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59화
[대문 사진] 바이킹의 해적선 드라카르를 재현한 범선
19세기말에 진행된 인류학적인 연구들에 따르면, 유난히 코탕탱 북쪽 지역에 금발에다가 두상이 긴 사람들이 많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 같은 인상을 지닌 이들이 우세를 보였던 지역인 코탕탱 주민들은 또한 눈동자가 밝은 푸른빛을 띠고 있다는 점도 확인되었죠.
20세기에 와서 혈통관계를 조사한 결과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여러 그룹들을 대상으로 한 혈통에 따른 분류를 시도한 결과 그룹 A에게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유전 형질에 대한 분석이 두개골 형태에 대한 분석이나 또는 신장의 길이나 색조에 따른 분석보다도 훨씬 확고하다는 점도 밝혀졌죠.
부연하면 그룹 A를 통해 밝혀진 결론은 다른 어느 유럽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한 스칸디나비아 인들만의 유전적 특징들이 노르망디 주민들에게서 발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더하여 노르망디 주민들의 불균형한 분포를 보여주는 HLA 지도는 주민들이 옛적 어느 곳으로부터 이주해 왔는지를 증명해 주고 있어 흥미롭기까지 합니다. A3-B7 지도상에 나타난 불균형한 분포 역시 바이킹들의 확장에 따른 이동, 즉 덴마크에서 노르망디로 이주해 온 역사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같은 유전자(ADN) 분석만이 노르망디 주민들의 조상이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밝혀주는 유일한 열쇠일 수 있습니다. 유전자 분석은 특이하게도 노르망디 주민들이 스칸디나비아 인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밝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염색체 Y에 대한 연구를 통해 밝혀진 결론은 남자들만이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는 이 염색체가 아버지를 통해 유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앵글로 노르망디에 속한 섬들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말입니다.
또한 미토콘드리아 유전자 연구에서 밝혀진 바로는 이 유전자는 오로지 어머니를 통해서만 유전되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주민들의 유전자적 특징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확실하고도 정밀한 유전자 연구에 기대는 도리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20세기의 노르망디 인들은 과연 그들의 ‘바이킹 선조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한 이 시대는 다른 주민들과의 혼합이 촉진되고 있었을 뿐이라고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걸까요? 마찬가지로 ‘진짜’ 노르망디 인들은 혈통이 뒤섞여 있는 자들이란 사실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스칸디나비아 인들이 그들의 조상이라는 점을 밝히기 위한 모든 노력을 공허하게 만드는 이러한 가설은 최근에까지 제기되고 있습니다. 실상 바이킹들은 이미 색슨 족과 프랑크 족 거기에 더해 게르만 족의 혈통을 지닌 사람들, 또한 이들과 마찬가지로 골루아 족(갈로 로만시대의 이른바 영어로 골 족이라 부르는 종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에 정주한 종족이었습니다.
게다가 민족적인 특징을 따지자면 색슨 족이나 프랑크 족 거기에 더해 스칸디나비아 인들은 신체적으로 매우 유사한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한 종족에 가까운 두드러진 특징은 그들의 혈통을 조사한 결과에 따른 것이며, HLA 시스템 연구의 결과에 따른 것임은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유전자 연구에 따르면, 덴마크 인들에게서는 노르웨이 인들과 구별되는 유전자 형질이 아주 미미하게 검출된다는 점도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점으로 비춰볼 때 덴마크 인들과 앵글로 색슨을 완벽하게 둘로 나눈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에 속합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노르망디 인들에 대한 인상(말투, 외양, 사고방식, 반응하는 방식)을 탐구해 보는 것도 괜찮을 성싶기도 합니다. 특히 코탕탱 지역과 꼬 지방에서 흔히 마주치는 사람들에 대한 인상이 그렇습니다. 물론 이들조차도 숫자가 자꾸만 줄어들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노르망디가 배출한 작가들인 플로베르, 바흐비 도흐빌리, 모파상 같은 이들은 얼마나 탁월하게 노르망디 인들을 묘사했던가요?
우선하여 그들의 취향을 살펴보건대, 그들은 모든 것에 아주 실리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취향은 보다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의미를 띤 것이며, 악착같은 태도로까지 표현됩니다. 그러나 잇속에 밝지는 않았습니다. 탐욕스러운 경향을 보이면서 게다가 인색하기까지 했죠.
노르망디 인들은 또한 담력이 센 만큼 의심도 많고 욕심도 강합니다. 어떤 나쁜 감정을 갖게 만들기도 하죠. 사소한 일을 가지고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기를 좋아하며 소송 걸기를 즐겨합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아무 이유 없이 살인하는 이들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혹자는 노르망디 인들을 변호하기도 합니다. 스파르타 식 규율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빈정거림이나 기발한 유머를 거론하기도 합니다. 이는 노르망디 인들을 묘사할 때뿐만 아니라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묘사할 때도 마찬가지로 멋지게 손질한 것입니다. 달리 이야기하자면 스칸디나비아 인들에게 비친 자신들의 옛 모습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노르망디 인들과 바이킹들 간의 이러한 비교는 전혀 타당하지 않을뿐더러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적이 없습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식민 지배계급이 극소수였을 때 공국에서 날조된 노르망디 인들에 대한 특징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정신을 소유하였고 역동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그들의 태도가 경제적이고도 정치적인 실질적인 비약의 토대를 깊이 뿌리내리게 한 요인이자, 13세기 초에 마침내 최초로 관례화된 공공질서와 공공의 권리를 바로 정립하게 만든 요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아주 탁월한 실용주의자적인 감각은 이처럼 기독교 문화권에 속한 지역 주민들에게 내재한 몽환적인 태도와는 달리 세계에 대한 현실적인 비전을 제시하기까지 합니다.
이른바 ‘파란 도서관(Bibliothèque bleue)’이란 이름으로 배포된 책자인 「노르망디 인들의 교리 문답 집」은 바이킹들을 가리켜 아첨, 배반, 절도, 거짓말, 샘, 게걸스러움만 일삼는 자들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노르망디 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중세 때 바이킹들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그러했습니다. 즉, 마치 수도사들만이 바이킹들의 단점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죠. 이러한 왜곡된 평가는 결국 노르망디 인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오랫동안 이어져온 계기로 자리했습니다!
[1] 1911년 <프티 쥬흐날(Petit Journal)>의 삽화 「스칸디나비아 인들의 해적선 드라카르(drakkar), 천 년이 되다」. © 캉 노르망디 박물관 소장.
[2] 조각가는 훼깡(Fécamp)의 선원들이 그들의 조상인 바이킹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장 르노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