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19화
[대문 사진] 노르망디 지방의 코탕탱 인근의 섬들
망슈 해협에 속한 작은 섬들 이름은 ‘앵글로 노르망디’어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섬을 지칭하는 명사 올므르(holmr ; 섬이란 뜻의 îlot)으로부터 명사 끝에 -hou가 위치하죠. ‘케투(Keteou ; Jethou)’란 단어는 1091년 문서에 등장하고, ‘리슈(Lishou)’, ‘에스크르우(Escrehou)’, 브라케오(Brakeho)란 말(오늘날 Lihou, Ecréhou, Brecqhou)은 12세기 문서에서 발견됩니다. 뷔루(Burhou)란 말은 13세기의 문서에 등장하며, 꼬끌리우(Coquelihou)란 단어는 그보다 더 늦은 시기에 등장합니다.
이런 점에서 세르크(Sercq) 섬은 예외입니다. 세르크 섬은 중세 말까지 주민들을 소개했고 이후 엘리자베스1세 치하에서 저지 섬과 함께 영국령으로 편입되면서 옛 지명들, 즉 코탕탱 북쪽에 위치한 섬들이 다름 아닌 옛날 옛적 스칸디나비아 인들이 몰려와 정주하던 곳이란 사실을 떠올리게 만들던 스칸디나비아 어로 된 옛 지명들 대부분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건지 섬은 바이킹들의 길인 라 하그 항구를 출발한 배가 브르타뉴 북서쪽을 향해 가던 해상에 위치한 섬입니다. 대서양 연안을 따라 길게 띠를 이룬 이곳은 바이킹들이 물자를 공급받던 거점이거나 기항지로 활용되던 곳이죠.
저지 섬은 건지 섬과는 달리 면적도 넓고 땅도 비옥합니다. 저지 섬은 바이킹들에게는 실용적인 관점에서 식민지로 삼을 만한 최고의 거점구실을 하던 섬이었습니다.
건지 섬보다 저지 섬에 스칸디나비아어로 된 지명이 훨씬 많은 이유가 바로 그와 같은 데서 연유합니다. 저지 섬에는 스칸디나비아어로 된 지명이 해안뿐만 아니라 섬 이곳저곳에 풍부하게 분포하고 있습니다. 코탕탱 북쪽의 지명과 여러모로 비교됩니다. 이는 바이킹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지역임을 떠올려줍니다.
이곳에서 바이킹들은 생 로랑 본당에 소속된 생토뱅 만 안쪽 내륙지역에서 농업활동에 종사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꾸앵 뚜흐지(Coin Tourgis)와 꾸앵 아탱(Coin Hatain)[1]의 ‘농산물의 이할세(二割稅, Vigntain)’라는 말에서 증명됩니다.
생 클레망 만(저지 섬의 남동쪽)의 또 다른 거류지는 농업활동보다는 확실히 해상활동을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항해를 하거나 어업활동에 종사하거나 아마도 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생산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명 이외에도 스칸디나비아 어로 된 인명 또한 훗날 씌어진 옛 고증자료들만큼이나 많은 숫자가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건지 섬의 카텔 교회는 옛 설화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옛 지명인 ‘후그(hougue)’(‘작은 언덕’이란 뜻)는 ‘그랑 조흐루아(Grand Geffroy)’의 섬사람들과 관련이 있으며, 조흐루아란 말은 아마도 프랑크 왕국의 연대기에 등장하는 덴마크 바이킹의 우두머리였던 구오흐리오르(Guðfriðr)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20세기 초까지 섬마을 사람들이 유창하게 사용하던 방언들은 코탕탱 지방의 사투리와 비슷하며, 많은 숫자의 스칸디나비아 어에 기원을 둔 방언이 공용어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지 섬과 세르크 섬에서 쓰는 방언과 건지 섬과 오리니 섬에서 쓰는 방언은 또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 섬들과 코탕탱 간의 관계가 아주 밀접했음을 암시해 줍니다.
사실 1204년 노르망디를 분리시킨 정치적인 사건[2]만 아니었어도 코탕탱과 섬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을 것입니다. 1567년까지 꾸탕스 주교의 성직자 관할권이었던 섬들은 모든 것이 공존 가능한 땅이었기 때문이죠.
요컨대 노르망디 출신이든 아니든 저지 섬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유전자(ADN)를 채취하여 이 시료를 바탕으로 연구 조사를 한 결과 30%만이 이방인들이었고, 나머지 대부분 주민들은 켈트 족의 혈통을 지녔음이 판명되었습니다.
이러한 분석에도 불구하고 실상 색슨 계통과 덴마크 앵글로 색슨 계통을 명확히 구분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들에 붙여진 지명이나 인명에 대한 조사는 확실히 이 지역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덴마크 인들의 공헌이나 기여도를 도외시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건지 섬만 보더라도 이방인들의 기여나 공헌 정도는 그렇게 크지 않죠. 게다가 노르웨이 인들이 출현한 흔적도 발견됩니다.
[1] 꾸앵 뚜흐지(Coin Tourgis)와 꾸앵 아탱(Coin Hatain)은 도르지슬(Þorgisl)과 하슈타인(Hásteinn)이란 이름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2] 바이킹들이 세운 노르망디 왕국은 정확히 1204년에 붕괴되었습니다. 이후 노르망디는 필리프 오귀스트 국왕이 이끌던 프랑스 왕국에 편입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