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편집자 서문 / 루이즈 미셀 연보
어떤 이름들은 그 울림과 명성이 워낙 자자해서 대중에게 저자를 소개할 필요도 없이 책 표지에 그 이름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 다. 그렇지만 나는 이 회고록에 짧은 머리말을 덧붙이는 것도 필요하 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1871년의 유형수이자, 클레르몽 교도소의 수감자이며, 마 침내 생-라자르에서 풀려난 죄수 루이즈 미셸을 알고 있거나, 혹은 알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두 명의 루이즈 미셸, 전설 속의 그녀와 실 제의 그녀가 존재한다. 이 둘은 서로 닮은 구석이라곤 전혀 없다.
다수의 대중, 특히 지방 사람들에게 루이즈 미셸은 일종의 공포의 대상이자 무자비한 악녀, 식인귀, 그리고 인간의 탈을 쓴 괴물 같은 존재로, 가는 곳마다 폭력과 방화를 일삼으며 다이너마이트와 석유를 뿌리고 다니는 인물이다. 그들은 필요하다면 그녀가 어린아이들을 산 채 로 잡아먹는다고 몰아세울지도 모른다. 이것이 풍문 속의 그녀다.
실제 모습은 이와 얼마나 다른가. 그녀를 처음 만난 사람들은 뜻밖의 모습에 다들 깜짝 놀라고 만다. 친근한 태도와 부드러운 목소리 그리고 지성으로 반짝이는 눈동자에서는 선한 기운이 절로 뿜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녀와 15분만 대화를 나누고 나면 모든 편견은 사라진 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매료되고, 마음을 빼앗기며, 매혹되고, 정복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녀의 사상을 거부할 수도 있고, 그녀의 행위를 비 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를 움직이는 뜨겁고 진실한 신념만큼은, 비록 그것이 관례를 벗어난 것일지라도,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격렬한 아나키스트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적인 여인이다. 그녀가 거쳐 간 수많은 교도소의 소장들과 직원들은 모두 그녀의 친구가 되었으며, 생 라자르 교도소의 수녀들조차 이 무신론자이자 사나운 혁명가와 완벽할 정도로 화목하게 지냈다. 그것은 사실 그녀에게—루 이즈 미셸 양이 나를 용서하길 바라며!—자비로운 수녀와 같은 면모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희생과 헌신 그 자체다. 그녀는 스스로 의식하지도, 깨닫지도 못한 채 주변 사람들에게 수호천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자신의 필요와 번뇌는 잊은 채, 오직 타인의 슬픔과 결 핍만을 염려할 뿐이다.
그녀는 오로지 타인들—가족과 친구, 그리고 이름 모를 이들—을 위해 살고 또 일한다. 매일 수많은 방문객을 맞이했던 생-라자르 교도소 의 면회실은 자선 단체 사무실인 동시에 직업소개소가 되어버렸다. 수감 중인 그녀가 자신의 감옥 안에서 일자리가 없는 이들에게는 일자리를 찾아주고, 배고픈 이들에게는 빵을 주기 위해 온갖 지혜를 짜냈기 때문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편지를 쓰고, 자신의 보호 아래 있는 이들을 위해 변호하며 친구들을 주저 없이 성가시게 했지만, 누구도 이를 불평하지 않았다.
다음의 일화는 그녀의 선함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게 해줄 것이다. 3년 전, 그녀는 리옹과 론 지역의 도시들로 일련의 강연을 위해 떠났 다. 새 옷을 한 벌 차려입고 떠났던 그녀는 보름 뒤, 어머니가 기겁할 만한 몰골로 돌아왔다. 그녀는 단지 속치마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다. 검은 캐시미어 드레스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생테티엔에서 헐벗은 여 인을 만나고는 마침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자 자기 옷을 선뜻 벗어준 것이었다. 이는 성 마르티노의 전설을 재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성 마르티노의 주교는 자기 망토 절반만을 주었을 뿐이지만, 루 이즈 미셸은 드레스를 아예 벗어 내주었다.
