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52화
[대문 사진] 노르망디 공국의 시조 롤로
922년 프랑크 왕국은 정치적 상황이 불안정하여 끊임없이 왕국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단순왕 샤를에 대항하여 로베르 공작이 반기를 들고 스스로 공작의 자리에 오른 일이었습니다.
샤를 국왕은 로베르 무리를 척결하기 위하여 군대를 소집하고 롤로와 루아르 지역의 바이킹들에게도 이에 합세할 것을 주문했죠. 샤를은 로베르가 그들의 우두머리인 라쥬놀트(뢰근발트라 불리기도 함)에게 암암리에 국왕이 하사한 땅을 이미 전 해에 양도한 사실을 알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흘로도야르 연대기」에도 로베르에게 “바이킹들에 의해 초토화된 낭트 지역과 브르타뉴 지역을 양도했다”라고 나옵니다. 게다가 거대한 프랑크 왕국의 한 부분에 통합되기를 선택한 롤로가 충성을 서약한 프랑크 국왕에게 적대적인 자들을 가만 내버려 둘 리도 만무했습니다. 롤로는 프랑크 왕국에서 벌어지는 약탈을 막기 위한 원정대를 급파했죠. 흘로도야르는 이에 대해 부연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923년이 시작되자마자 롤로는 군대를 동원하여 실의에 빠진 국왕을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이 장악한 보배지를 급습하였습니다. 부르고뉴의 공작이자 로베르의 사위인 라울은 우아즈 강에서 루아르 지역에서 급파된 바이킹들을 저지했죠. 그리고 국왕의 군대와 연합하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샤를은 그해 6월 수아송 전투에서 패배하였습니다. 로베르는 살해되었고 그의 아들들인 위그 르 그랑과 에르베르 드 베르망두아는 아버지를 승계할 인물로 라울을 선택했습니다.
라울은 로베르 공작의 뒤를 이어 국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샤를 국왕은 포로가 되었죠. 한편 루아르의 바이킹들은 같은 해 8월 에르베르의 가신들과 대항하여 싸우다 혹독한 패배를 당했습니다.
라울은 엪트 강 연안을 해방하였고 롤로의 영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흘로도야르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롤로는 샤를 국왕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했던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어 국왕 라울의 부재로 위그 르 그랑, 에르베르 드 베르망두아 그리고 랭스의 세울프 대주교 사이에 이루어진 로렌의 담판에서 전세가 역전되는 바람에 롤로는 924년 5월에 국왕의 합의하에 루앙 백작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이에 따라 조공이 이루어지고 이미 루앙의 영향력이 확산되고 있는 이에무아와 브쌩 지역에 대한 양도가 이루어졌으리라 짐작됩니다. 게다가 노르망디의 경계는 더욱 확대되어 비르 지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롤로는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루앙의 노르망디 인들’이 보배와 아미앵 지역을 새롭게 공격하고 심지어는 누와용까지 거슬러 올라가 참해를 입힌 것을 당연시 여기는 것에 경멸의 뜻을 숨기지 않았죠.
게다가 브쌩 지역에서는 소요가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지역 주민들이 롤로의 권위를 내팽개쳤을 뿐만 아니라 위그 르 그랑이 이끄는 프랑크 군대가 루앙 인근에까지 쳐들어와 유린하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노르망디 인들’은 순간 재빨리 선회하여 또 다른 공격에 과감히 맞서 싸웁니다. 그러자 아흐눌 드 흘랑드르와 에르베르 드 베르망두아가 합세하여 이끄는 대규모의 군대가 들이닥쳤죠. 이들은 브레슬르까지 진격한 끝에 마침내 유(Eu) 성을 포위 공격했습니다. 롤로가 증원군을 급파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크 군대는 성채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하고 수비대 전원을 학살합니다. 흘로도야르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은 성채를 공격하였다. 성벽을 무너뜨리고 사닥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갔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도성 전체가 공포에 떨었다. 수비대 병사들은 모두가 살해되고 강렬한 불길이 타올랐다. 이 와중에도 몇 명은 몸을 피할 수 있었다. 이웃한 섬들 역시 공포에 떨기는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프랑크 군대는 도성을 접수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의 무엇을 요구하듯 날뛰어 갔다. 노르망디 인들이 도착할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해 도성을 방어했지만 칼날은 그들의 목숨을 겨누고 있었다. 구원되리란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상당수가 강물에 몸을 던졌고 도망친 이들은 도륙당했으며 또 다른 이들은 프랑크 군대가 휘두르는 칼에 목숨을 잃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던지는 창에 맞아 죽었다. 모두가 죽음을 당했다.”
