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욕망

로마

by 손봉기

그는 도도히 흐르는 강을 앞에 두고 말했다.


이 강을 건너면 동지였던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 지옥 같은 세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나아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강을 건너면서 지난 시절이 한순간에 그의 머리를 스쳐갔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기품 있는 어머니의 손에 의해 자란 그는 아름다운 청년시절을 보냈다.


주위의 모든 여인들과 친구들이 그를 따랐으며 그로 인해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늘 빚을 지고 살았다.


그가 25살이 될 때까지 민중파의 대부인 마리우스를 고모부로 둔 덕분에 귀족파의 집정관인 술라의 견제를 받았다. 이후 마리우스가 사망하자 그는 술라를 피해 그리스로 도망가야 했다.


그리스로 가는 배가 납치되고 해적이 그에게 몸값으로 50 달란트를 요구하자 그는 자신의 몸값이 적다며 두배를 주겠다고 약속하고 해적들 틈에서 큰소리치며 생활을 했다.


그의 몸값이 도착하자 자유의 몸이 된 그는 군사들을 이끌고 돌아와서 해적들을 몰살시켰다.


술라가 세상을 떠나자 로마로 돌아온 그는 승승장구하며 스페인 총독과 갈리아 총독으로 임명받아 위대한 성과를 내며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게 된다.


그의 성공과 위상을 두려워한 원로원과 당시 집정관인 폼페이우스는 그에게 무장을 해제하고 로마로 돌아올 것을 명령한다.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눈치챈 카이사르는 로마로 진격하여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을 제압하고 스스로 종신 독재관에 올랐다.


당시 로마 공화정이 부패하고 무능하여 더 이상 제국이 된 로마를 통치하지 못한다고 카이사르는 확신했다.


하지만 그의 치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로마제국의 마지막 공략적인 파르티아(지금의 중동)로 원정을 떠나기로 한 전날 원로원에서 자신의 부하로 있었던 동지들이자 부하들에게 27번의 칼을 맞고 살해당한다.


죽음보다 배신이 더 아파했던 그는 토가를 머리에 뒤집어쓴 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브루투스 너마저



카이사르의 화장터에서 원로원의 의원들은 로마 시민들에게 다음과 이야기했다.


우리가 카이사를 죽인 것은 그를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를 그대로 두면 모든 로마인은 노예가 될 것이다. 우리는 로마인의 자유를 위하여 카이사르를 쓰러뜨렸다.


하지만 자신의 재산으로 모든 로마 시민들에게 1년 치 연봉을 지급하라는 카이사르의 유언이 공개되자 로마 시민들은 카이사르를 죽인 의원들을 찾아내어 살해하였다.


카이사르의 화장터가 있는 포로로마노를 방문하려면 로마의 콜로세오 지하철 역에서 내려야 한다.



포로로마노로 입장하면 카이사르 화장터 옆으로 로마 군인들의 화려한 개선식이 진행되었던 신성한 길이 나오고 그 끝에 <로스트라>라는 높은 연설단이 있다.


이곳에서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재산을 로마 시민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카이사르의 유서를 공개하며 추모연설을 하였다.


연설 단 뒤로 기원전 80년에 술라가 지은 국립 도서관인 <타불라리움>이 있고 도서관 앞에 보이는 개선문을 지나면 삼각 지붕을 한 원로원이 있다.


원로원은 오늘날 국회로 건물 가운데 있는 의장석에는 로마 최고의 관직인 집정관이 앉았고 좌우에 원로원 석이 있다. 앞쪽에는 연장자가, 뒤쪽에는 신참이 앉았던 원로원의 구성은 처음에는 150명이었으나 점차 그 수가 늘어 최대 규모일 때는 600명에 이르렀다.


원로원 옆으로 기둥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 기원전 179년 마케도니아를 제압한 집정관 에밀리아가 세운 <바실리카 에밀리아>로 많은 정치인과 사업가가 교류하는 시장으로 사용되었다.


