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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Dec 21. 2024

발벡에서 살고 싶은 남자

몽생미셸 가는 길 210화

[대문 사진] 꺄부르에서 다시 만난 프루스트


파리에 사는 유일한 동갑내기 친구는 말년에 어디 살고 싶으냐는 질문에 단호한 어조로 꺄부르(Cabourg)라 힘주어 말했다. 그가 살고 싶다는 도시를 어느 해 봄날 울가트, 디브 쉬흐 메흐를 거쳐 찾아갔다. 하지만 샤를, 마르셀, 브루노, 상드린, 르네, 레이몽, 페르디낭, 자크, 소피, 마크, 오드리, 크리스토프, 플뢰르, 사라, 장, 이자벨, 에마뉘엘, 제롬, 피에르 등 많은 스타들이 누비고 다녔다는 도심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제대로 산책도 하지 못한 채 밤늦게 허겁지겁 도시를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그 뒤 다시 한 번 꺄부르를 찾았다. 이틀 낮 하룻밤 동안 그 도시에서 머물렀다.


처음으로 찾아간 봄날 도심을 관통하는 길을 걸어가면서 꺄부르(Cabourg)가 프루스트의 소설에 등장하는 발벡(Balbec)를 가리키는 걸 떠올렸다.


그 뒤로 이곳을 한 번 더 찾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꺄부르는 차갑고도 냉정하게 등을 떠밀었다. 하룻밤이 곤혹스럽게 지나가고 동료들과 함께 아침도 거른 채 생 말로로 내달렸던 기억이 아픈 생채기처럼 남아있는 도시!


나는 그 도시를 다시 찾게 되면 바닷가에 한 번 서보리라 작정했다. 이번에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밀물 져 오는 백사장 끝까지 걸어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대체 무슨 매력이 있어서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한 장소만을 고집했는지 나 역시도 그랜드 호텔 414호실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기대감마저 부풀어 올랐다.


이쯤 되면 여행은 답사를 벗어난다. 통속적이고 속물적인 취향만 남고 마는 것이다. 이를 노려 온갖 부류의 사진작가들을 동원하여 시선을 확 끄는 사진들만을 골라 띄워놓은 호텔 인터넷 사이트 예약창에 금방 홀릴 만도 하겠다. 내가 시골의 허름한 숙박지를 좋아하고 향토음식을 탐하는 이유는 지금 내가 걸어가는 이 길이 그저 정처 없는 여행자의 ‘나그네 길’이 아니라 1천 년 전으로 돌아가보고 싶은 ‘답사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닷가를 찾으면 잘 찍은 사진보다 왜 찍었는지 모를 사진에 더 맘이 끌린다.


어느 이름 모를 여행자가 남긴 사진 한 장에 맘이 끌렸다.


그는 지금 안갯속을 걸어간다. 바다와 면한 강둑길을 걸어가고 있다. 가로등은 길 한쪽 부분만 비추는지 운하 쪽에는 가로등이 없다. 걸어가는 이는 고개를 수그린 모습도 아니고 그저 앞만 응시하면서 걸어가는 모습도 아니다. 그는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일상의 걸음인지 산책의 걸음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다. 그러나 나는 사진을 보면서 그의 발걸음을 ‘산책’으로 규정한다. 이들이 즐겨 읊조리는 프로므나드(Promenade)다!


그런데 목표는 어딜까? 그게 궁금하다. 바다를 향해 걸어가니 그곳에 무엇이 있다는 이야기인가? 만일 내가 대신 저 길을 걸어간다면 길 끝에서 나는 무엇과 마주할 것인가? 무엇을 고대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나는 꺄부르에 와있다. 내가 기억하기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죽기 전까지 여름마다 찾아온 휴양지가 이 도시고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발벡(Balbec)이란 지명의 실제 이름이 바로 이곳 꺄부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프루스트에 대해서 이젠 뭔가 결론을 내리고 싶다. 위의 사진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삶을 산 소설가는 파리 중산층 사회상을 세세하게 묘사했다. 그 반대편에 리얼리스트 발자크라는 소설가가 우뚝 서있지만, 프루스트 역시 발자크가 되고 싶어 했으나, 두 사람의 등장인물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네 손창섭이나 장용학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저 신문 연재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다른 것처럼.


베르그송과 프루스트



“인상주의적 사고는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11)의 철학에서, 특히 인상주의의 본질에 밀착된 매체인 ‘시간’에 대한 베르그송의 해석에서 그 가장 순수한 표현을 얻는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되풀이되지 않을 순간의 일회성이라는 것이 저 19세기의 기본적 체험이었다. 그리하여 자연주의 소설 전체가, 그중에서도 특히 플로베르의 작품은 이러한 체험의 묘사이자 분석이었다.


그러나 플로베르의 세계관과 베르그송의 세계관을 갈라놓는 주된 차이점은 플로베르가 아직도 인생의 이상적 실체를 갉아먹는 하나의 파괴 요인으로 시간을 파악했다는 점이다.


우리의 시간관의 변화, 아울러 체험적 현실 전체에 대한 평가의 변화는 서서히 일어난 것으로서, 그것은 제일 먼저 인상파의 그림에서, 다음에는 베르그송의 철학에 와서, 끝으로는 (가장 명확하고 가장 의미심장하게)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작품에서 일어났다.


프루스트에 이르면, 시간은 이미 분해와 파괴의 원리가 아니요, 그 속에서 이념과 이상이 가치를 잃고 삶과 정신이 실체를 상실하는 요소가 아니며, 오히려 우리는 시간이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의 정신적 존재, 생명 없는 물체와 기계작용에 반대되는 우리 삶의 본질을 포착하고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우리 본연의 삶에 이르는 데 그치지 않고 시간을 통해서 그렇게 된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 삶의 개개의 순간의 총화일 뿐 아니라 이러한 순간들이 모든 새로운 순간을 통해 획득하는 모든 새로운 국면들의 귀결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나간 시간, ‘잃어버린 시간’은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가 버림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생활에 내용을 부여한다. 그런 까닭에 베르그송의 철학을 정당화시켜 준 것이 바로 프루스트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프루스트의 소설에 와서 비로소 베르그송의 시간관이 그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과거의 귀결점으로서의 현재의 국면에서 처음으로 실감 있는 삶과 약동하는 움직임과 색채, 관념적 투명성과 정신적 내용을 획득한다. 프루스트의 말대로라면 진정한 낙원이란 잃어버린 낙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낭만주의 이래 거듭 되풀이하여 인생의 상실에 대한 책임을 예술에게 물어왔고, 플로베르가 말하는 인생의 소유(avoir)와 표현(dire) 간의 선택을 비극적인 양자택일로 보아왔다. 이에 반해 관조, 회상, 예술의 길이 우리가 인생을 소유하고 체험하는 한 가지 가능한 형식일 뿐 아니라 오직 단 하나의 가능한 형식이라고 본 최초의 인물이 프루스트이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시간관에 의해 이 시대의 유미주의 자체가 조금이라도 변하는 것은 아니다. 유미주의는 이를 통해 좀 더 온순한 외양을 띠게 될 따름인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관상의 온순함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프루스트에 의한 인생 가치의 전도(顚倒)는 한 병든 인간의, 한 생매장된 인간의 자위와 자기만족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1]





[1] A. 하우저, 『文學과 藝術의 社會史 – 現代 篇』, 백낙청, 염무웅 공저, 創作과 批評社, 1993, 서울, 225-226쪽.


꺄부르의 겨울, © 미셸 드아예(Michel Deha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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