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속에 있지만 언제나 혼자인 그녀

제리 / 김혜나 장편소설

by tout va bien

술과 담배, 섹스의 강박이 집요하게 펼쳐지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한 여자를 떠올렸다. 사당동 산동네 꼭대기에 살았던 그녀. 가끔 그녀와 술을 마시고 클럽에 갔다. 산동네 지하 방에서 음악을 듣고, 밤거리를 새벽까지 쏘다녔다. 별 볼일 없는 나날로 휩쓸려가던 그 때. 남자 친구가 있지만 채팅으로 여러 남자를 만나 자유로를 질주하며 섹스를 한다. 그녀는 줄곧 자신의 오랄 실력을 자랑했다. 우리는 만난 지 2년이 지난 후에야 처음으로 뭔가를 시도했다. 딱히 섹스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없었던 만큼 섹스를 피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캔 맥주를 들고 모텔 방에 들어서 그녀의 실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와의 접속에는 실패했다. 그러니 정확하게 말하면 섹스를 했다고도 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섹스가 끝나면 우린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아니, 섹스 후에 그녀를 온전히 소유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녀와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만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거기까지. 그러면 그녀는 언제고 지금처럼 내 옆에 있을지도 모른다, 고.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가질 수 없지만, 아니 가지고 싶지는 않지만 잃고 싶지도 않다는 것.

비겁한.


희망의 부재, 고통의 확인

소설 <제리>의 여자는 자기 곁에 오랫동안 함께 있어 줄 누군가를 원했다. 그러나 그의 남자(들)는 늘 그녀를 남겨놓고 여관방을 떠난다. 매번 혼자 남겨져 홀로 거리로 나와 햇살을 받을 때면 자신의 몸이 타들어같고 마음은 더욱 황폐해진다. 할 수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 늘 실패를 거듭했고, 그 실패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들에 적의를 드러낼 뿐이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세계. 그 세계에서 자신이 눈을 감아버리는 것으로 그런 세계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녀는 스물 두 살짜리 인천의 2년제 야간 대학에 다니는 내세울 것 없는 여자 아이일 뿐. 희망이라고는 “지금의 나만 좀 아니었으며, 누군가 내 옆에 좀 있었으면......하는 바램”정도.


사람들 속에 있지만 언제나 혼자인 그녀는 어느 누구와도 진정으로 함께 있다고 느낀 적이 없다. 매일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취한 밤이면 호프집 매니저인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별다른 대화도 없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관방으로 향하는 습관적인 접촉. 짧은 연인관계 동안에도 영화관이나 놀이공원 같은 곳에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섹스만큼은 변함없다. 그녀에게 강은 가질 수 없는 존재, 아니, 가져서는 안 될 존재일 것이다. 그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볼품없는 호프집 메니저일테니. 그렇다고 잃어서도 안 되는 존재이다. 함께한다 해서 지금의 자신들을 벗어날 가능성은 없지만 적어도 현재를 견딜 수는 있다. 가질 수 없다는 이유로 그것을 파괴할 수 있는 의지나 열정조차 없는 사람들. 서로를 괴롭히는 것 외에는.

강은 커다란 성기로 능숙한 솜씨를 발휘한다. 강과의 섹스는 오직 고통만을 줄 뿐이다. 그녀는 이 고통을 통해서만 상대를, 그리고 자신을 느낄 수 있다. 섹스는 귀를 뚫거나, 가장 아픈 부위인 코에 피어싱을 하는 것과 같다. 그 고통을 거부하면 그가 떠날 것만 같아 그녀는 섹스의 통증에 대해서 침묵한다. “어차피 아프라고 하는 것이니까.” 항문 섹스를 요구하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빌기까지 한다. 강은 그녀가 자신과의 섹스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아니,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더욱 거칠게 몰아 부친다. 그녀에게 다시 사귀자고 말하지만 그녀는 지금의 관계와 다시 사귀게 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며 거부한다. 그들 사이에 사랑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짧은 섹스와 고통을 통해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만 있다. 그 순간은 적어도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 비록 고통뿐일지라도 그 고통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상처의 전이, 자기 몰두

친구들과 함께 간 노래바에서 호스트로 불려나온 두 살 아래의 연약한 소년 같은 제이에게 이유 없이 끌린다. 제이는 선수 세계를 벗어나고 싶다. 특출난 외모도, 가진 것도 없다. 잘나가는 에이스들 틈에서 ‘초이스’가 쉽지 않은 선수 아닌 선수생활을 이어간다. 그녀는 제리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연민일지도. 제리 역시 그녀처럼 한 번도 무언가를 가져본 적이 없고 가질 수 있다는 희망도, 자기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 삶 너머에도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삶이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것. 그녀는 제리가 갖고 싶다던 시계를 강에게서 훔쳐내 그에게 건넨다.

제리와의 섹스는 강과는 달리 부드럽고 섬세했다. 다리 사이로 전해지는 제리의 입김이 그녀의 배를 부풀리며 몸속으로 번져간다. 제리가 오랫동안 자기의 몸에 남아있기를, 아침이 오더라도,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고, 제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제리에게 그녀는 그저 손님으로 오는 여자들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술에서 깨어난 그녀는 제리의 입술과 맞닿는 느낌이 거슬린다. “야! 너 키스를 왜 이렇게 짜증나게 해?” 제리의 입술은 단지 자신의 아랫배를 부풀리는 것이면 족하다. 휴대폰에서 지워진 제리의 문자, 오랫동안 저장된 남자의 사진. 지난밤 제리의 이야기를 그녀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제리는 그녀 역시 다른 많은 여자들처럼 그저 하룻밤 서비스 상대였을 뿐이다.

