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60화
[대문 사진] 바이킹을 묘사한 <바다의 왕>
1958년 훼르낭 르샹퇴흐가 쓴 「죽음과 삶에 처한 바이킹들」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노르망디에서는 정기적으로 신사 한 분이 바이킹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출현한다. 그는 일찍이 군 나팔수로 채용되었던 아주 순박한 사람이었다. 그는 바이킹 해적선인 드라카르(drakkar)를 타고 한 바퀴 짧게 돌아보면서 방청객들로 하여금 뿔 속에 마시기 위한 꿀물 한 방울을 받아 넣을 것을 주문했다. 전쟁의 피비린내 나는 상황과 늑대에 물어뜯긴 시체들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모든 참석자들이 아주 만족할 것이라는 생각 하에 각자 다음과 같은 문장을 되풀이하게 만들었다. “나는 바이킹이다. 너는 바이킹이다. 우리 모두는 바이킹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추위에 부들부들 떨지 않을 만큼 자신의 몸을 잘 추스르면서.”
실상 지난 2세기 동안 바이킹의 신화는 노르망디에서 붐을 이뤘습니다. 스칸디나비아 전사의 이미지에서 야만인으로 혹은 최고의 존재로 바뀌면서 항상 잘 생기고, 힘이 세며, 계략에 능하고, 대담한 이미지로 묘사되었죠. 한 마디로 전설에 입각한 자유의 상징이었습니다.
실상 노르망디 인들이 그들의 과거에 눈을 돌리고 바이킹들에 주목한 것은 19세기에 와서의 일입니다. 중세 시대 작품들과 함께 연대기들이 번역 출간되면서부터였다는 것이 정설이죠.
1827년 『루의 이야기』가 간행되었고 뒤동 드 생 캉탱의 저서가 『De Moribus et actis primorum Normanniae ducum』란 제목으로 1865년에 간행되면서부터였습니다. 노르망디 인 가운데 석학 중 한 명이었던 에델스탕 뒤메릴은 북극 작은 곰자리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역사와 언어학과 문학에 심취했던 이 양반은 1839년에 『스칸디나비아 시를 이야기하다』란 제목으로 출간한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게르마니아 혈통을 타고난 이들 가운데에서 스칸디나비아 인, 혹은 노르망디 인이란 곁가지로 뻗어나간 종족은 가장 잘 생겼을 뿐 아니라 가장 번식력이 뛰어난 민족이기도 했다. 이 종족은 도처로 이주해 다니면서 씨를 뿌리고 튼실하고도 무성한 열매를 맺었다.”
이어서 에두아르 르 에리쉐가 『노르망디 지방의 스칸디나비아 인들, 또는 노르망디 지방에서의 스칸디나비아 인들의 문학, 문헌학, 윤리학적 영향』이라는 제목의 연구물을 1877년에 간행합니다. 이 저술은 신화에 대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왜냐면 역사란 자각에 의한 산물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19세기에 프랑스가 성취했던 고대 스칸디나비아에 대한 열풍은 20세기에 와서 노르망디에서 역풍을 맞기 시작했습니다. 폴 투탱(장 르벨이라 불리는)은 『강 하구의 주인들』(1904)이라는 저서에서 역사적 사건을 되살려내려는 목적으로 서정적으로 또한 이와 비슷한 문체로 가끔씩 폭증하는 언어를 통해 바이킹의 신화를 열렬히 찬양하고 나섰습니다.
예를 들어 그가 롤로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롤(원문에 따른)은 최초의 위대한 인물이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완벽한 존재에 관한 것이며, 모조리 진보적인 것이고 또한 초인에 관한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식민지 주민들에 관해서는 “스칸디나비아 종족은 뇌스트리에 정주해야만 했는데, 토착민 여성들과의 잡교를 통해 가능해졌다. 바이킹은 그의 종족 전부를 데리고 온 것은 아니었다. 지위가 높은 엘리트층이거나 재간이 뛰어난 이들을 데리고 왔다.”
