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족관에서

Shohei Imamura의 『우나기』-Thierry Jousse

by tout va bien


다쿠로 야마시타의 이발소 안에 하나의 수족관이 자리잡고 있다. 그 안에는 한 마리의 뱀장어가 살고 있는데, 주술적이며 신비한 동물이자 인간에게 길들여진 수호천사인 이 뱀장어가 바로 imamura 최신작의 제목이다. 감옥의 혼란스러운 기원을 가진 이 뱀장어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자신의 아내와 그녀의 정부를 살해한 광기의 밤 이후로 작은 물고기조차도 마구 대하지 못하는 가난한 낚시꾼인 다쿠로의 확정 지을 수 없는 어떤 종류의 닮은꼴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알고있는 것이 별로 없다. 물론 우리는 그 구불구불한 동물의 상징적인 매력에 대해서 현기증 날 때까지 설명할 수 있다.무의식이라든가, 더 진전시켜 의식, 닫혀있음 등은 물론 명백하지만 sexualite가 더욱 확실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마지막 영화들 (나라야마의 연가, 검은 비)에서 보여진 맹목적인 엄숙함이나 초기영화들(살인자의 욕망)의 성화 파괴적인 대담함과는 거리가 먼 Imamura의 예술은 너무 명백하게 읽혀지는 감각이나 너무 심오한 해석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외면적으로 완벽하게 평평한 표면의 생산으로 구축된다. 우나기 안에는 표면의 효과들만이 있으며 그리고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요한 강물 안에서 처럼 심도가 배회하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진실의 장소이거나 궁극 성이나 감각의 장소는 아니다. 그것은 이 우화의 마지막까지 헤아릴 수 없으며 혼란스런 상태로 남는다. 어떠한 행위나 어떠한 움직임 어떠한 결정도 해석의 악마에 의해서 고갈 될 수가 없다. 표면의 단조로움이 지배하고 있으며 그 또한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 다시 수족관으로 되돌아오자. 우리는 빈번히 그 스스로에 대하여 닫혀있고 때때로 현란한 굴절의 효과들을 상기시키는 유리블록을 화면의 환유로써 同一化 시킨다.


단순화시켜, 수족관은 무대인 동시에 닫혀진 환경의 칸막이 사이에서 서로 부딪치며 싸우는 인물들을 관찰 할 수 있는 유리이다.
수족관은 어떤 의미에서 시선과 그의 대상사이의 거리의 형상화이다. 수족관을 소재로 한 영화들, 다양한 소재를 가지는 프랑스 영화는Duvivier에서 Chabrol까지 매우 좋은 거리를 생산했다. Imamura에게서, 그것은 정 반대이다. 수족관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장소가 아니라 수족관 안의 그들이 바라보는 장소이다. 그 결과로 연출의 초점은 뱀장어 그 자체에 맞추어 졌다. 그 뱀장어는 그의 눈 아래에서 뛰놀고 있는 인간(인간성)에 대해 어쨌든 부여 할 수 없는 중성적인 시선을 던진다. 이 독특한 초점으로 Imamura의 영화는 그의 섬세한 역량의 큰 부분을 추출했다. 이 시선은 그러나 우리 눈에 제공되는 전혀 어떠한 판단도 가지고 있지 않은, 현실에 대해 신랄하고 날카로우며 예리하고 생생하다. 때때로 지나치리 만치 과도하게 난폭한 이 인간적인 코미디는 빈정거림이거나 혹은 불안한 그는 모든 결정력과 선택의 권한을 잃어 버렸다. 단지 그는 그를 행위 하도록 부추기는 몇몇 확고한 관념에 의해서 관통될 뿐이다. 젊은 Keiko와의 만남이 가장 극적인 순간인 일련의 강요된 상황 속에서 그는 결국 감동적이자 우스꽝스러운 잊지 못할 싸움이 벌어질 때 인간 공동체로 재통합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도박(내가 그 내기의 내용을 자르는 것에 반대하는)으로 인도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나기는 너무 단순하고 포괄적으로 잘 짜여진 애도의 이야기가 전혀 아니며 윤리적인모험에서의 비이성적인 탈주로 표현된 이 매력적인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떠한 화해적인 교훈도 이끌어내지 못 할 것이다.
미묘하면서도 단호한 유물론자인 Imamura는 끊임없이 초월적인 함정들을 그의 인물들에게 설치한다. 그러나 이 덫들은 과거 감옥동료가 상기시키는 KAMASOUTRA나 또 다른 수도의 풍습들처럼 종교적이거나 외계인과의 만남을 목적으로 공터에 설치된 엉뚱한 기계처럼 오히려 더 순수하게 세속적이다. 그들은 우리들이 신에게서 기다릴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있다는 불안하지만 해학적인 거리를 두고 바보나 무능력자들을 바라보도록 의도된 아주 기괴한 술책으로만 기능 할뿐이다. 우나기에서 아름다운 것은Takuro의 구불구불한 역정에 가득한 시적이며 역설적인 긴장이며 마지막 순간에 그 자신의 결정들의 결과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그의 능력에 관하여 마치 Bunuel의 영화에서 처 럼 유지되는 의심이다. 그는 결정적으로 그의 악마들을 제거시켰는가? 그는 다시 한 남자로 돌아왔는가?


