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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Dec 18. 2024

헤이스팅스 전투

몽생미셸 가는 길 208화

[대문 사진] 헤이스팅스의 전투 장면


기욤은 우선 800척의 배가 필요했기 때문에 선박 제작자들에게 신속히 건조작업에 착수하도록 명령했다. 영국 첩자들은 해럴드에게 노르망디에서 수집한 정보를 국왕에게 전하기 위해 달려갔다.


“대담해져야 합니다!” 해럴드의 동생 기르스가 국왕에게 충고했다. 그러자 해럴드가 병사들에게 외쳤다.


“놈들의 배가 출항하기 전에 먼저 공격해라. 그들의 모든 선박을 불태워야만 한다. 그래도 노르만족이 헤엄을 쳐서 영국까지 올 수 있는지 지켜보자!”


하지만 국왕 해럴드는 영국에서 노르만족이 쳐들어오기 만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영국 함대에 와이트 섬에 닻을 내리고 만전에 대비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노르만족이 잉글랜드 해안에 접근하는 것을 용이하게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해럴드 왕은 자신만만했다. 국왕의 군대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고, 무엇보다도 잘 훈련되어 있었다. 국왕의 최정예 병사들인 흉포한 용병들은 큼지막한 전투용 도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색슨족 농민들 역시 국왕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4월 24일, 밤이 되자 누군가 하늘을 가리키며 왕에게 이야기했다.


“보시오! 하늘에 이상한 빛이 있나이다! 불붙어서 어딘가로 추락해 가는 저 별 말입니다!"


사람들은 하늘을 가르며 어딘가로 사라져가는 혜성을 공포에 질려 쳐다보았다.


해럴드 왕은 생각에 잠겼다.


“이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징후일까? 과연 우리에게 유리한 징조일까? 아니면 노르만족을 위한 징조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영국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노르만족만이 유일한 위협은 아니었다. 해럴드의 동생인 토스티그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노르웨이로 항해를 떠났고, 하랄드 하르드라다 왕에게 동생과 싸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토스티그는 북유럽 군대를 일으켜 북쪽에서 침공할 것인가?


“빨리 끝내야만 한다.” 해럴드는 생각했다. “나는 그 둘과 동시에 싸울 수 없어.”


적들이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9월, 기욤 공작은 노르망디를 떠날 준비를 마쳤다. 토스티그와 하랄드 하르드라다의 군대는 이미 노르웨이를 떠나 잉글랜드 북부로 향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해럴드 왕은 신속하게 행동해야 했다.


“우리는 요크셔로 진군하여 내 동생 토스티그와 그의 북유럽 침략자들을 제거할 것이다!”


국왕은 선언했다.


“그럼 다시 돌아와 이곳 남쪽에 있는 기욤 공작과 맞붙어 보자.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있다.”


잉글랜드 군대는 서둘러 북쪽으로 진격했다. 긴 행군이 이어졌다. 하랄트 하르드라다와 토스티그는 이미 상륙하여 내륙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며칠 후인 1066년 9월 25일, 두 군대는 요크셔의 스탠퍼드 다리에서 충돌했다. 두진영은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였다. 도끼와 칼이 난무하면서 여기저기서 피가 솟구쳤다.


건장한 노르웨이 전사가 잠시 다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리 밑에서 결국 창에 맞아 쓰러졌다. 이를 신호로 해럴드 국왕의 심복들이 수백 명의 적군을 죽였다. 하랄드 하르드라다 자신도 목을 관통하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토스티그는 또 다른 전투에서 계속 싸웠지만, 그 역시 곧 죽임을 당했다.


해럴드가 잉글랜드 남부로 돌아왔다. 그러나 승리를 축하할 시간이 없었다.


“당장 남쪽으로 가야 한다!” 국왕이 소리쳤다.


농민들을 착출 하는 바람에 군대에 소집된 병사들은 이미 전의를 잃고 지쳐가고 있었다. 많은 병사들이 군대에서 도망쳐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해럴드와 그의 충실한 기마병들은 런던을 향해 질주했다. 다른 부대들도 그 뒤를 따랐고, 남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더 많은 지원자들을 끌어 모았다.


한편 9월 28일 이른 아침, 7,000명의 노르만 병사들이 서식스의 페벤시에 상륙했다. 아무도 그들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동시에 해럴드의 누더기 군대는 요크셔를 떠나지도 않았다. 실제로 영국군은 노르만족을 요격하기 위해 단 며칠 만에 400킬로미터를 이동해야만 했던 것이다.


영국 땅에 상륙하자마자 기욤이 페벤시(Pevensey) 로마 요새의 폐허 안에 진지를 구축한 성. 위키피디아 사진.


“영국군이 우리가 평화롭게 영국 땅에 상륙할 수 있도록 어딘가로 떠났구나!” 영국 땅에 상륙한 기욤은 미소를 지었다.


전령이 남쪽으로 가는 길에 해럴드를 만나 기욤이 이미 영국 땅에 상륙했다는 불길한 소식을 전했다.


해럴드 왕의 보잘것없는 소규모 군대는 10월 5일에야 런던에 도착했다.


“해안에서 기욤의 군대가 상륙하지 못하도록 이곳에서 기다렸어야 했는데.” 해럴드는 한탄했다.


노르만족 군대는 명령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배를 해안에 정박시켜라!” 기욤 공작이 소리쳤다.