언어학적 영역을 침범하는 이러한 시도에 반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내용이나 형식 할 것 없이 모두 과장되었기 때문입니다. 샤를 드 라 롱시에흐는 1911년에 펴낸 『바이킹들이 정착한 곳 : 해양 언어』라는 저서에서 “오늘날 선원들이 사용하고 있는 전문용어는 사라진 언어의 최후의 유적과 같은 것이고, 피레의 사자들에 관해 룬 문자로 새긴 언어의 유물이기도 하며, 극점을 향해 가는 그린란드의 바위들에 새긴 바이킹들의 언어이자, 오딘을 숭상하는 이들의 언어 그 최후의 유적과도 같은 것이다. 푸른 이빨을 가진 하랄드 혹은 라그나르 로드브로그는 여전히 아무런 고민도 없이 연안 항해선들을 부둣가에 정박시키고자 밧줄을 던지라고 명령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피력하고 있습니다.
신화를 이야기한 이들은 더 있습니다. 노르망디 시인들은 바이킹 신화를 찬미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민간에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아리스티드 프레민느는 1881년에 발표한 「바이킹의 죽음」을 통하여 두 말할 것도 없이 스칸디나비아의 탁월한 주제들을 떠올리는 시라는 물살로 신화의 터진 구멍을 활짝 열어젖혔습니다. 그는 「바이킹의 죽음」이란 시에서 바이킹들이 라 아그의 광야에 그들의 우두머리 시신을 매장하는 장례식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용감한 무리의 최후의 작별인사가
지평선 저 너머 구석에 이르기까지 네 번씩이나 메아리치는구나.
그런 뒤 자랑스러운 노획물에 맑은 핏방울을 적시는구나.
용감무쌍한 동료들은 여전히 씩씩하게 뛰어가고
오로지 토르 신께 맡겨지는 때
분홍빛 히드가 우거진 황야에 바이킹이 잠들도다.”
1933년에 노르망디 지방에 속한 꾸땅스에서 개최된 행사에서 「바이킹들의 저녁식사」를 발표했던 루이 뵈브는 그의 또 다른 시인 「천 년의 바오쉐」에서 시구 대부분을 방언으로 노래했던 독특한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방언으로 시를 쓴 여러 시인들에게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생애 내내 노르망디 땅에 뿌리박고 살았던 알베르 로이에(코티스 카펠이라고도 불린다) 수도원장 같은 이들이 그들입니다.
샤를 테오필 훼레에 대해 언급하자면, 스칸디나비아의 세계에 집착한 광신자에다가 호전적인 성향을 지닌 인물이기까지 했습니다. 1902년에 펴낸 시집 『찬양받은 노르망디』에서 유려한 문학적 톤과 함께 아무 거리낌 없이 대열의 선두에 선 전사와 같은 태도를 유감없이 보여줬습니다. 이런 그의 태도가 잘 나타나있는 시구는 다음과도 같습니다.
“바다를 피로 물들인 진홍빛 뱃머리의
지옥의 거룻배를 탄 채 선조의 명예를 짊어진
나는, 파로에 군도의 덴마크 인 이교도라네.
나는 쟁취하였다네. 황금과 쇠를 벼려
이 시를 완성하였다네.”
스칸디나비아에 관한 그들의 이상을 글로 표현한 작가들은 이외에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작가들을 예로 들면, 폴 뒤발(장 로랭이라 불린다)과 요한 수당 드 피에르피트 또는 『토보르쥬, 바다의 여왕』(1905)이란 작품을 쓴 뤼시 들라휘 마드뤼스를 거론해야 할 것입니다.
