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강나무 Apr 12. 2023

나혜석의 「경희」에 나타난 근대여성

나혜석, 「경희」, 1918.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 지음, 심진경 엮음,

『신여성의 탄생,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 작품선 경희, 순애 그리고 탄실이』, 교보문고, 2018.



·줄거리

  일본에서 유학 중인 경희는 1년에 한 번씩 집에 다니러 온다. ‘여자도 남자와 같이 많이 가르쳐야’한다는 가족, 특히 오빠의 지원으로 공부를 하는 경희가 사돈마님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본 가면 계집애를 버리’는데 시집을 어찌 갈지 걱정이다. 그러나 경희의 어머니 김 부인은 경희의 생활태도나 생각이 성장하는 모습이라든지 남자들이나 일본인들이 경희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지금 세상에는 여자도 남자처럼 배워야 한다고 확신한다. 이와 달리 경희의 아버지 이철원은 부유한 문벌가인 김판사집과의 혼인을 강요한다. 경희는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삼종지도를 따르며 살 것인지, 험난하지만 주체적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한다. 마침내 경희는 자신이 사람이며, 사람다운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등장인물의 성격

  ① 경희 : 열아홉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결혼 적령기)의 여성이다. 일본에서 근대적 교육을 받고, 일상의 노동과 예술을 결합하는 등 일상에서 아름다움과 행복을 발견하는 심미안을  가졌다. 주변인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인간은 모두 평범하고,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올 때 시월이의 자식에게 줄 정성이 담긴 선물을 보면 인정(人情)이 있다. 아버지와 결혼이라는 봉건사회의 인습에 반항하는 신여성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② 김부인 : 경희의 어머니. 사회가 원하는 현모양처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근대적 교육을 받은 딸인 경희의 의견을 존중한다. 조선사회에서 남편이 첩을 여럿 두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을 여성의 덕목으로 생각하기는 하지만 경희가 이 말을 꼬집을 때 옳다고 생각한다. 경희가 남자와 똑같이 교육을 받고 동등한 대우를 받기를 기대한다.  

  ③ 사돈 마님 : 경희 동생의 시어머니. 봉건적 관념을 따르는 여성의 전형이다. 여자는 명이 길고 아들을 많이 낳고 부유하게 사는 것을 복으로 생각한다. 여자가 공부를 많이 하면 오히려  신세가 고달프다고 생각하지만, 경희가 일솜씨와 다른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상황을 듣고 손녀딸을 교육시키겠다고 마음을 바꾼다.  

  ④ 이철원 : 경희의 아버지. 봉건적 관념의 대표적 인물로 경희가 갈등을 겪게 되는 원인이 된다. 가부장의 전형으로 모든 가족에게 명령을 내리고 가족들이 그가 원하는 대로 따르기를 바라며, 인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다. 



근대 여성운동가의 한 사람인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이면서 여성작가로 알려져 있다. 신여성이라는 말과 동시에 떠오르는 대표적 여성인물로 우리나라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평가되기도 한다. 


작가 나혜석은 작품의 인물인 경희보다 여성의 해방에 대한 논리와 실천에서 훨씬 더 적극적인 행보를 보여 주었으며 그로 인한 사회적 파장도 컸다. 당시 드물게 중국, 일본 외에 유럽 각지를 여행하고 서양화가로서의 입지도 확고하였다. 


나혜석의 삶에 대한 작품들(주1)이 나올 정도로 그 파장이 컸다. 



  「경희」는 1918년 도쿄여자 친목회가 낸 『여자계』에 구여성을 설득하여 신여성의 각성된 삶의 방식에 동의하게 만드는 실천적 삶을 그린 단편소설이다. 제목에서 시사하는 바와 같이 이 작품은 여성 주인공 경희에 대한 이야기로 여성의 교육관, 결혼관, 여성의 자아실현, 주체성 등에 대한 계몽의 효과를 주는 소설이다. 작가가 우리나라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평가되는 만큼 필자는 「경희」를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자세히 읽어 보고자 한다. 


  첫째, 아버지 이철원을 제외하고 직접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여성 인물들이다. 사돈 마님, 김부인, 경희, 오라버니댁, 시월, 떡장수, 이철원의 순서로 등장하는데, 남녀의 성비율의 관점에서 기존 작품들과 비교하면 드문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경희를 제외하면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봉건적 인습에 지배를 받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이지만 그 사고는 지극히 남성적이다. 경희가 다른 인물들과 달리 자신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자각하고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는 인식은 물론 근대적 교육의 혜택의 결과이다. 경희의 교육 경험은 다른 여성 인물들에게 전달된다. 이들은 간접적으로 경희의 교육경험을 수용하며 자신들의 인식을 전환한다. 그러나 유일하게 이철원은 끝까지 변화되지 않는 인물이다. 이것은 가부장제로 대표되는 남성적 세계와 타자와의 조화를 꾀하는 여성적 세계관의 차이를 보여준다. 


  둘째,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안방, 부엌, 툇마루 등 주로 여성들의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여성들은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적인 이야기를 한다. 집에서 주로 남성들만 있거나 남성들과 여성들이 같이 있는 공간은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하거나 교육이 이루어지거나 정적인 행동이 발생하는 조용한 공간이다. 이곳은 소통의 교류라기보다는 일방적 지시가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그러나 여성들의 전용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안방, 부엌, 툇마루는 ‘사(沙) 접시를 깨뜨릴 만치 재미’ 있고 소란스러운 소통의 장소이다. 이러한 소통을 통해 여성들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셋째, 아버지의 권위를 해체한다. 주된 사건의 전개에서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해체는 결혼에 대한 경희의 거부이다.



