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박물관 메소포타미아관
친구의 죽음은 그에게 충격이었다.
사람이 태어나서 늙고 병들며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에게는 언제나 먼 이야기처럼 들렸다.
젊은 시절에는 언제든지 명예롭게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친구의 죽음을 직접 본 그는 두려웠다. 아무리 명예가 높고 재산이 많다고 한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허무했다.
그는 죽으면 끝인데 악착같이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죽음을 목도한 그는 연일 일을 놓고 정처 없이 걸었다. 주위의 모든 풍경이 반짝이지만 슬프고 외로워 보였다. 저녁이면 늘 술을 마셨다.
하지만 죽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지구 끝까지 가서라도 그 방법을 찾겠다고 다짐하였다.
다음 날 그는 길을 나섰다.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그리고 몇 년이 지나도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 없었다.
오히려 세상에 그런 것이 어디 있냐며 사람들에게 비웃음만 샀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이상했다.
그들 역시 죽을 것인데 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코 죽지 않을 사람처럼 하루하루 먹고 자고 즐겁게 지내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는 화가 났다.
저들이 바보인가 아니면 내가 바보인가?
매일 평범하지만 즐겁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과 미친놈처럼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헤매는 나를 비교해보자 갑자기 그는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그래도 한 때는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왕이었다.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왕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쩌면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평생 안고 사는 것이 숙명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발걸음이 천천히 왕국으로 향하고 있을 무렵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대홍수 속에 살아남은 우트나피스팀이 불로초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잦은 전쟁으로 불안한 미래나 아픈 과거보다는 현재에 집중하며 삶을 영위한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유물을 보기 위해서는 영국 박물관 2층 56번 전시실로 가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4500년 전, 인류 최초 문명의 도시 국가였던 우르의 유물이 있는 이곳에 푸아비 왕비의 장신구와 악기 그리고 장식품이 전시되어 있다.
푸아비 왕비의 무덤에서 발견한 화려한 장신구를 살펴보면 갖가지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특히 파란색 보석인 청금석(라피스 아즐리)은 왕비가 살았던 곳에서 2,000km나 떨어진 아프가니스탄에서만 생산되었다.
자동차나 기차가 없던 그 시절, 그 먼 지역에서 청금석을 가져와 장신구를 만들었다는 것을 볼 때 당시 우르의 왕권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푸아비 왕비의 장신구 옆으로 같은 무덤에서 발견된 하프 모양의 악기에서도 청금석을 발견하 수 있다. 하프와 같이 생긴 악기의 머리에 하얀 뿔과 황금 얼굴을 가지고 있는 황소의 수염과 눈 역시 청금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당시 제사를 지내거나 연회를 할 때 사용한 악기에는 풍요를 상징하는 황금 황소의 머리아래로 메소포타미아의 전설적인 왕이자 우르크의 5대 왕이었던 길가메시가 소 두 마리를 휘어잡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전시실 중앙에 배치된 우르의 스탠더드에서 당시에 사용한 악기를 발견할 수 있다.
악기나 군기의 보관함으로 사용된 이 유물의 앞면은 당시 전쟁이 끝나고 왕이 연회를 베푸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그 끝에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의 모습이 보인다. 그 아래로 전리품인 곡식과 짐승을 나르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인다.
우르의 스탠더드 뒷면은 전쟁 장면으로 가장 아래단에는 네 마리의 조랑말이 전차를 이끌며 적을 무찌르고 있다.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갈수록 말의 움직임이 커지면 속도감을 보여준다. 말들은 처음에는 걷다가 점차 뛰기 시작하며 마지막에는 하늘로 날아갈 듯이 앞발을 높이 들고 있다. 말 아래 몸통이 잘린 채로 죽어가는 처참한 군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56번 전시실을 나와 55번 전시실로 이동하여 고대 아시리아의 점토 도서관이 나온다.
당시 종이가 없어 점토판으로 책을 만들었던 시절에 만들어진 점토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들이 적혀 있다.
삶의 기쁨 그 이름은 맥주 삶의 슬픔 그 이름은 원정
결혼은 기쁜 것 그러나 이혼은 더 기쁜 것
칠칠치 못한 아내는 악마보다 두렵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 그러니 쓰자.
하지만 금방 죽지도 않는다. 저축도 해야 한다.
고대 아시리아의 도서관에서 가장 유명한 점토판은 전시실 중앙에 위치한 <길가메시 서사시>이다.
우르의 5대 왕이었던 길가메시의 모험을 기록한 12개의 점토 판 중 가장 길고 가장 보존이 잘 된 11번째 점토판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11번째 점토판에는 신들은 자신을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을 멸망시키려 대홍수를 일으키지만 이를 반대하는 지혜의 여신의 도움으로 우트나피시팀만이 방주를 만들어 살아남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길가메시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대홍수 속에 살아남은 우트나피팀을 찾아 길을 떠났다.
그를 찾아 떠나는 여정 역시 만만치 않았다.
사자 무리의 공격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고 쌍둥이 전갈의 독에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했다.
지구 끝에 다다른 그는 죽음의 바다를 건너 그가 찾던 우트나피스팀을 만났다.
우트나피시팀은 처음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부인하다가 그가 끈질기게 달라붙자 깊은 바닷속에 불로초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길가메시는 발에 돌을 묶은 후 바닷속으로 뛰어들어가 불로초를 구했다.
불로초를 얻은 그는 영원히 혼자 사는 것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과 젊음을 나눌 수 있는 가족과 친구가 있는 고향으로 불로초를 가지고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돌아가는 길은 너무나 행복했으며 모든 길이 꽃길이었다.
한참을 가다가 맑은 샘물을 만났다. 샘물을 보자 그동안의 피로가 쏟아졌다. 그래서 잠시 쉬면서 목욕을 했다. 샘물은 지난 여행의 묵은 때와 고단함을 씻어 주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몸을 씻고 있었다.
그때 샘물 아래에 숨어 있던 뱀이 나타나 불로초를 먹어 버렸다. 뱀은 불로초를 먹자마자 허물을 벗고 사라졌다.
목욕을 마친 길가메시는 불로초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앞이 캄캄했다. 불로초를 한 순간에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몇 날 며칠을 절망감에 빠져 있던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어도 된다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행복의 여신이 다가와 그에게 이야기한다.
길가메시야
매일 잔치를 열어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어라.
춤추며 기뻐하라.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 몸을 청결히 씻으며
너의 자식을 귀히 여기고 아내를 따스하게 안아주어라.
이것 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행복하다.
잠이 깬 그에게 여행 중에 만났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범하지만 매일매일 하루를 집중하며 보내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