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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Oct 13. 2020

스플리트 여행

로마제국 황제들의 별장

스플리트 구도심에 도착하면 누구나 바닷가에 접하면서 종려나무가 일렬로 있는 라바거리에서 상쾌한 두근거림을 맛본다. 누군가가 다가와 이 곳에 잘 왔다고 환영인사를 건넬 정도로 거리는 활기에 넘친다.


무엇보다 여행자의 모험심을 자극하는 것은 도심 한 가운데 떡 버티고 있는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은 기원후 295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짓기 시작해 305년에 완성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의 고향인 이곳에 궁전을 지어 황제직을 은퇴하고 311년까지 살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인황제들이 득세하여 어느날 갑자기 황제가 바뀌어도 누구하나 신경쓰지 않는 로마제국의 쇠퇴 시기에 크로아티아의 비천한 노예로 태어났다. 그는 군대에 들어가 각고의 노력으로 황제의 친위 대장이 되었으며 누메리아누스 황제가 니코메디아에서 살해되자 휘하 군대의 추대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황제가 된 후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사방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 두 명의 황제와 네 명의 부제를 임명하여 분할 통치했다. 그래서 자신은 동쪽의 황제가 되었고 부황제는 갈레리우스를 임명했다. 또한 서쪽의 황제는 막시미아누스를 임명했으며 부황제는 콘스탄누스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를 지명했다.


이처럼 두 명의 황제와 부황제가 다스리는 로마제국은 상대적으로 좁아진 자신의 관할구역을 철저히 감시해 내란의 가능성을 줄였다. 이후 그는 우수한 인물들이 혈통에 관계 없이 황제에 오를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정치개혁외에 시들어가는 로마제국을 살리기 위해 다방면의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민생법안을 기득권에 젖어있던 원로원의 의결이 아닌 황제의 칙령으로 바꾸면서 이를 보좌할 관료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로서 행정업무는 전문화되고 체계화되었다. 또한 군사제도를 개편하여 수도 근방에 기병 중심의 야전군을 설치하여 출신과 상관없이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충원하였으며 국경 지대에 변경주둔군을 상주시키며 이를 현지인으로 충원하고 세습시켰다.



행정제도 확립과 관료제 도입 그리고 군사제도 개편 등으로 인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세금제도에도 손을 대는데 3세기 동안 난립하는 임시세를 폐지하고 이탈리아를 포함한 제국 전역에 농경지에 부과하는 토지세와 사람에게 부과하는 인두세를 정착시켰다. 또한 모든 세무는 중앙정부가 통합 관할하여 중구난방이었던 지방자치단체는 독자적인 재정을 사실상 보유할 수 없게 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정치적 행정적 개혁의 결과로 로마제국에 경제가 회복되며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


하지만 그는 종교 정책에서 중대한 과오를 범했다. 그는 초기에는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았다. 그의 부인 프리스가와 딸 발레리아와 대부분의 내시들과 궁녀들도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기독교를 핍박하기 시작한 것은 부황제이자 사위인 갈레리우스의 충고 때문이었다. 갈레리우스의 어머니 로몰라는 독일 여사제로 그녀의 간청으로 기독교를 핍박하게 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까지 충동시켜 핍박에 나서도록 유도했다.  


황제는 303년에 기독교 탄압에 대한 칙령을 발표하고 잔혹한 핍박을 시작했다. AD303-304년 사이에 네 차례나 칙령이 내려졌고 한 달 사이에 1만7천명의 기독교인이 희생되었다. 특히 그는 2월23일, 로마의 신 테르미누스를 위한 축제일에 기독교인들을 전멸시키기로 작정했다.


그는 칙령을 내려 제국 내에 있는 모든 성경책과 예식서를 압수했고 예배를 위한 모든 모임을 금지시켰다. 명령에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의 공직을 박탈했고 그들을 범죄자로 선언했다. 당시 사자들에게 살육을 당한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인육을 먹던 맹수들이 사람들을 찢어 죽이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로마제국을 안정화시켰지만 기독교인을 탄압한 황제로 가억되며 황제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로마제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황제직을 내려놓고 자신의 고향 스플리트에 개인 궁전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이후 그는 황제에 복귀해 달라는 막시미아누스의 전갈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내 손으로 직접 심은 양배추를 보여 주면
그도 권력을 추구하는 데서 행복을 찾는
허망한 일을 단념할 것인데...



다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가 살해된 이후 그의 복귀를 두려워하는 세력에 의해 아내와 딸을 잃고 그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서 215m 남북 181m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의 성벽높이는 25m로 궁전의 대부분은 스플리트 앞 바다에 있는 브라치 섬에서 가져온 석회암과 이탈리아 그리스에서 수입한 대리석과 화강암을 사용하여 지었다.


궁전의 북쪽 지역은 궁전을 지키는 병사들의 병영으로 사용되었으며 남쪽 지역은 황제를 위한 거주지로 사용되었다. 황제의 거주지는 다시 동서로 나누어 동쪽은 집무공간과 영묘로, 서쪽은 주거 및 사원 공간으로 사용했다.