<바실리카 에밀리아> 맞은편에 카이사르가 지은 <바실리카 율리아>가 있다. 법원으로 사용한 이곳에서 민사소송을 담당하던 180명의 변호사들이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해 자신에게 갈채를 보내거나 상대편에게 야유를 퍼붓는 일을 시켰다.


원로원 뒤쪽은 원래 노예들과 천민들이 사는 수부라 지역이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에서 벌어 들인 자신의 돈으로 이곳에 로마 시민들을 위한 공회장을 지어 시민들에게 제공했다.






이후 황제들은 카이사르 공회장 옆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붙인 공회장을 지으며 시민들의 마음을 얻고자 노력했다.


황제들의 공회장을 지나면 로마제국을 상징하는 콜로세움이 나온다.



서기 72년 네로가 자살하자 베아파시아누스가 최초 평민출신 황제로 선출된다.


베아파시아누스 황제는 네로의 폭정에 지친 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콜로세움을 짓기로 하고 그 터로 네로 황제의 황금궁전을 선택했다.


황금궁전은 64년 로마 대화재로 로마의 3분의 2가 불타자 네로가 시민들의 집터에 지은 것으로, 베아파시아누스 는 이곳에 경기장을 지어 다시 시민들의 품으로 돌려주었다.


처음 경기장이 만들어졌을 때, 황금궁전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거대한 황금 동상인 콜로수스를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는데 이 때문에 경기장을 콜로세움이라 불렀다.


베아파시아누스 황제는 콜로세움이 기존의 반원형 경기장과는 차별화된 원통형의 거대한 경기장을 짓기로 결심하고 새로운 기술을 도입했다.



먼저 양 옆으로 벽돌을 쌓고 벽돌 사이에 모래와 흙 그리고 시멘트 역할을 하는 사암을 썩은 콘크리트를 집어넣어 가늘면서 튼튼한 벽기둥을 만들었다.


그리고 벽기둥을 높고 하중을 잘 견디는 아치로 연결하여 2000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거대하면서 튼튼한 경기장을 만들었다.


콜로세움 개막식 날, 72개의 아치 문으로 5만 명의 인원이 15분 만에 입장하였다.


개막행사 중 맹수 사냥에서는 로마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코끼리와 중동의 사자 그리고 게르만족의 곰과 호랑이 등 5천 마리가 넘는 진귀한 맹수들이 희생되었다. 이는 로마제국의 번영과 힘을 보여주며 로마 시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로마제국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콜로세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기는 검투사의 경기였다.


검투사는 주로 노예들이 맡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전문적인 검투사들이 양성되었다. 검투사들은 오늘날 아이돌만큼 인기를 누렸는데 그들이 흘린 땀으로 향수를 만들어 팔 정도였다. 경기 후 검투사들은 수익금 일부를 나눠 가졌는데 초보자의 경우도 관리가 받는 돈의 3배를 받았다.


역대 황제들이 이렇게 콜로세움에 신경을 쓴 것은 로마 시민들과 황제가 직접 소통하는 정치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경기 후 진 검투사를 죽이고 살리는 것은 시민들의 검지에 따른 의견으로 황제는 그 결정에 따르면서 시민들과 하나가 되었다.


이후 맹수로 기독교인들을 죽이는 등 경기가 점점 더 잔인해지자 콜로세움은 쇠락하기 시작하였으며 지진과 성당을 세우기 위해 재료를 가져 다 쓰는 바람에 외벽의 절반이 없어지는 수난을 겪었다.


당시 콜로세움은 기독교인들이 순교한 성지였기에 기독교 성전을 새로 짓는 데에 성지의 돌을 사용한 것은 종교적 의미가 있었다.


1790년 교황 베네딕트 14세는 콜로세움에 순교지로서의 역사적 가치를 부여하여 이곳에 십자가를 세우며 콜로세움을 봉헌하였다.


베이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래의 유언처럼 콜로세움은 뼈대만 남았지만 2천 년 세월 동안 고대 로마의 기상을 웅변하며 지금도 우뚝 서있다.



황제는 누워서 죽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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