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정의 하이엔드 월드(High-End World) 53
프랑스에 샤토가 있다면 이탈리아에는 '보르고(Borgo)'가 있다. 이탈리아에도 거대한 성이 있지만 그보다는 전원의 여유와 역사를 만끽할 수 있는 보르고가 이 나라의 매력에 더 걸맞는 곳이라 생각된다. 보르고는 이탈리아어로 오래된 마을이라는 뜻. 중세 이후 전해져 온 작은 마을을 호텔로 개조한 곳이다. 하나의 건물에 여러 객실이 들어있는 일반적인 호텔의 방식이 아니라 단지 안에 정원과 수영장, 테라스와 회랑, 크고 작은 빌라동을 갖고 있으며 때로 전용 농장이 있기도 하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보르고 스타일의 호텔을 찾아볼 수 있지만, 특히 아름다운 곳은 중부 토스카나 지방에 주로 모여 있다. 푸른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 하늘을 찌를 듯 한 사이프러스 나무 가로수 위로 푸른 하늘이 펼쳐지는 곳. 그 속에 오렌지 빛 건물과 오래된 돌담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듯 숨어있다.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최고의 음식이 함께하는 것은 물론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최고의 보르고 호텔은 산토 피에트로(Borgo Santo Pietro)이다. 시에나의 남서쪽, 끝없는 구릉이 펼쳐지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13세기에 로마로 향하는 순례자들이 쉬어가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2001년 폐허와 비슷했던 곳을 리노베이션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과거 순례자들의 안식처가 되었던 그대로, 휴식을 원하는 현대 도시인들에게 완벽한 공간을 제공한다. 비록 건물의 기반과 돌담은 7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현대적인 설비와 서비스의 수영장, 스파, 레스토랑, 객실을 즐길 수 있다.
수 백 년 이어온 공동체의 역사대로 호텔 내에 직접 운영하는 농장에서는 다양한 유기농 야채가 재배되고 닭, 돼지, 알카파 등도 자란다. 정성스럽게 길러진 식재료는 호텔이 자랑하는 미슐랭 1스타 레스토랑에 제공된다. 크리스탈 샹들리에와 프레스코 벽화, 벨벳과 실크로 만든 커튼과 캐노피, 앤티크 가구와 벽을 장식한 그림에서 역사를 존중하는 이들의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최고의 허니문 호텔로도 손꼽히는 이 곳. 프라이빗 웨딩이 가능한 것은 물론 수영장을 둘러싼 동굴에서 촛불을 켜고 둘 만의 로맨틱한 정찬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주방 안에 차려진 셰프의 테이블에서 기억에 남을 미식 경험도 해볼 수 있다. 지역을 대표하는 와인,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도 함께해 본다.
매주 목요일 저녁에는 정원에서 클래식 이탈리아 영화를 상영한다. 산토 피에트로에서는,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을 ‘보르고 익스피어리언스(Borgo Experience)’라 부른다. 그만한 자신감의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도 한 가지 큰 아쉬움이 있으니, 전체 객실이 8개 밖에 되지 않아 예약하기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귀하게 생각되는지도 모르겠다.
보르고 산 펠리체(Borgo San Felice)는 피렌체와 시에나의 중간, 끼안티 지역에 있다. 끼안티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와인 생산지의 하나이다. 오래된 성당과 연못, 와인저장고와 포도밭을 가지고 있는, 중세부터 내려온 장원과 같은 작은 마을을 호텔로 개조한 곳이다. 크고 작은 여러 채의 건물에 총 29개의 객실이 있으며 지중해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고급 레스토랑과 편안한 피자 화덕의 전통 토스카나 오스테리아가 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토스카나의 전망을 감상할 수 있고 멀리 가지 않아도 주변의 수도원과 성당, 마을 광장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로맨틱한 탑의 도시, 산지미쟈노나 시에나로 데이 투어도 가능하다. 이동 시간은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세르토사 디 마지아노(Certosa di Maggiano)는 1314년 지어진 카루투지오(Carthusian) 수도회의 수도원을 호텔로 개조한 곳이다. 앞에 언급했던 두 곳에 비해 조금은 편안한 4성급 호텔이다. 1978년 과거 수도사들의 개인 공간을 그대로 객실로 바꾸었고 수도사들의 주방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수도사들이 금욕과 고행의 시간을 보냈던 회랑식 복도와 테라스, 정원에서 현대의 도시인들이 휴식의 시간을 갖는다.
고요하고 편안하게, 도시의 스트레스를 떨쳐버리고 자신에게 온전한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곳. 보르고를 선택한다면 그 휴가는 절대 잊지 못할 시간이 될 것이다.
* 이 글은 2016년 1월 27일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