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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탕탱과 주변의 섬들

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16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건지 섬의 레타크(L’Etac)


세느 강 계곡에 출현한 바이킹들에 관해 기술하고 있는 수많은 역사적 문헌들이 존재하지만, 그처럼 많은 연대기나 시대 연표 어느 곳에도 프랑스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코탕탱(Cotentin) 섬과 망슈(Manche) 해협의 섬들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브랑생과 코탕탱


지도는 바이킹들과 관련된 유물이 발견된 지역인 코탕탱과 인근의 섬들을 가리킵니다.


바이킹들이 몽생미셸 성소를 침공하여 수도원이 보유하고 있던 성유물과 재물을 약탈한 것은 840년의 일입니다. 몽생미셸 교회참사회의 공동체는 도망치기에 급급했죠. 이 소규모의 공동체는 708년이래로 오베르(Auvers) 주교가 창건한 재단에 의해 관리되던 아브랑슈 교회에 소속된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시대의 문헌들은 9세기 초반 코탕탱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한 어떤 암시나 언급조차 없습니다.


대머리왕 샤를은 브르타뉴 인들과 바이킹들 간의 동맹을 깨부수기 위하여 867년 급기야 살로몽과 맺은 협약을 파기합니다. 이 협약은 브르타뉴 인들이 적들로부터 프랑크 국왕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바뀌었을까요? 「생 베흐탱 연대기」에 따르면, 살로몽의 지위가 박탈되었습니다.


“코탕탱의 백작은 모든 세금징수 권한을 잃어버렸고, 그가 다스리던 왕실의 영지와 백작령에 위치한 수도원들, 또한 주교에 소속된 것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 대한 효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아브랑슈 주민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브르타뉴 인들이 이미 아브랑슈를 점거했으리라고 만 짐작됩니다. 국왕 또한 이를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아돌프 르뢱스의 동판화 「뿔고동을 불고 있는 바다왕」[1]


어마어마한 선단을 이끌고 나타나 엄청난 인명피해와 손실을 불러일으킨 세느 강 계곡에 들이닥친 바이킹들의 존재는 연대기 편찬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이킹들은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홀로 뚝 떨어진 곳에 위치한 코탕탱 북쪽으로는 조용하고도 은밀하게 침투했습니다.


바이킹들은 코탕탱에 얼마 되지 않은 숫자로 떼를 지어 상륙했거나 기다란 해안을 따라 정주하면서 대를 이어 점점 은밀히 내륙 안쪽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셰틀란트나 헤브리디즈 군도에서와 같이 바이킹들은 코탕탱 지역의 라 아그(Le Hague)나 르 발 드 새흐(Le Val de Saire)에 정주했으리라 추측됩니다.


노르망디 어에 어원을 둔 지명학에 관한 저술들을 보면, 유난히 이 지역의 인구밀도가 높은 것이 이를 여실히 입증해줍니다. 바이킹들의 공동체 상당수가 이 지역에 몰려있었던 점도 그 같은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그들은 이 지역에 은밀히 침투하여 대를 이어 세를 불려 가면서 거의 한 세기 이상을 노르망디 어(스칸디나비아 어)로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삶을 이어갔습니다. 지명학에 관한 저술들은 특이하게도 자주 그리고 상세히 이 지역의 바닷가 연안을 언급하고 있죠.


이 지역의 토양과 주거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저술들 역시 상당합니다. 이 지역에 관한 특히 켈트(스코틀랜드 인들이나 아일랜드 인들) 족에 관한 인명학 저술들을 살펴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이킹들은 서로 연합체를 이루어 침투했을 가능성마저도 점쳐집니다. 또한 헤브리디즈 군도나 아일랜드 저 너머에 위치한 노르웨이 지역에서 도망친 노예들이었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코탕탱 북쪽 연안의 지명들






[1] 1845년 피트르 슈발리에가 펴낸 『브르타뉴의 과거와 현재』에서 인용.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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