내가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했던가. 이 또한 미셸 양의 감동적인 면모 중 하나다. 회고록을 읽다 보면 그녀의 효심이 얼마나 깊은 지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흠모였다. 마흔이 넘은 이 여인은 어머니의 권위 앞에서는 마치 열 살짜리 꼬마 소녀처럼 순종적이었다. 때로는 ‘앙팡 테리블’이었을지언정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위험천만한 모험 속에서도 소중한 어머니가 불안과 고통을 겪지 않게 해드리려고, 수많은 순진한 속임수와 사소한 거짓말들을 동원하곤 했다! 그저 ‘엄마’라는 소리만 들려도 마음이 뭉클해졌다. 자신이 이미 세상의 풍파 를 다겪은 어른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녀는 언제나 젊은 마음과 태도를 간직하고 있었고, 믿기지 않을 만큼 매혹적인 신선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다정하고, 부드러우 며, 애정 어린 그녀는 친구들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하고, 반대로 소녀 같은 장난기로 친구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이것이 ‘여성’으로서의 그 녀의 모습이다.
그녀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서는, 내가 이 책의 머리말에서 감히 평 가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책은 루이즈 미셸이 특유의 솔직함으로 자신의 삶과 생각, 사상과 행적, 고난과 신념을 가감 없이 담아낸 기록 이다. 글의 구성이 다소 두서없어 보일지라도 그녀에게는 전혀 어색하 지 않으며 꾸밈없는 날것 그대로의 언어는 그녀가 의도한 바대로 그녀의 글에 독보적인 개성을 불어넣어 준다. 나는 이 책을 저자의 적과 친구 모두를 위해 편집하며, 여기 담긴 내용에 비난도 찬사도 하지 않는다. 나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거나 혹은 회피하지 않을 것이다. 독자들이 각자의 경향과 취향, 사상, 혹은 적대감이나 동질감에 따라 스스로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독자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정파에 속하든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하 나 있다. 루이즈 미셸에 관해서라면 언론조차 늘 한목소리를 내는 지점이다. 프랑스인들은 설령 자신이 그 행적을 거부하는 인물일지라도, 그 가식 없는 솔직함과 당당함을 아끼고 존중한다. 삶의 일관성과 설령 잘못된 결과일지 언정 그 선의만큼은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루이즈 미셸 양에 대해서 사람들이 늘 정당하게 평가해 왔듯이, 그녀는 언제나 한결같았으며, 자신이 시도한 일의 결과 앞에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도망치는 부류가 아니다. 앵발리드 광장 시위 후, 그녀는 자신이 피신해 있던 친구 가족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스스로 자수하여 죄수가 되기를 고집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녀는 비겁하게 동료를 저버리는 자도, 제 한 몸 지키려 도망치는 자도 아니었 다. 또한 재판관들 앞에서 보여준 그 꾸밈없는 품위, 허세나 과장이 없는 단호한 기개는 어떠했는가! 옳든 그르든, 자신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 핑계나 변명, 혹은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1871년 베르사유 군법회의에서든, 1882년 블랑키 시위 이후의 경범죄 재판소에서든, 혹은 1883년 센 중죄 재판소에서 열린 마지막 재판에서든, 그녀는 언제나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모든 질문에 답했다. 자신을 정당화하기보다 동료들의 결백을 증명하려 애쓰며, 모든 연대 책임의 맨 앞에 서서 달려 나갔다. 이 회고록의 부록에는 《법정 신문》에서 발췌한 세 건의 판결 기록이 실려 있다. 이 신문은 피고인에게 호의 적이라는 의심은 전혀 받지 않을 매체이므로, 독자들은 이 기록을 통 해 유죄 판결을 받은 그녀가 참으로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확신 하게 될 것이다.
그녀에게 내려진 유배, 투옥, 교도소 수감 등 다양한 형벌을 감내하는 초연함, 그리고 그 쓰디쓴 기쁨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에게서나 그에 상응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19세기 전에 태어났다면 원형 경기장의 맹수들에게 던져졌을 것이고, 종교 재판 시대였다면 화형을 당했을 것이며, 종교 개혁 시기였다면 가톨릭 처형자들에게 고결하게 자신을 내주었을 것이다. 그녀는 마치 고통과 순교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인다.
불과 며칠 전, 공화국 대통령의 사면령이 그녀에게 통지되었을 때, 그녀를 생-라자르 교도소 밖으로 내보내려고 거의 물리력을 동원해야 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자신의 모든 동료에게 적용되지 않는 관용은 원치 않았다. 그녀의 석방은 사실상 추방이었으며, 그녀는 이에 대해 격렬히 항의했다.
