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연금술사

【카이에 뒤 씨네마 519호】Wong Kar-wai, l'alchimis

by tout va bien

par Emmanuel Burdeau

왕가위의 예술 안에는 위상을 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첫 번째 특징을 구성한다. 위상을 정할 수 없는 것은 영화적인 생산의 여백에 관련한 것이 아니라(어쨌든 왕가위는 오늘날 모든 면에서 독특한 자리를 점하고 있다), 그 자신의 영화 그 내부에 관계한다. 이 위상을 정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우리가 순간-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이 영화로 변형되는 조작들의 전체가 일어나는 순간. 왕가위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에게서 허풍선이, 클립제작자, 시각적이고 모조의 탐미주의자를 보지만 우리는 여기에 반대한다: Ashes of times, Happy together, Fallen angels을 보면 그것은 순간으로써 창조의 비밀 앞에 서게되는 것이다. 이 영화들은 내재적인 형식에서의 이 수수께끼의 바로 그 사실에서 사람들이 때때로 그것을 축소하기를 원하는 모든 노력에서 왕가위를 단번에 구출하는 극단의 풍부함으로 영화적인 재료들을 전개시킨다. 정말로 새로운 것은 현실(예를들면 홍콩의 그것)이 이제부터는 영화적인 바로 그것이 된다는 것이 아니며 또한 모든 현실적인 참조의 밖에 있는 생생한 재료도 아닐뿐더러 더욱이 우리는 그것을 어느 영화적인 참조에도 어떤 창작수단의 정확한 단계에도 연관시킬 수 없다. 확고한 현실의 부분, 즉 촬영의, 영화화의 그것, 조명과 편집의 부분은 분간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새로운 것이다. 창조적인 행위의 절대적인 불투명함을 강제하면서 이것을 단번에 산출하면서 그리고 안정적으로 분리된 단계들의 연속으로써가 아닌 바로 이 영화는(즉 John woo, Tsui Hark-그들이 아직 홍콩에 있을 시기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다른 무엇도 아닌 관객이 되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처럼 <작가를 찾아서>라는 영원한 문제에서 자유롭게 된다. 유럽사조에서 작가의 초현존과 미국사조의 실속없는 표명(오늘날 시스템 그 자체에 의해 제조되었다는 거짓의 영화작가-밀수업자의 모습과 함께)에 반하여 80년대와 90년대의 몇몇 위대한 아시아 영화작가들은 제 3의 길을 발견했다. 과잉의 그것, 그에게 고유한 어떤 세계를 가로질러 그의 존재를 온전히 입증하면서 작가는 어떻든 마지막 순간에 이 유일한 세계에 불가분한 영화적인 재료의 과잉이라는 바로 그 사실에 존재한다. 또는 동일한 것을 그러나 다르게 말하기 위하여: 영화와 작가는 언제나 서로서로 상존 한다. 반대로 작가정책과 함께 언제나 약간 슬펐던 것, 그것은 그들 스스로가 계획했던 담론에 의해서 고갈되도록 선고되었던 한 작가와 한 영화의 의식이다. John Woo, Tsui Hark, Wong Kar-wai에게서 나는 촬영현장도, 배우들의 연기지도도 편집도 상상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영화의 초인간적이거나 조물주적인, 또는 웅대한 어떤 성격보다도 더 큰 어떤 것에 반향하는 동일한 초과에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들의 영화 안에는 어떤 것이 반항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관객만이 되도록 강요하고 작가주의 담론(한 작품=한 인간)을 실망시키는 격렬하고 거대한 하나의 차원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오늘날에는 이미지의 두 가지 세계가 있지 않을까. 한편에서는 영화적인 재료들이 부족하게되는 불안감속에서 사는 우리의 세계이며, 거기서 그것은 문제적인 현실의 존재 바로 그 자체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몇몇 영화들이 매우 아름답게 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지만 각각의 플랑들은 특별히 획득된 분위기와 보도록 구원된 한 플랑 이상의 분위기와 현실과 재결합된 계약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다른 쪽, 직접적으로 아시아적인 세계(어떻든 홍콩의 세계)에서 그것은 정반대가 된다. 왕가위의 영화에서 한 플랑의 도착은 유리하게 그의 자리를 획득할 수 있었던 다른 열 개의 번쩍거림을 언제나 동반한다. Fallen angel에서 청부살인자의 상대역인 그녀가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 그녀는 그것을 한번 혹은 백번 하는 것으로 보이거나 그것을 전혀 하지 않았거나 혹은 항상 해왔던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러한 생존의 행위들을 영화화하는 방법들의 한 삽화의 정수이다. 살아남은 필수적인 장면의 이데올로기, 그것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은 어깨위에 얹은 카메라로 촬여하는 모든 작업의 종종 게으른 요행수가 아니다. 그것은 실제 시간에서 왕가위의 영화만이 유일하게 진정으로 유효한 가능성들의 번쩍거림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영화적인 요소(우리는 현실에 대해 말하거나 현실에서 말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마도 우리는 단순하게 현실에 대해서 확신을 갖기를 멈추었기 때문이 아닐지)와 영화를 만드는 방법들(우리는 또한 더욱이 더 이상 미장센에 대해서 말하도록 강요받지 않는다)의 관대함을 즐기며 이 관대함이 모든 영화들을 젊어짐으로 그와 함께 인도하는 감정을 주기 때문에 깜짝 놀라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 영화는 실지로 젊고 기적처럼 새로움 그 자체이고 여타의 다른 것으로써 그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재연하거나 항상 제로에서 다시 출발하기에 용이한 영화이다. 누가 그런 것은 Tsui Hark의 단 하나의 영화(예를 들면 The lovers)만이 그것의 증거라고 보았는가.:영화는 그의 죽은 시간과 다시 태어나는 시간, 소비에서 에너지로 그리고 영원같은 감정으로 권능을 관통하며 우리는 그가 수천의 삶과 수천의 죽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것이며 각각의 장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