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에 나오는 왕비는 마법의 거울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묻는다, ‘거울아 거울아, 우리들 중에서 누가 가장 아름답지?’라고. 왕비는 어린 백설공주와 자신을 비교하고 자신의 아름다움이 재확인되면 안도한다. 왕비가 원하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왕비는 자신이 보기를 원하는 자기애적 욕망이 투영된 외형을 소망했을 것이다. 이 왕비의 거울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거울은 일반적으로 왜곡된 현실이나 부재의 이미지를 나타낸다. 거울에 비치는 상은 실재를 더 크게, 더 작게 혹은 대상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거울에 비친 상은 내가 원하는 모습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이사를 하면서 서재를 없앴다. 책상을 넣을 공간이 없어서 안방에 빌트인 되어 있는 화장대가 내 책상이 되었다. 새로운 책상은 전면이 거울이다. 얼굴을 들면 내 얼굴이 가감 없이 비친다. 그럴 때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물속에 얼굴이 비칠 때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으로 휘저어 버리면 된다. 물결이 생기면서 모든 이미지는 일그러진다. 물에 투영된 이미지는 내가 아니라고 쉽게 부정할 수 있고 반박의 여지도 없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없애기 쉽지 않다. 입김을 불면 뿌연 회색이 잠깐 동안 영상을 가리기도 하지만 이내 그대로 드러난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세월의 흔적과 결과를 보여 준다. 생기 잃은 모습과 젊은 시절의 꿈 사이에서 고통스러운 깨달음의 순간이 자리 잡는다. 물과는 달리 거울과 나는 서로 스미지 못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이 순간을 흔들어 지울 수가 없다. 눈앞의 영상에 무관심할 수가 없다. 미용실에 가면 앞 뒤 벽면의 거울이 서로 비춰주어 수많은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방향에 따라 모든 각도의 내 모습을 한 번에 볼 수 있다. 그렇게 보이는 다면적 이미지가 외형적 사실이기는 하지만 나의 주체적이거나 심리적인 상태의 진실을 반영한다고 볼 수는 없다. 물속의 영상을 손으로 휘저어 지울 수 있는 것처럼 약간의 움직임은 나와 거울 속의 이미지가 서로 바라보지 않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단 한 개'의 거울은 나를 옴짝달싹 할 수 없게 한다. 나는 나를 바라본다. 눈을 들여다본다. 아무런 느낌이 담겨 있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면 ‘일상의 행복’이라든가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 같은 클리셰로 일장 연설을 하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주문이 통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평범과 일상의 강조는 어쩌면 삶의 피로와 진부함을 감추는 가면이 아닐까.
왕비가 원하는 아름다움은 단순히 외형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었을 것이다. 친숙하지만 낯선, 끊임없이 새로운 자신의 존재를 소망했을 것이다. 비실재성에 욕망을 담아 실재에 이르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욕망이 본질에 이르지 못한 이유는 끊임없이 거울에게 물어보며 그 대답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 못한 데 있지 않을까.
나는 다시 얼굴을 들고 거울을 본다. 고통을 일으키는 깨달음의 순간은 일상과 일상을 연결시키는 열정이라는 매듭이다. 삶에 활기를 불어넣는 역동적인 변화의 지점이다.
나는 거울에게 말한다, ‘나는 소망한다, 내부에서 꿈틀대는 욕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