루이즈 미셸은 도덕적인 성품뿐만 아니라 지적인 면에서도 그에 못 지않게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다. 그녀는 매우 학구적이고 뛰어난 음악가이며 그림 실력도 출중할 뿐더러 외국어 습득에도 남다른 재능을 지니고 있다. 식물학과 박물학에도 정통하여—이 책에서 누벨칼레 도니의 동식물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최근에 야 밝혀진 몇몇 과학적 사실들을 이미 직관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예컨대 그녀는 콜레라와 광견병에 새로운 백신 요법을 적용하는 데 있어, 파스퇴르 박사보다도 앞서 있었다. 이미 몇 년 전, 누메아(Nouméa) 의 유형수로서 그녀가 식물에도 백신을 접종하는 실험을 구상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책의 후반부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녀는 시인이다. 단어의 진정한 의미 그대 로 시인이며, 그녀의 회고록 여기저기에 흩어진 많은 시들은 몽상가적 이고 명상적이며 이상을 갈구하는 그녀의 천성을 드러내 준다. 그녀가 쓴 시의 대부분은 형식은 물론 내용과 사상 면에서도 흠잡을 데가 없다.
이제 말을 줄이려 한다. 루이즈 미셸 양의 꾸지람을 들을 위험을 무 릅쓰고, 우리 시대의 가장 비범한 인물 중 한 명을 있는 그대로 소개했 으니, 이제 나는 기꺼이 이 책을 대중에게 내놓으며 저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본다.
편집자.
1886년 2월, 파리에서.
루이즈 미셸 연보
1830년 5월 29일 오트-마른 지방 브롱쿠르 성에서 출생. 하녀였던 마리 안 미셸의 딸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성주의 아들 로랑 드마이로 추정. 아버지없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자유주의적 교육과 사랑을 받으며 성장. 빅토르 위고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
1851년 쇼몽에서 교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하고, 이후 센에마른 지방 라니로 이동.
1853년 오들롱쿠르에 자유 학교 개교. 제국에 대한 충성 서약 거부. 1855년 오트-마른 지방 미예르에 학교 개교.
활동가 시절
1856~1868년 파리에서 집필 활동과 사회운동을 하며 교사로 활동함. 주요 저서:『어둠 속의 빛, 바보도 미치광이도 없는 세상』,『유형 지의 책』, 『에르만의 책』(1861),『삶과 죽음을 관통하며』(1864)
1868~1869년 조르주 클레망소의 지원을 받아 최초의 민중 무료 급식소 설립.
1870년 정치 활동이 본격화. 제국 타도 투쟁에 참여하고, 여러 야당 신문에 기고하며, 쥘 발레스, 외젠 바를랭, 테오필 페레와 함께 공개 집회 개최.
1870년 8월 15일 블랑키주의자 외드와 브리도를 지지하는 시위 참여. 1870년 9월 스당 전투 패배로 프랑스군이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무너짐. 제3공화국 선포. 프로이센군이 파리를 포위함. 굴욕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파리 시민들이 항복을 거부함.
1870년 11월 18구 경계위원회 의장으로 선출. ‘위기의 조국 클럽’에 적극 참여.
1871년 2~3월 티에르가 행정부 수반으로 선출되고, 파리 시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몽마르트르 언덕의 대포를 회수하기로 결정.
1871년 3월 28일 민중 봉기가 파리 전역에서 승리하고, 파리코뮌이 시청에서 선포됨. 국민의회는 베르사유로 도피.
1871년 4월 3일 베르사유 정부군이 파리를 공격함. 루이즈 미셸은 국민방위군 복장을 하고 이시 요새, 클라마르, 뇌이 등지에서 전투에 참여. 부상자 구호 활동.
1871년 5월 22~28일 ‘피의 주간’. 베르사유 정부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3만 명이 넘는 코뮌 지지자들이 학살됨.
1871년 5월 24일 어머니가 포로로 잡히자, 루이즈 미셸은 어머니를 석방시키기 위해 베르사유군에 자수. 베르사유와 아라스에 수감.
