고의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2014년 이화투데이 인터뷰
심지어, 저 인터뷰 내용은 이미 2001년에 드라마 '인어아가씨'의 주인공이었던 드라마 작가 아리영의 입을 통해 임 성한 작가도 똑같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땐 내가 너무도 어렸기 때문에 그 의의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박수를 받는 드라마를 쓴 박경수 작가도, 김은희 작가도, 노희경 작가도, 박해영 작가도, 김수현 작가도, 김순옥 작가도, 모두가 직접 쓰는 드라마를 통해 각기 다른 메시지와 가치를 세상에 전한다. 그 어느 드라마의 가치나 수준이 다른 것에 우선한다, 못하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다. 각각의 작가들이 써내는 드라마가 면면이 너무도 다른 확고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화장품 시장에도 멋진 플레이어들이 이미 많다. 나는 그 모든 플레이어들이 하나의 가치, 하나의 유행, 하나의 상품만을 만들어내지 않는 것이 가장 건강한 형태의 화장품 시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비자는 구매 선택을 전적으로 본인의 의지대로 했다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수많은 마케팅적인 압력이 작용한 결과가 많다. 다들 지난 4-5년간의 본인의 소비 경험을 찬찬히 정리하거나 곱씹어 보면, 매대에 놓은 수많은 상품들 사이에 분명 구매 결정을 유도하는 유행어나 흐름이 반드시 있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한동안 모든 브랜드에서 내걸었던 문구나 표현이 사라지고, 한순간에 또 다른 흐름이 생겨난다. 여기서 소비자는, 그래도 쓰던 제품을 계속해서 쓸 수도, 아니면 ‘이제는 바꿔야 할 때’라는 메시지를 따를 수도 있다.
그 어떤 소비재보다도 유행에 민감한 화장품을 팔면서, ‘시장의 공급자로서 어떤 상품을 소비자에게 팔아야 하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 있었다. 그리고 현재,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랐다. '소비자들의 취향이나 성향, 또는 신념을 존중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자.' 여전히 의견은 분분하다. 우리 브랜드 안에서도 하나의 상품이 출시되기까지 수많은 토론과 논쟁이 오간다. 개인의 취향보다 세상을 위한 대의가 우선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견도 존중한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소비자들에게 소비의 방향을 정해주기보다, 소비자들이 스스로의 취향과 가치관을 고민하고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미 시장에 수많은 브랜드들이 있고, 근사한 대의와 명분으로 움직이는 혁신가들이 있기에, 나는 보다 덜 중요해 보이는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상품군을 선택하는 것이 크게 나쁘지 않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CS 업무를 하다 보면, 상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질문과 요구가 대단히 다채로운 것을 알 수 있다. 취향을 가진 삶은 소중하다. 대부분의 인생이 커다란 대의보다는 일상의 사소한 성취에서 얻는 기쁨을 원동력 삼아 굴러가기 때문이다. 난 그저 내가 만드는 상품들이 그런 자잘한 만족과 기쁨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