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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Dec 20. 2024

디브 만의 기욤 포구

몽생미셸 가는 길 209화

[대문 사진] 디브 쉬흐 메흐의 기욤 포구


울가트의 <라 테라스(La Terrasse)> 식당에서 주방장이 추천한 간단히 조개가 든 해물 요리를 맛본 뒤, 디브 만을 건너뛰어 기욤 포구(Port de Guillaume)로 향한다.


버터와 향신료가 적절히 스며든 쫀득거리는 조갯살 식감이 묘하게 입맛을 자극한다. 빵을 물리치고 한 접시 더 주문하여 루아르 강 인근의 포도밭에서 제조한 화이트 와인도 한 잔 시켜 그 묘한 맛을 더해본다. 탄산수라지만 맹물에 조갯살은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조개가 들어간 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내이긴 하나 그녀의 구운 가자미 요리 대신 내 조개가 들어간 생선 요리가 더 맛있어 보인다고 아내는 모처럼 평을 쏟아낸다.


음식은 누구와 함께 드는가에 따라 입맛도 달라진다. 내 유일한 동반자는 식탐이 없어 여행할 때마다 메뉴를 내가 직접 고르는 경우가 많지만, 그녀의 음식 재료에 관한 지식이나 손맛에 의한 조리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나다. 뛰어난 솜씨를 갖추고 있다보니 아내의 입맛 역시 까다로울 정도로 탁월하다.


나는 아내의 손맛을 사랑한다! 내 입맛은 그처럼 아내의 손맛이 사로잡은 경우이긴 하나 여행지에서의 선택만큼은 그녀의 입맛과 동떨어지지 않으면서 새롭고 독특한 음식을 찾고자 늘 고민을 더한다.


울가트의 <라 테라스> 식당은 그날그날 입하된 생선과 해물로 요리를 한다. 그 재료의 신선함이 이 집 음식을 입맛 당기게 만드는 요인이다.


어느 봄날 울가트에 도착한 우리 두 사람은 기욤의 돌기둥을 찾는다고 오후 내내 헤매고 다녔다. 핸드폰에 깔려있는 맵(지도)에 의지하면 될 것을 굳이 직감만을 믿고 험난하고 막막한 길을 몇 시간 동안을 차를 타고 빙빙 돌면서 디브 쉬흐 메흐 기욤의 포구 언저리만 맴돌다 지쳐버린 것이다. 지나가는 주민에게 물어본 것이 화근이었다. 기욤 포구에 가면 있을 것이라는 그 말 한마디에 울가트가 아닌 디브 쉬흐 메흐의 포구 바깥쪽을 샅샅이 살피고 다닌 것이다.


기욤 포구(Port Guillaume)는 운하 같은 강이 굽이치는 곳에 위치해 있어 기욤의 시대에는 지리적으로 수많은 전함들을 은폐하기 좋은 곳이었으리라 쉽게 수긍이 간다. 사진 찍을 새도 없이 차를 몰고 이리저리 돌기둥 비슷한 것만 찾아다니다 보니 포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아파트 단지만 실컷 구경한 꼴이다.


아파트들은 주민들 소유이기도 하지만, 파리 및 파리 인근에 사는 파리지앵들의 여름별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산뜻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포구에 있는 요트들도 그들 것이라 짐작되는 대목이다.


나는 그곳을 다시 찾아갔다. 철길을 건너 빙빙 돌아 찾아가던 그때의 막막한 심정, 그리고 신경마저 날카로워진 상태에서 예민하게 폭발하던 혼란스러움, 돌기둥을 찾고자 했던 그 순순한 설렘은 결국 비참하게 일그러지고 만 길을 지금 되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상처의 아픔이 아문 자리에 덧나는 상처 때문이었을까? 언덕 위에서 소나무사이로 내려다보이는 포구로 눈길을 주기도 하고 굽이치는 디브 만의 운하도 멀건이 바라다보았다. 천 년 전의 상황은 이와는 다른 풍경이겠거니 기욤의 대 선단이 항해를 앞둔 그때의 모습 또한 아련하게나마 상상이 가는 순간이었다.


“공작은 교황 알렉산더 2세의 동의를 얻어냈고, 교황은 그에게 깃발과 성 베드로의 성골함을 보내주었다. 공작은 동시에 프랑스 국왕 필립 1세로부터 중립을 지킬 것을 약속받았다.


울가트(Hougate), 칼바도스 지방, 영국 정복을 위한 노르망디 선단의 출항을 기념하는 정복왕 기욤의 기념비.


9월 12일 드디어 승선 명령이 떨어졌다. 선단은 생 발레리(Saint-Valéry) 갑에 정렬했다. 한밤중에 영국 해안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강한 남서풍이 휘몰아쳐 배들이 파손되고, 네모 돛을 단 너박선 몇 척이 실종되었다. 너박선은 바닥이 평평하여 말들을 싣기에 편리한 구조였다.


솜(Somme) 만에서 기욤은 때를 기다렸다. 아직 바람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그는 또한 영국 왕 제위를 탐낸 노르웨이 왕 하랄드 하르드라다가 영국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기다렸다.


9월 28일 조금 때, 남쪽으로부터 바람이 이상적으로 불어왔다. 17시부터 시작된 밀물은 한 두 시간만 더 버티면 만의 꼭대기까지 차오를 것이 분명했다. 노르망디 군대는 다음날 아침 잉글랜드의 페번시 만에 상륙했다. 성 미카엘 축일이었다.


해안 경비를 맡고 있는 단 몇 명의 영국 병사조차도 마주치지 않았다. 노르망디 군대는 평온한 가운데 차분하게 전쟁 준비태세를 갖췄다. 같은 시각 헤럴드는 스탠퍼드 브리지에서 노르웨이 왕 하랄드를 죽이고, 그의 형제인 토츠그도 살해한 뒤, 승리를 거두고 기욤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해안 쪽을 향해 말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1]






[1] 미셀 우흐께, 질르 피바흐, 장-프랑수아 세이에흐 이 세 사람이 펴낸 <정복왕 기욤>, 오렢 출판사,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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