황제의 사후에는 쫓겨난 로마의 황제들이 기거했으며 로마 제국의 붕괴와 함께 황폐화 되었다. 그후 전쟁을 피해 도망친 주민들의 은신처가 되었으며 그들에 의해 비잔틴과 베네치아 그리고 헝가리 양식이 가미된 새로운 성벽이 건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도 궁전은 일반인들의 주거지로 사용되고 있으며 일부는 유적지로 남아 있다.



궁전안에서 가장 인기있는 곳은 열주광장이다. 이곳은 황제의 회의나 행사 등을 주재한 장소로 웅장한 16개의 열주식 대리석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다. 광장에는 성 도미니우스 성당과 이집트에서 가져온 스핑크스가 있다.



7세기에 세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도미니우스 성당은 황제에게 죽임을 당한 성 도미니우스를 위해 지은 성당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성당의 터는 성당을 짓기 이전 170년간 다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무덤이었다.


어느 날 사라진 황제의 시신은 지금도 찾지 못하고 있다. 대성당 입구에는 여전히 로마 황제의 영묘임을 나타내는 두 마리의 로마 사자상이 있다.



사자상 옆에 있는 스핑크스는 원래 사원이나 영묘 앞에 세워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잡귀를 막는 역할을 했다. 그것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 이곳에 이집트의 스핑크스를 가져다 세워놓았다. 하지만 근래에 종탑에 벼락이 떨어지면서 벽체의 일부가 스핑크스에 떨어져 머리 부분이 깨지고 말았다.



성당안으로 들어가면 내부는 코린트 기둥이 받치고 있는 돔이 보이고 기둥 사이에 성  도미니우스의 관이 안치되어 있다. 또한 황제와 그의 아내의 얼굴을 조각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그 옆으로 보이는 채찍질 당하는 예수의 고난사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성 아나스타시우의 제단은 15세기 유라리 달마티나츠의 작품이다.


2층 보물관에는 성서와 십자가 성모상 그리고 도미니우스 동상 등 성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성당 입구에는 14-16세기에 추가 건설된 60m의 종탑이 있다. 이 종탑에 오르면 궁전과 시내의 전경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다.




대성당 맞은편의 작은 골목에는 주피터 신전이 있다. 자신을 주피터의 아들로 신격화한 황제는 이곳에 신전을 세워 숭배하였다. 신전 앞의 머리 없는 스핑크스는 5세기에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이다. 지금 이곳은 기독교의 세례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열주 광장에서 바다쪽을 향해 있는 남문의 계단을 올라가면 황제의 아파트가 나온다. 이 곳은 신하가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대기하던 장소로 커다랗고 둥근 돔이 특징이다. 현재 돔은 뻥 뚫려 있으며 이곳 안쪽에는 황제의 식사를 준비하던 부엌과 식당이 있다.



다시 열주광장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남문 계단으로 내려가면 지하가 나온다. 지하에는 여러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지하 상점가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1960년대에 발굴된 지하궁전 홀이 있다.


식량창고로 사용한 이 곳은 굵은 기둥과 아치형의 천장이 특징이며 현재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져온 스핑크스가 전시되어 있다. 바다를 향해 있는 이곳은 원래 바다로 이어져 배를 타고 왕래 했다고 한다.




다시 열주광장으로 돌아와 도마니우스 성당 옆으로 가면 <렛미패스>라는 이름의 골목길을 만난다. 이 곳은 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은 길로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여기를 세상에서 제일 좁은 골목길이라 여긴다. 이 곳 골목에서 크로아티아 여자들은 잘 생긴 남자가 오면 괜히 몸을 밀착하며 슬쩍 스킨십을 유도하며 남자를 유혹했다고 한다.


열주광장에서 바다와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면 황금의 문이라 불리는 북문이 나온다.



북문으로 나가면 높이 4.5m의 거대한 동상이 있다. 동상은 주인공은 10세기 대주교였던 그레고리우스 닌으로 그는 크로아티아어로 예배를 볼 수 있도록 투쟁한 인물로 크로아티아에서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1929년 이반  메슈트로비치가 청동으로 만든 이 조각상은 카리스마 넘치는 분위기와 규모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그의 엄지 발가락은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손을 타서 늘 반짝거린다.


마지막으로 궁전의 서쪽문인 철의 문을 통과하면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나로드니 광장이 나온다.




광장에는 베네치아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 즐비하다. 그 가운데 15세기 베네치아 고딕 양식의 구시청사는 현재 민속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광장 한 켠에는 최초로 크로아티아어로 책을 쓴 마르코 마루리치 동상이 있다.


광장에서 골목길로 접어들면 상점들이 나오는데 마음이 따뜻해지는 못난이 천사 벨리의 그림을 파는 가게가 눈에 띈다. 이 작품은 크로아티아의 여성화가 엘라가 백혈병이나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이들이나 아동학대에 시달리는 불우한 어린 소녀들을 돕기 위해 만들은 것이다.



붉은 머리카락에 등에는 날개를 단 벨라는 못생겼지만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웃음을 짓고 있다. 벨라를 파는 가게는 크로아티아 전역에 있다고 한다.


이제 여행의 마무리를 위해서 스플리트의 가장 높은 곳이 마르얀 언덕을 오르자.



마라얀 언덕에 오르면 시원한 바람을 간직한 카페와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에 앉아 시원한 음료와 함께 여행의 여유를 즐기다보면 반짝 반짝 빛나는 스플리트의 야경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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