여자는 연락 한 번 없는 제리에게 집착한다. 집착은 그에게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더 증폭된다. 무언가를 가져보지도, 가질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엔 더욱 더 갖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고 발버둥 치곤 한다. 그녀가 제리에게 집착하는 것 또한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 그와 함께 있을 때 무의식중에 보였을 자신의 태도를 다시 곰곰이 되짚어 본다.

그저 자기 옆에 누군가 있어주기 만을 바랬던 것이지만 자기도 모르게 제리에게 상처를 준 것만 같다. 그것이 자신만의 망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망설이지만 역시 제리가 자신을 피하는 이유가 그것이라면 그게 아니라고, 자신은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가져보려 하지 않았다고. 그럴 때마다 늘 혼자 남았기 때문에. 그러나 제리를 만날 수 없다. 강을 다시 찾아가보지만 강은 이제 완전히 그녀를 떠나보내려 한다.


이해의 시작과 오해

노래바에서 다시 손님과 호스트로 만난 그 둘은 따로 노래방에 들어 섹스를 나누지만 이번엔 그녀가 제리의 몸위에서 그를 위해 자극적인 섹스를 펼치는 사이 제리는 자신의 선수 생활과 미래 없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녀는 더욱 몸을 좁혀 들어간다. 제리는 고통스럽다고 말하며 가만히 옆에 있어 달라고 주문한다. 강이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녀 역시 제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모두 그렇다. 다들 상대방을 위한 배려라고, 사랑이라고 말하고 행동하지만 그것은 단지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자기만을 위해 누군가를 원할 뿐이다. 이해란 애초부터 불가했을까? 단지 서로에게 고통을 주고받는 관계. 상대를 배려하고 사랑하는 행위라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만을 위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 이 이기심 앞에 이해는 어렵고 역시나 고통스럽다. 이렇게 그녀는 강이 되고 제리는 그녀가 된다.


자기 확인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남자의 사라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혼자 남은 그녀는 좁은 수족관에 갇혀서도 끓임 없이 움직이는 작고 노란 물고기들을 바라본다. 탁한 물속으로 손을 뻗으며 비로소 자신이 있는 세계의 실체를 깨닫는다. 나 역시 무수한 타인 중에 하나이며 이 어쩔 수 없는 세계, 더 이상 뚫고 나갈 수 없는 세계에 있지만 그럼에도 저 유영하는 작은 물고기처럼 움직여야, 끓임 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 이제는 자신이 눈을 감는다고 해서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 자신으로서의 삶’을 꿈꿔야 한다는 것.

진부한 소재와 자학적이고 위악적인 감정과잉의 통속성은 상징도 묘사도 없는 직접적 진술들로 그 공허함에서 벗어난다. 이 소설의 어둡고 폐쇄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집착과 자극적인 행위들 사이에 몰카의 은밀한 관음증이 끼어들 수도 있다. 이는 ‘날 것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90년대 소설의 어떤 경향을 떠올린다. 주변부 인물이 그들의 언어로 말하고 그들의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하는 소설들이 지닌 한 때의 참신함에 가깝다. 그러나 이 소설은 작가와 인물 사이의 관계에서 이전 소설들과는 다른 지평을 선보인다. 거리를 좁혔지만 고백처럼도 보이지도, 관음증적 호기심을 유발하지 않는다. 그저 불편하고 답답할 뿐이다. 그 불편한 읽기의 끝에 자기 주변 세계의 실체를 명확하게 인식해가는 하나의 상징적 여정이 드러난다. 소재의 진부함과 통속성을 극복해낸 이 작가의 재능은 오랜 글쓰기 훈련보다는 오히려 후미진 골목 시궁창에 쏟아 놓은 토사 속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욕망과 불가능함 사이에서 흩어지는 이해, 타인을 향한 갈망에만 고통스러워 할뿐, 결국 자신에게만 몰두했던 이들은 타인을 배제하면서 정작 자신을 소외시킨다. 거기에서 자신이 발견하는 것은 황폐해진 내면 속으로 사라져버린 자신이다. 자신을 잃어버린 채 타인을 갈구하는 행위는 결국 타인에게 상처만을 남긴다. 이 상처의 자리바꿈을 통해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 삶을 받아들이고 평온을 구하려는 매우 교훈적인 우화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돌아온 탕자의 성장소설로만 읽힐 수도 없다. 이 소설이 전하는 볼품없는 인물들과 그들이 처한 상황은 비단 소설 속 부평역과 주안역의 젊은이들만이 아니라 전 세대에 걸쳐 하나의 보편적인 모습이 되어버렸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견뎌내는 젊은이들의 성장담이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곳엔 시작도 끝도 없는 거대한 블랙홀이 있을 뿐이다. 성장이 불가능한 세계, 더욱 더, 더 많은 이들이 질풍에 휩싸이고 노도에 떠밀리는 모두의 현재 이야기.


“저는 제가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제 머리로 생각하고 제 가슴으로 느낀 것을 쓰고 싶어요. 인터뷰하고 취재하는 방식은 내가 보고 내가 느끼고 내가 경험한 삶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와 닿지가 않아요. 와 닿지 않으면 제 언어로 쓸 수가 없거든요.”


십 수년 전의 사당동 그녀는 서른을 훌쩍 넘기고 중반에 들 때까지 소설을 쓰려고 했지만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강남의 유명 논술학원의 강사로 지냈다. 우리는 일 년에 한 두 번 정도 만나서 커피를 마시고 헤어졌다. 그날 밤의 이야기는 서로 꺼낸 적이 없다. 아마도 그날 제대로(?) 무언가를 했다면 좀 달라졌을까? 그녀는 곧 결혼을 한다고 알려왔다. 행복한 신부가 ‘될’ 것을 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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