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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여행

그림자 섬

절영도

by 손봉기

절영도는 그림자를 끊을 만큼 빠른 말이 사는 섬이라는 뜻을 가진 영도의 옛 이름이다. 영도는 조선시대부터 육지와 단절된 천혜의 환경과 전염병으로부터 안전하여 말을 키우는 목장으로 유명했다.


오랜만에 영도를 한 바퀴 산책한다. 어릴 적 다녔던 남항초등학교의 커다란 운동장에는 커다란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학교를 다닐 당시 운동장 위로 <꿈의 동산>이라는 언덕 정원이 있었다.


꿈의 동산을 짓는다고 선생님과 함께 열심히 돌을 날랐던 추억은 운동장에 들어선 건물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어린 우리를 군인취급해서 소풍을 다녀오면 열을 맞추어 운동장을 돌여 노래를 부르게 했던 4학년 선생님과 동경 어린 눈 빛을 보냈지만 관심 없이 나를 떠돌게 했던 5학년 선생님이 떠오른다.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할 관심과 사랑을 주셨던 6학년 선생님이 떠 오른다. 수업을 마친 후 그림도 그리고 글짓기도 하며 매일 방과 후 수업을 했다. 그분이 주신 사랑이 있어서 힘든 어린 시절을 버텨낼 수 있었다.


초등학교 앞에는 여전히 삼성문방구가 자리 잡고 있으나 단팥죽과 어묵을 파는 가게는 사라지고 없다.


초등학교 옆으로 해동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나란히 붙어 있었는데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불교재단이었던 해동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온 나는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 종교시간에 암송했던 반야심경을 외우고 있다.


학교를 나와 어린 시절 등교했던 길을 걸으니 불이 꺼진 이발소가 나온다.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의 부모님이 운영했던 이발소는 친구집과 붙어 있었는데 일요일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곳에서 밥을 먹고 놀았으며 시험이 다가오면 공부를 했다.


부모님이 나이가 들자 친구는 자신이 사는 곳 근처로 모시고 가서 지금은 빨간색과 파란색이 돌아가는 이발소의 등만이 외로이 남아 있다.


대학 무렵 정신병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친구의 집을 지나 당시 간첩이 들어 한바탕 난리가 났었던 2층 양옥집의 또 다른 친구집은 고물상으로 변하여 그 커다란 집 정원에 온갖 고물들이 넘쳐나고 있다.


아버지가 원양어선의 선장으로 유복하게 살았던 그 친구는 원양어선이 난파되자 배와 함께 자신을 태평양에 던진 아버지의 장례식을 우리와 함께 치러야 했다.



친구집을 지나 골목길을 지나자 어릴 적 살았던 집이 나온다. 겨울이면 따뜻한 연탄아궁이에서 고기를 구워 우리들의 입에 넣어주었던 어머니의 모습과 여름이면 서늘한 평상에 누워 빨래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잠들었던 아이에게 스며든 어머니의 냄새가 아직까지 생생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가난하여 두 분 다 일을 해야 해서 길 건너 외삼촌집에서 1년을 보내야 했다. 계단 밑 지하에 무허가로 지어진 외삼촌 집의 다락방에서 상고를 다니던 사촌형과 함께 잠들며 당시 유명한 아바의 노래 <아이 해브 드림>과 <치키티타>를 매일 반복해서 들었다.


또한 아침이면 금방 요리한 어묵볶음을 금방 한 밥에 먹고 등교를 하였는데 그 달콤하면서 짭자름한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외삼촌집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가면 영도의 바다가 열린다. 여름 방학이면 매일 이곳에서 수영도 하고 곤피도 잡으며 하루 종일 보내다가 배가 고파 집으로 오면 물에다 만 밥을 간장 깻잎무침과 함께 먹고 마루에서 잠들었다.



흰여울 마을 입구에 있었던 외삼촌집은 카페로 바뀌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 태종대로 향한다.


태종대를 가는 길 곳곳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영도를 방문한 많은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그래도 어린 시절 나에게 위로와 꿈을 주었던 푸른 하늘과 싱그러운 바다 그리고 반짝이는 햇빛은 여전히 세상을 축복하고 있다.



그렇게 한참을 걸으니 태종대가 나온다.


영도에서 가장 이름난 관광지인 태종대는 경치가 수려하여 신라시대의 태종 무열왕이 이곳에 들러 활쏘기를 하고 연회를 베풀었다고 해서 태종대라고 불린다.


태종대 등대 옆에 있는 신선바위는 대대로 역대의 왕들이 기우제를 지낸 곳으로 유명하다.


태종대를 나와서 어린 시절 수영을 하며 놀았던 남고 앞으로 오자 갑자기 친구들이 보고 싶어 몇 남지 않는 친구에게전화를 하며 바다 위로 불쑥 솟아 있는 봉래산을 바라본다.

영도 어느 곳에서나 보이는 봉래산은 신선이 살고 봉황이 날아드는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 강점기 <고갈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1990년대 이후 공식적으로 <봉래산>이라고 불린다.


봉래산의 산신은 <영도할머니>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영도할머니는 영도 사람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할만한 영험한 산신으로 여겨지며 육지로 나가면 3년 안에 망해 다시 돌아오게 한다는 심술궂은 이야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영도사람들은 할머니의 눈을 피해 밤에 이사하며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할머니의 심술은 고향을 떠나 육지로 나가는 섬사람들의 고난을 염려했던 서툰 애정의 표현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영도 사람이었으며 영도할머니의 염려 덕분에 영도를 떠나도 잘 살고 있는 친구들이 도착하자 해녀마을을 뒤덮고 있었던 낮의 강렬힌 빛이 점차 옅어지며 노을로 물들어 간다. 술잔을 기울이는 우리의 얼굴도 붉게 물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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