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정주홍 Aug 07. 2017

글쓰기와 영어

글을 보고 쓰는 과정에서 영어와의 싸움에 대한 글

몇 년 전, 보그병신체라는 말이 있었다. 너무 글 속에 영어를 많이 쓰는 바람에 오히려 보기에 보기 좋지 않은 글이 돼버리는 문제에 대한 용어였다. 물론 영어뿐만 아니라 허세나 만연체가 함께 어우러진 결과물이긴 했지만 쓰지 않아도 될 영어를 쓴다는 점이 가장 큰 비웃음거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의 나는 그 문제에 대해 다시 고민하고 있다. 


종종 프로그래밍과 관련된 글을 글을 쓰다 보면 영어 단어를 의도적으로 덜 쓰려고 하지 않는 이상 계속 영어를 쓰게 된다. 예를 들어 글을 쓰면서 신경 쓰지 않았을 때는 Simple Instruction Set Machine이라 썼던 것을 나중에 퇴고를 거치면서 간단한 명령어 집합을 가진 기계라고 고쳐 썼다. High/Low Level Socket API라고 썼던 것을 고수준, 저수준 소켓 API라고 고쳐 썼다.

사실 퇴고를 거치면서도 이걸 굳이 우리말로 고쳐 써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이 많이 들었다. 첫 번째 이유로 독자 수준을 고려하였을 때 이 정도 영어를 못 알아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번역서 같은 경우 신경 써서 번역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우리말 표현을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요즘 프로그래밍 공부를 할 때는 인터넷상의 많은 문서를 통해 공부하는 경우가 많고, 이 경우 영어 표현이 많이 섞인 문서들을 보게 되는 경우가 대다수인 것 같다. 이런 문서들은 영어 표현을 우리말로 고쳐 써도 위의 예인 High Level Socket API를 하이 레벨 소켓 API 정도로 고쳐 쓰는 경우가 잦다. 번역이 아니라 발음 그대로 우리말로 썼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영어 표현을 우리말 표현을 고쳐 쓰다 보면 어차피 독자들도 인터넷상의 문서를 통해 공부한 사람들일 것이고, 그런 사람이라면 영어 표현투성이인 내 글도 마찬가지로 문제없이 읽힐 것이라는 생각이 은근슬쩍 든다.

두 번째 이유로 우리말로 고쳐 쓴 것이 보기에 좀 어색하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Linear Regression선형 회귀 중 어떤 표현이 더 익숙한가? Top Down Approach하향식 접근 중 어떤 표현이 더 익숙한가? 나는 솔직히 회귀라는 단어가 어색하고, 하향식 접근이라는 표현이 어색하다. 영어권에서 공부하지도 않은 내가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말 표현을 어색하게 느끼게 되었는지는 이제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나버려 판단이 안 되지만 지금의 나는 이러한 한글 표현이 어색하다. 심지어 신경 써서 우리말로 번역한 책을 읽으면서 왜 이런 식으로 번역했나 소리치기도 한다. 나 자신이 우리말 표현에 어색함을 느끼니 글을 쓰면서도 우리말 표현을 피했다가 퇴고 때가 되어서야 슬그머니 다시 고쳐 쓰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이유로 번역에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한다. 영어 상의 뜻과 딱 부합하는 우리말을 찾아 쓰는 게 어렵기도 하고, 괜히 우리말로 고쳐 쓰는 과정에서 잘못된 번역을 하게 되면 독자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차라리 널리 쓰이는 영어 표현을 쓰는 것이 더 안심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trivial 한 문제라는 표현을 그대로 번역하면 사소한/하찮은 문제가 되어버린다. 이 경우 trivial 하다는 뜻은 자명한, 혹은 매우 간단하다는 뜻으로 고쳐 쓰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예를 든 것처럼 익숙한 단어가 아니라면 고쳐 쓴 표현이 실제로 널리 알려진 번역 표현인지 판단하기도 어렵다. 이런 것들을 고민하다 보면 글쓰기가 굉장히 고통스러워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때면 이중잣대를 세우곤 한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글에서 영어를 많이 쓴 거야? 허세 부리는 건가?"라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하고, 뒤이어 내가 글 쓸 때의 고통이 떠오르면서 결국 이 사람도 고민 끝에 이렇게 쓴 것이겠지 하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말로 고쳐 쓸 단어들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글을 쓰고 다듬는 과정에서 단어 A는 우리말로 고쳐 쓰고, 단어 B는 그대로 두다 보면 나는 왜 이 단어 A는 우리말로 고쳐 쓰고 단어 B는 고쳐 쓰지 않은 것인가 혼란스럽다. 단어 B를 우리말로 고쳐 쓰려 하다 보니 적절한 우리말 표현이 생각도 잘 나지 않고, 기어이 생각해내서 고쳐 놓고 보니 어색하고, 결국 이 정도는 독자들도 읽는 데 문제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버린 뒤 원래의 영어 표현으로 돌려놓는다. 

이는 그나마 두 개 단어 비교에 대한 예시이니 그나마 단순하지, 실제 글에는 수많은 단어들이 있기 때문에 훨씬 생각이 복잡해진다. 프로그래밍을 한 지 그래도 꽤 오래됐기 때문인지 일관성 없는 상태를 보면 마음이 많이 불편해지는 성격이 되었는데, 그러한 성격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더욱 불편하게 느끼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해답을 찾지 못한다. 이 얼마나 개발자로서 고통스러운 상황인가.


과거 어떤 글에서 말하길, 프랑스 같은 경우 외국의 책을 번역해서 들어올 때 자신의 나라말로 정말 잘 고쳐서 번역된다고 들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지 너무 오래되기도 했고, 내가 프랑스어로 번역된 책을 읽을 능력도 없다 보니 사실관계를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만약 사실이라면 이것이 해답이 아닐까 한다.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으로 우리말로 잘 번역된 표현을 많이 접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말 표현을 많이 접하면 우리말 표현이 덜 어색하게 느껴지고, 또 어떤 단어를 봤을 때 적절하고 널리 알려진 우리말 표현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떤 단어를 영어로 둘지 말지 지금보다는 더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한다. 

지금의 상태는 말하자면 과도기 상태가 아닐까? 프로그래밍이라는 학문이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고, 아직 외국의 지식을 많이 받아들여야 하는 상태이기도 하고. 계속 우리나라 내에서 지식이 다듬어지면서 우리말 표현이 더 많아지다 보면 미래에는 우리말 표현이 더 익숙할 때가 오게 되지 않을까 싶다. 

정주홍 소속 직업개발자
구독자 338
작가의 이전글 Hello, World!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