     아버지가 “계집애라는 것은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시부모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면 그만이니라” 하실 때에 “그것은 옛날 말이예요, 지금은 계집애도 사람이라 해요, 사람인 이상에는 못할 것이 없다고 해요, 사내와 같이 돈도 벌 수 있고, 사내와 같이 벼슬도 할 수 있어요. 사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세상이예요” (41-42쪽)



  여성은 아버지와 남편과 자식의 부속으로만 존재하는 봉건적 사고방식에 여성도 남성과 같은 존재임을 강조한다. 다음은 아버지라는 권위 자체를 부정한다. 



     마침 어느 때 활동사진에서 보았던 어느 아이가 아버지가 장난을 못하게 하니까 아버지를 팔아버리려고 광고를 써서 제 집 문밖 큰 나무에다가 붙였더니 그때 마침 그 아이만한 6, 7세 된 남매가 부모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다가 꼭 두 푼 남은 돈을 꺼내 들고 이 광고대로 아버지를 사려고 문을 두드리던 (11쪽)



   필요에 따라 아버지를 팔고 사는 행위는 아버지-자식이라는 수직적 관계에서 오는 권위를 부정하고 사람-사람이라는 수평적 관계를 비유한다고 볼 수 있다. 


  넷째, 일상의 노동에서 아름다움과 행복을 본다. 흔히 사고하는 행위는 우월하고 몸을 움직여하는 노동은 열등한 것으로 치부한다. 우월은 남성과 열등은 여성과 관련지어 구분하는데, 「경희」의 경희는 아궁이에 불 때는 소리를 관현악 연주 소리에 비유하고, 색과 색의 조화, 장단의 음률에 맞추어 청소를 하는 등 일상의 노동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세상을 우월-열등의 구분이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느낀다. 


  마지막으로, 몸에 대한 인식이다. 정신의 작용에 대해서 물리적인 몸은 열등한 것으로 분류하는 사회에서 집안의 일을 직접 몸으로 하는 여성 역시 남성(또는 이성, 정신)과 대등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경희는 자신의 몸을 통해서 자신의 실재를 확인하고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의 힘의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경희는 제 몸을 만져 본다. 왼편 손목을 바른편 손으로, 바른편 손목을 왼편 손으로 쥐어 본다. 머리를 흔들어도 본다. 크지도 않고 조그마한 이 몸..... . 이 몸을 어떻게 서야 할까. 이 몸을 어디로 향하여야 좋은가 ..... 경희는 다시 제 몸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본다. (40쪽)


     여하튼 두말할 것 없이 사람의 형상이다. 그 형상은 잠깐 들씌운 가죽뿐 아니라 내장의 구조도 확실히 금수가 아니라 사람이다. 오냐, 사람이다.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험한 길을 찾지 않으면 누구더러 찾으라 하니! 산정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것도 사람이 할 것이다. 오냐, 이 팔은 무엇을 하자는 팔이고 이 다리는 어디 쓰자는 다리냐? 경희는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두 다리로 껑충 뛰었다. (48쪽)



  사람의 존재를 몸을 인식함으로써 확인한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으로서 자신의 존귀함을 깨닫는다. 자신의 의지로 몸을 움직여보는 경희는 아버지와 남편과 자식에 의해서만 그 존재의미가 결정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몸을 통하여 주체적인 삶을 살기를 다짐한다.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암흑기였던 1910년대에 나혜석의 경희는 시간적, 공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여성으로서 더 나아가 사람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자각한다. 


여성이라는 한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제한하는 결혼과 가족이라는 전통적 규율을 깨고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시사한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봉건사회의 폭력에 몸을 이용한 노동을 통해 경제적 자립이 가능하다는 것을 또한 강조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이후 1930년대에 발표한 ‘남성작가’ 채만식의 소설(주2)과 중요한 점에서 그 차이가 있다. 채만식의 노라는 지금까지의 제도와 전통을 파괴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전락의 길로 떨어지고 난 후에 비로소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는데(주3), 그에 반하여 나혜석은 직업에 귀천이 없으며, 자신의 몸을 타인이 아닌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을 타락의 길로 떨어뜨리지 않고도 그들의 연대와 인정을 통해서 여성의 자립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1. 채만식의『인형의 집을 찾아서』와 염상섭의 「해바라기」

2. 채만식은 소설 『인형의 집을 나와서』(주4)에서 나혜석의 삶을 소설화했다. 주인공 노라는 남자가 만든 사회에서 인형이 되기를 거부하고 사람이 되기 위해서 집을 나온다. 그러나 경제적 불안정으로 인해 노라의 자유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노라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인물인 옥순, 성희, 정원 역시 경제적 불안정으로 인해 “노예가 되는 자유”(149쪽)를 선택한다. 노라 역시 여성이 인간임을 주장하지만 현실은 경제적 기반이 없는 그녀에게 쉽게 자유를 내주지 않는다. 노라는 결국 카페 여급으로 ‘전락’하여 성폭행을 당하고 자살기도를 한다. 일전에 노라는 오병택이 빌려준 『부인론』을 읽고 자신이 원하는 자유에 대한 확신을 얻으려 하지만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성인물인 남식이와 남수의 도움으로 노동을 통해서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3. 이러한 스토리의 전개에서 필자는 남성작가가 여성인물에게 권력을 가하여 여성인물의 삶을 좌지우 지는 하는 인상을 받았다. 이와 달리 나혜석의 경희는 직업에 귀천을 두지 않고 모든 일을 신성시한다. 따라서 세칭 여성의 통과의례로 성과 죽음을 담보하지 않고도 여성이 주체성을 정립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4. 채만식, 『人形의 집을 나와서』, 창작사, 1987.  (1933년 5월부터 11월까지 조선일보에 연재)

작가의 이전글 나는 소망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