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정의 하이엔드 월드(High-End World) 36
유럽 대륙의 중심을 흐르는 총 길이 2826km의 도나우 강. 흔히들 그림 같다고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강이지만 그 중에서도 최고의 경치를 자랑하는 곳은 오스트리아의 바하우(Wachau)계곡이다.
멜크(Melk)에서 크렘스(Krems)까지 이어지는 약 36km의 바하우 계곡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곳이다. 계곡을 따라 구비구비 흐르는 강도 아름답지만 경사진 포도밭 사이의 작은 마을들, 강을 내려다보는 가파른 산꼭대기에 남아있는 수도원과 고성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지역의 모습은 아직도 천 년 전 중세시대의 모습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듯 하다. 도나우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 계곡을 따라 느껴볼 수 있다. 12세기 후반 쓰여진 독일의 대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Nibelungenlied)에도 바하우 계곡은 등장한다.
바하우 계곡에서 최근 가장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곳은 멜크 수도원이다. 천 년 가까운 오랜 세월 동안 로마 카톨릭의 본거지였던 곳으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바로크 시대의 수도원이기도 하다. 건물은 18세기 초반에 다시 지어져 고풍스러운 느낌은 덜하지만 그 규모와 웅장함, 역사적 의미, 내부의 화려함에서 다른 어떤 곳에도 뒤지지 않는다. 움베르토 에코의 세계적인 화제작 『장미의 이름』의 모티브가 된 견습 수도사의 수기가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10만권의 장서가 있는 도서관은 유럽에서 손꼽는 아름다운 도서관이다.
크렘스는 바하우 계곡 일대에서 재배되는 포도를 원료로 한 오스트리아 제일의 화이트 와인 집산지이다. 포도밭 사이로 드문드문 알록달록한 독일풍 집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도나우강 유람선 관광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 와인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 전통적인 유럽의 와인 강국 와인들에 비하면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와인도 역사적으로 그 전통을 무시할 수 없다. 바하우 계곡에서도 기원전부터 포도가 재배되었다고 한다. 현재 생산되는 와인의 80%가 화이트 와인인데 수 십 종의 토착 포도를 이용한다고 하지만 최근 가장 인기있는 대표 품종은 그뤼너 벨트리너(Gruner Veltliner)이다.
그뤼너 벨트리너는 가볍고 드라이한 듯 하지만 미네랄이 풍부하고 맛의 무게감도 확실한 와인이다. 화이트 와인 생산이 많은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오스트리아 와인은 가까운 독일 와인의 양조기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생산자들은 대부분 소규모이며 극히 제한적인 양의 다양한 와인을 함께 만든다. 단일 품종의 포도를 사용하며 와인의 순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바하우의 음식은 돼지고기 정도를 제외하면 사냥한 고기나 민물고기를 주로 이용한다. 이런 음식에 포도의 순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성 있는 토착품종의 와인이 잘 어울린다.
유람선을 타고 가다 와이너리에서 직접 만든 와인을 맛보고 수도원과 고성을 들러보고 배 안 레스토랑에서 도나우 강의 민물고기 요리를 화이트 와인과 함께 맛보며 계곡의 절경을 여유있게 즐긴다. 포도밭 마을인 슈피츠(Spitz)나 고성과 요새의 유적이 남아있는 쇤비엘 성(Schloss Schonbuhel)이나 악슈타인(Aggstein)도 아름답다.
바하우 최고의 호텔은 뒤른슈타인 성(Schloss Durnstein)이다. 17세기 지어진 성인데 1937년 최고급 호텔로 변신했다. 요한스트라우스의 푸른 도나우 강 왈츠 선율이 들릴 듯한 모습의 강과 호텔의 조화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로맨틱한 풍경이라 이야기되곤 한다. 여름철 도나우 강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서 즐기는 식사는 누구나 꿈꾸는 가슴 두근거리는 순간을 만끽하게 한다. 호텔이 자리잡은 뒤른슈타인도 특별하다. 사자왕 리처드가 유배되었었다는 12세기 성의 흔적과 함께 포도밭이 가득한 작은 마을로 중세시대에 지어진 시청사와 궁전, 수도원 등이 남아있다. 그야말로 그림책에 나올 듯한 마을이다.
* 이 글은 2015년 9월 30일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