연대기 이외에도 사건의 종말을 상세히 전하는 문헌들의 말미에는 롤로의 이름이 늘 등장합니다. 리쉐흐 드 랭스가 완성한 「프랑스 역사」에서는 라울이 유(Eu)의 성채에 대한 포위 공격에 가담했을 뿐만 아니라 롤로를 살해했다고도 나옵니다. 어느 것 하나 정확한 것은 없습니다. 흘로도야르조차도 이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없죠. 하지만 만일 뒤동의 말이 맞는다면 롤로는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바랐고 5년 후에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합니다.
926년 롤로는 반격에 나서 플랑드르를 향한 원정대 군선에 승선합니다. 루앙에서 출발한 선단은 귄느에 상륙하죠. 라울의 무리는 생토메흐 인근의 호크껨베르쥬 숲에서 롤로의 군대를 포위합니다. 그러나 롤로의 원정대는 하울의 무리가 매복한 숲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합니다. 한편 에르베르 드 베르망두아는 프랑크 국왕이 구원을 요청하자 한 걸음에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양쪽으로 기습을 당해 엄청난 패배를 당하죠. 라울도 상처를 입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음 해 국왕 라울은 에브베르 드 베르망두아가 단순왕 샤를에게 왕관을 되돌려줄 것을 계획하자 펄펄 뛰며 격분했습니다. 에르베르는 유(Eu)에서 폐위된 국왕과의 회담을 주선했죠. 포로들을 풀어주고자 한 일이었습니다. 노르망디 인들은 당연히 롤로에게 인계되었죠. 롤로의 아들 기욤은 이 일에 관여한 관계로 그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기록은 이렇게 전합니다. 기욤은 “샤를에게 경의를 표하고 에브베르에 대해서도 우정의 친밀감을 느꼈다.” 에르베르는 그때 자신의 아들 외드를 볼모로 남겨두었습니다. 여러 상황을 염두에 둔 처사였습니다.
928년이 시작되면서 에르베르는 라울과 다시 화해했습니다. 여기서 흘로도야르가 제기한 의문은 무엇 때문에 “롤로가 붙잡아 두었던 에르베르의 아들 외드가 돌려보내지지 않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929년이 되자 상황은 급격히 반전됩니다. 감옥에 갇혀있다 풀려난 국왕이 서거했기 때문이죠. 같은 해에 롤로에게서 아들 기욤에게 권력이 완벽하게 이양되었습니다. 짐작컨대 뒤동은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관계로 누구보다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롤로가 죽고 기욤은 933년 브르타뉴 인들과 대항한 전투의 선봉에 나섰습니다. 국왕 라울에게 대한 충성 서약도 이때 이루어졌습니다.
롤로의 시신은 루앙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안장되었습니다. 롤로는 대성당 안에 안치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죠. 루앙의 ‘백작’이었던 그는 프랑크 귀족사회와의 동맹관계를 도외시할 순 없지만, 그들에게 무시 못할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 복합적인 시소게임을 중단할 수 없었던 그로서는 생 클레흐 쉬흐 엪트 조약으로 거대한 프랑크 왕국의 일원에 통합되기 전부터 이미 프랑크 사회의 복잡다단한 조직 한가운데에 속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될수 없었습니다.
요컨대 그가 17년 간이란 짧지 않은 통치기간 동안에 프랑크 왕국을 이끌어가고 있는 인물들과 투쟁하면서도 그들과의 변함없는 우정을 과시했다는 것은 놀랍기까지 합니다. 그렇듯이 카롤링거 왕조에 대해 그 어떠한 실책을 범하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지지를 표명했다는 점 또한 롤로라는 인물의 됨됨이를 설명해 주기에 충분합니다.
당시 ‘노르망디’ 바깥 세계에서의 롤로에 대한 인상은 항상 부정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는 롤로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힌 결과이기도 했죠. 그들은 늘 스칸디나비아에 양도된 땅들을 다시 찾아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문헌이 증언해 주듯 롤로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노르망디 도처에 짙게 깔린 암운은 좀처럼 걷히지 않았습니다.
[1] 1875년에 세워진 것으로써 정복왕 기욤 조각상 받침대에 그의 다섯 명의 후손들과 함께 세워졌습니다. 1851년 루이 호쉐가 제작. 장 르노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