감옥과 유배 생활
1871년 11월 28일 루이즈 미셸이 깊이 사랑했던 코뮌 지도자 테오필 페레 처형.
1871년 12월 16일 루이즈 미셸, 군사법정에 출두해 스스로 사형을 요구함. 누벨칼레도니 유배형을 선고받음.
1871년 12월 21일 오베리브 감옥으로 이송되어 20개월간 수감 생활을 함. 주요 저서: 『새해의 책, 짧은 이야기들』 『어린이를 위한 이 야기와 전설』(1872)
1873년 8월 28일 로슈포르 항에서 ‘비르지니’ 호를 타고 누벨칼레도니로 출발함. 4개월간의 항해 끝에 누벨칼레도니에 도착.
1873년 12월 10일 뒤코 반도의 눔보에 정착함. 루이즈 미셸은 현지 원주민인 카나크 족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들의 문화를 연구하며 교류했다. 1878년 그들의 봉기 때 이들을 지지함.
1879년 누메아에 학교를 개교함.
1880년 11월 파리 코뮌 가담자들에 대한 전면 사면령(7월)이 내려진 후, 유배자 전원 사면. 파리로 귀환.
사회 진보를 위한 투쟁
1880년 11월 21일 엘리제-몽마르트르에서 강연. 이후 수백 차례 강연 시작.
1881년 1월 4일 10만 명의 군중 앞에서 블랑키의 추도사를 낭독함. 1881년 7월 런던에서 열린 국제 무정부주의자 대회에 참석함. 주요 저서: 『마지막 파업』(1881) 『비참함』, 『청년 이본』, 『나딘』, 『프로메테우스』(1882) 『제국의 사생아』, 『민중의 딸』, 『농민들』 (1883),『어린이를 위한 이야기와 전설』(1884)
1882년 2월 24 일 마리 페레 사망.
1883년 3월 9일 에밀 푸제와 함께 앵발리드에서 실업자 시위(검은 깃발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시위)를 주도했다가 체포.
1883년 3월 체포된 후, 그해 6월에 6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
1885년 클레르몽 중앙교도소로 이송됨. 1월 3일어머니 사망. 5월22일 스승이자 오랜 친구였던 빅토르 위고 사망,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함.
1886년 1월 17일. 대통령 특별 사면으로 약 2년 10개월 만에 출소. 르 발루아-페레의 빅토르 위고 거리 89번지에 거주. 주요 저서: 『카나크족의 전설과 서사시』(1885),『인간 미생물』,『회고록』 (1886),『새로운 시대』,『마지막 사상』,『칼레도니아 회상』(1887)
1888년 1월 22일 르아브르에서 연설 중 피에르 뤼카에게 총격을 받아 부상당함. 그러나 가해자에 대한 고소를 거부함. 주요 저서:『순환체계에 따른 백과사전 강독』,『붉은 수탉』,『새로운 세계』,『시대의 범죄들』
1890년 4월 30일 생테티엔과 비엔에서 강연.
1890년 7월 29일 런던으로 망명(~1905) 샤를로트 보벨과 함께 학교를 개교. 주요 저서:『점령』,『가불레트의 딸들』
1895년 세바스티앵 포르와 무정부주의 신문 《리베르테르》를 창간. 1896년 7월 27일 런던 국제 사회주의자 대회 참석. 무정부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분열을 목격.
1897년 세바스티앵 포르, 샤를로트 보벨과 함께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강연 활동.
1898~1903년 장 비옹과 함께 프랑스 전역을 순회하며 강연하고, 이후 에르네스트 지로와 함께 알제리에서도 강연함. 인권 결사에 가입함. 주요 저서: 『코뮌: 역사와 회상』, 『꿈』, 『코뮌』(1898년)
1904년 5월 16일 폐렴으로 고통받으며 유언장을 작성함. 테오필 페레의 묘 근처, 르발루아-페레 묘지에서 어머니 곁에 묻히기를 요청. 주요 저서:『코뮌 이전』
1905년 1월 9일 마르세유의 오아시스 호텔(현재의 DUC 호텔)에서 별세. 1905년 1월 21일 르발루아-페레에서 장례식이 거행됨. 동원된 경찰만 1만 명이 넘었다는 공식기록이 존재한다. 운집한 군중은 최소 6만 명에서 26만 명의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