뤼시 들라휘 마드뤼스가 쓴 『토보르쥬, 바다의 여왕』속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은 바이킹 롤프와 살다가 프랑크 족 수도사의 주문에 걸려 굴복당하여 죽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몇몇 소설가들은 신화를 주요한 주제로 다루기도 했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가장 최근에 글을 발표한 파트릭 그랭빌입니다. 그가 펴낸 『최후의 바이킹』(1980)은 노르망디 농부인 주인공 마르텔이 꿈속에서 부활하여 현실과 꿈속을 오가며 그의 선조들을 찾아 나서는 모험을 그린 소설입니다. “나는 커다란 망치다. 엔진이고 남근이며 싱싱한 연장이다! 다갈색 머리를 한 방탕아, 최후의 바이킹이다!”
역사와 문학은 대단히 추상적인 양 끝단을 이루고 있습니다. 신화는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 아주 용이하게 꽃을 피웁니다. 노르망디 인들은 바이킹들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아주 쉽게 풀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신화는 ‘천 년 제(Millénaire)’를 통하여 대중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고 신화를 길거리로 끌어내리는데 기여했습니다.
1911년에 루앙에서 개최된 축제들은 노르망디 공국이 탄생한 91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천 년이 되는 시점에서 치러진 대규모 행사였습니다. 이 거창한 이벤트와 맞물려 1924년에는 바이유에서, 1933년에는 꾸땅스에서 코탕탱과 베생 지역이 노르망디에 편입된 것을 자축하는 거대한 행사가 열렸죠. 이는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예를 들어 꾸땅스 대성당에서 열린 검의 미사는 이 같은 기념행사의 의의에 부합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어의 음조를 띤 이름을 차용하는 유행이 이때부터 싹텄습니다. 20세기 중반에 시작된 이러한 유행은 아이들의 영세명으로까지 이어져 스칸디나비아 식 이름을 택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이때부터 쏟아져 나온 이름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댕(Odin), 스방(Sven), 올라프(Olaf), 스노리(Snorri), 또흐발(Thorvald), 비야흐니(Bjarni), 아임달(Heimdal), 그랭켈(Grimkel), 토흐(Thor), 알바흐(Halvard) 등 이 이름들은 모두 롤로와 연관된 이름들입니다. 여자 아이들도 스칸디나비아 식 이름들을 선택했는데, 솔베그(Solveig), 브랭일드(Brunhilde), 지그리드(Gigrid), 일드갸흐드(Hildegarde), 스방일드(Svanhilde), 앵그리(Ingrid), 지그일드(Sighilde) 등이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 주민등록상의 이름들은 롤프(Rolf), 흐롤프(Hrôlf) 그리고 롤프(Rolph) 등 제각각입니다. 솔베그(Solweg), 솔베그(Solveigue) 그리고 솔베그(Solvègue)도 마찬가지로 제각기이죠. 지그리드(Siegrid), 지드그리드(Siedgried) 그리고 생그리드(Singrid) 역시 제각각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노르망디 곳곳에서 ‘바이킹들의 길(Rue des Vikings)’이란 거리 이름을 발견하는 것도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영화상영관이나 카페 이름이 ‘해적선(Le Drakkar)’인 것과 마찬가지로 바이킹들이 타고 다녔던 배 디자인 역시 도처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꺄망베흐 치즈 곽 뚜껑 디자인으로부터 노르망디 개인 사업체에서 사용하는 로고에 이르기까지 바이킹이 타고 다닌 배 디자인은 무수히 다양합니다. 심지어는 노르망디 광역단체의 로고로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 시인들, 콩트 작가들, 자치주의 지지자들 또한 단순히 스칸디나비아를 꿈꾸는 팬들에 이르기까지 그들 모두는 바이킹의 신화와 친해졌거나 아니면 그들의 현실에까지 투영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즉, 그들은 바이킹의 신화를 문학적 주제로 삼거나 간혹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신화를 이용하거나 심지어는 광고나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어제와 같이 오늘도 바이킹들은 노르망디 인들을 들뜨게 만들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