결정은 그가 지닌 광기의 최후의 위장술이 아닐까? 그 무엇도 확실하게 그것을 말 할 수 없으며 진정하게 윤리적인 선택에서 명확하게 내기를 거는 것은 바로 의심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다른 어느 것도 선택만큼 확실하지 않으며 그것의 내용은 더욱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거짓으로 꾸며놓은 단선적인 구조(ce trace lineaire) 덕택에 우나기는 주제에 있어서 영화의 엄격함을 하나도 가지지 않는다고 상상 할 수 있다. 매력을 가지는 것은 영화이전에 있다고 까지 말할 수 있다. 즐겁게 하거나 불쾌하게 하려는 모든 의도에서 벗어난 그리고 형식적인 드러내기에 철저히 무관심한 이 뒤늦은 작품의 독특함이다. 단지 원근화법과 선, 움직임, 심리적이지 않은 연기방향(direction). Imamura에게서는 대가의 절대권 과시도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결코 구도(dessin), 필치(trait), 색깔, 프레임(cadre)과 거기에서 생산되는 것을 계산하는 유일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우나기에서 눈에 보이는 형식적인 광채의 부족과 저속함 앞에서 얼굴을 찌푸리지 않는 그의 스스럼없이 길들여진 성격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다.


그러나 명확하게 말하면 그것이 바로 이 작은 집들의, 이 작은 강의, 현명하리 만치 머리가 돈 인물들의 초시간적인 매력을 만드는 것이다. 그 자신의 법칙으로 세운 세계에서의 정착, 약간은 추상적인 마을, 인간 열정의 격정적이지만 정제된 작은 연극. 이 작은 공동체의 삽화적인(antianecdotique) 묘사 안에서 우나기를 가장 가벼운 Ford영화의 몇몇 작품들, 우연하게 Le soleil pour tout le monde혹은 La Tavern de l'Irlandais 의 일본판으로 만드는, 적게는 생명력의 증가, 많게는 낯설음의 어떤 것이 존재한다. 음악적인 이미지에서 우나기는 동요의 순간에서 조 차 항상 우스꽝스럽고 자주 익살스러우며 약간 귀에 거슬리는 스트라빈스키의 소 악장 같이 장면의 묶음들에 의해서 구성된다. 희극은 여기서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 약간의 공들인 의지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장면들 자체의 고유한 특질에서, 전적으로 예측 할 수 없는 그들의 성격에서 그리고 결코 설명적으로 Humour에 귀속되지 않는 형언 할 수 없는 음조에서 이루어진다. 꿈들 혹은 Flashes-back들--예를 들면 카르멘으로 춤을 추는 keiko 어머니의 집시 춤, 혹은 takuro가 수족관 안에서 그 자신을 보는 악몽--은 아주 독특하게 웃음을 자아내거나 적어도 미소를 자아내는 비이성적인 돌출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우리는 순수하게 기괴한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른다. 그들은 우나기에서 예외를 만들지 않는다. 그들은 변화하는 순간의 덧없음과 기괴한 충동으로 인도된 이 영화의 진실자체이자 기층이다. 결론적으로 Imamura의 최근작을 이상야릇하고 음모적이며 동시에 결국은 매우 흥미를 끌도록 만드는 것은 인물들이 움직이는 극단의 억눌림과 그들이 각각의 플랑 내부에서 획득하는 자유사이의 이러한 모순이다. 다른 용어로는 질서와 무질서의 충돌, 이성과 이성의 결여사이의 치받기, 통제와 완전한 방임과의 결혼이라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Shohei Imamura예술의 확고한 독창성을 만드는 것이다.

L'ANGUILLE(UNAGI, Japon, 1997). Realisation: Shohei Imamura. Scenario:
Motofumi Tomikawa, Daisuke Tengan, Shohei Imamura, adapte d'une histoire
de Akira Yoshimura.

Interpretation: Koji Yakusho, Misa Shimizu ...


수족관에서

Shohei Imamura의 『우나기』

-Thierry Jousse-

까이에 뒤 씨네마 51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