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오기 전, 바람의 결이 달라지는 어느 날. 문득 그 꽃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연분홍, 연보라, 하늘빛을 품은 수국. 그 몽글한 꽃들이 피어난다는 사찰이 있다고 해서, 광양으로 향했습니다.
이름도 예쁜 길상사. 이름처럼, 길하고 상서로운 기운이 사방에 감도는 곳이었어요.
광양 중마동에서 차로 15분 남짓. 시골길을 따라 굽이굽이 들어가다 보면 작고 단정한 절 하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길상사, 전남 옥곡면에 자리한 이 절은 번잡함에서 멀리 떨어진 고요한 공간입니다.
처음 마당에 들어섰을 때, 돌이 깔린 땅과 가지런히 놓인 석탑, 잘 다듬어진 나무들이 먼저 눈을 맞춰줬습니다. 오래된 절이 풍기는 아늑함이 참 좋았어요.
이 절을 특별하게 만든 건, 꽃입니다. 그것도 수국 3천 그루가 꽃길을 이루는 풍경이죠. 이 꽃길은 그냥 꾸며진 게 아니에요. 스님이 직접 한 그루 한 그루 심고 돌본 길이랍니다. 그래서인지 꽃들마다 더 깊은 정이 느껴졌어요. 길이는 짧지만, 그 밀도와 풍성함이 압도적입니다.
길 양옆으로 수국이 흐르듯 피어있고, 어떤 수국은 연분홍으로, 어떤 건 보랏빛으로, 또 어떤 건 옅은 하늘색으로 물들어 있어요. 같은 꽃이지만 그 다채로운 색감에 감탄하게 돼요. 걷는 내내 바람에 실려오는 꽃향기와 조용한 산사의 공기가 어우러져, 마음도 절로 가벼워졌습니다.
제가 다녀온 건 6월 중순. 수국이 막 절정을 향해 피어나기 시작할 무렵이었어요. 활짝 핀 꽃도 있고, 아직 봉오리 상태인 것도 있어 7월 초까지는 넉넉히 수국을 감상할 수 있을 듯합니다. 특히 정자 옆 산책길은 이제 막 꽃이 오르기 시작해 며칠만 지나면 더 화사한 풍경이 펼쳐질 거예요.
사실 수국은 참 귀한 꽃이에요. 피어있는 시기가 짧기 때문에, 매년 이맘때가 되면 ‘지금 아니면 못 본다’는 생각이 들어 더 애틋하게 다가옵니다.
절은 크지 않지만 정갈하고 조화로운 풍경이 인상적입니다. 커다란 불상과 삼층석탑, 나무 사이사이 놓인 벤치들, 그리고 그 곁을 채운 초여름의 나뭇잎들. 이 절은 누가 봐도 손길이 자주 머물렀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정성스레 가꿔져 있어요.
잠시 걷다가, 꽃 앞에 멈춰 서고, 그늘 아래 앉아 바람을 맞아보는 순간들. 요란한 것도 없고, 인파도 많지 않은 이곳이기에 가능한 장면입니다.
꽃을 보며 걷다가 고개를 들면, 저 멀리 매실과 살구가 달린 나무들이 보입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살랑이고, 어딘가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너무 조용해서 더 생생하게 들리는 그런 소리예요. 사람 손이 닿은 자연이, 어딘가 어릴 적 외갓집 마당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걷다 보면 돌탑 하나, 벤치 하나에도 시선이 머물고, 수국 뒤편으로 살짝 보이는 대웅전의 지붕 선이 정겹게 다가와요. 어떤 공간은 '화려함'보다 '정겨움'이 더 강하게 남는다는 걸, 이곳에서 다시 느낍니다.
길상사는 관광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더 좋습니다. 조용한 산사에 흐드러지게 핀 수국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았기에, 혼자만의 여름 기억을 담기에 딱 좋은 공간이에요. 무거운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싶을 때, 그냥 걷고 싶을 때, 이 수국길이 참 고마운 존재가 되어줄 겁니다.
올해 여름, 단 하루라도 괜찮습니다. 도시를 벗어나 이 수국길을 걸어보세요. 꽃도, 바람도, 조용한 절도 아무 말 없이 당신을 위로해줄 거예요. 그리고 분명히, 마음 한 편에 오래도록 남을 초여름의 온기를 남겨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