“먼저 말에서 짐을 내리도록 하라.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보급품을 챙기고! 헤이스팅스에 요새를 건설하라. 적군이 나타나면 무조건 처치하라. 그들의 집도 불태워 버려라. 가축은 잡아두고!”


노르만족은 상륙하자마자 진열을 정비하고 헤이스팅스 전투를 준비해 갔다. 침략자들은 포도주, 물, 밀가루, 창, 칼, 투구 등 온갖 화물을 본토로부터 가져왔다. 거대한 함대와 병사들이 해안에 집결해 있었다.


기욤 공작은 전쟁에서 이길만한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었다. 그의 군대는 만만의 준비가 되어 있었고 이미 그의 정찰병들이 해럴드 국왕의 군대가 너덜너덜해졌다는 사실을 첩보를 통해 보고했던 것이다. 영국 국왕의 군대는 보잘것없었고 병사들과 말들 모두가 지쳐있었다.


“승리의 축배를 준비하자!” 기욤이 소리쳤다.


해럴드는 그의 형제들인 기르스와 레오프와인 그리고 그의 군대를 이끌고 런던을 떠나 기욤의 군대가 기다리고 있는 헤이스팅스 들판으로 달려갔다. 대열에는 가정부, 용병, 귀족, 농민들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사흘 동안 행군했다. 10월 13일, 마침내 헤이스팅스 근처의 초크 다운(Chalk Downs) 산등성이에 모습을 드러냈다.


해럴드는 기욤의 군대가 내륙으로 더 진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즉시 센락 능선을 따라 병사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노르만족이 우리 땅을 파괴하고 있군.” 해럴드가 자신의 동생 기르스에게 말했다. “우리는 새로운 군대를 기다릴 수가 없다. 내일 당장 싸워야 한다.”


어둠 속에서 국왕은 부하들을 보내 센락 능선에 자리를 잡게 했다. 그는 그들에게 남쪽을 향하여 일렬로 진열을 정비하라고 명령했다. 앞쪽에는 기다란 창으로 무장한 군대가 방패벽을 형성하고 진을 쳤다. 그 뒤로는 훈련을 거의 받지 않은 농민 출신 병사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군대는 새벽까지 기다렸다.


조젭 마틴 크론하임(Joseph Martin Kronheim)이 묘사한 헤이스팅스의 전투 장면. [1]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드디어 두 군대는 정면으로 충돌하고 말았다. 10월 14일 새벽이었다. 양군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맞붙었다. 그들의 갑옷이 번쩍였다. 노르만족 군대는 아래 언덕에 세 개의 진영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기욤은 이복동생인 바이외의 오동 주교와 함께 중앙에 말 탄 모습이었다. 맨 앞에는 궁수들이 도열해 있었다. 보병과 기사는 후방에 진을 치고 있었다.


오전 9시가 조금 지나자 갑자기 기욤이 이끄는 군대의 궁수들이 전진하면서 앞을 가로막고 있는 앵글로 색슨족 대열을 향해 활을 쏘아댔다. 해럴드는 겁에 질린 농민 병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이 외쳤다.


“우리는 노르만 침략자들을 물리칠 수 있지만, 대오를 무너뜨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패배할 뿐이다!”


‘웨식스의 용’ 깃발이 휘날리는 가장 높은 지형에서 해럴드는 아래쪽을 응시했다. 이미 잉글랜드 기병대는 말에서 내려 도보로 싸울 준비를 마쳤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될 찰나였다.


그때 기욤이 자신이 이끄는 노르망디 공국의 군사들에게 공격 개시 명령을 내렸다.


“공격하라!”


기욤이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기뻐하라! 이기지 않으면 전멸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 편이다!”


노르만족의 궁수들은 다시 앵글로 색슨족의 성벽을 향해 화살을 쏘아댔다. 그러나 해럴드의 병사들은 굳건히 버텼다. 하우스칼[2]은 전진하는 노르만 기사와 말을 토막 냈다. 도끼날이 번쩍였다.


“도망가자! 도망가자!”


적이 쓰러지자 해럴드의 병사들이 소리쳤다.


“앞으로 전진!”


해럴드의 군대는 노르만족 병사들의 함정에 걸려들고 말았다. 일부 노르만족 병사들이 공포에 질려 물러나면서 앵글로 색슨족 농민 병사들은 그들을 쫓아 언덕 아래로 뛰어내려 가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 앵글로 색슨족 병사들이 외쳤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멀리까지 나아갔고, 손쉽게 적의 함정에 걸려들고 만 것이었다.


전투를 벌이던 두 군대는 잠시 전투를 멈췄다. 해럴드와 기욤은 부하들에게 전선에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꼼짝 말고 진열을 갖추어라.” 해럴드가 소리쳤다.


그는 산등성이를 장악하기 위해 방패 벽이 버텨야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뒤였다.


공격이 다시 개시되었다. 실랑이와 고함소리가 섞여 진동했다.


“아악!”


기욤 공작이 말에서 떨어져 나뒹굴었다. 이를 본 노르만 병사들이 소리쳤다.


“공작이 말에서 떨어졌다. 공작이 죽었다.”


그러자 노르만족 병사들 사이에서 한탄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공작이 벌떡 일어섰다. 그는 투구를 들어 올리고는,


승리가 우리 눈앞에 있다!


그가 소리쳤다.


영국의 방패 벽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해럴드의 동생인 레오프와인이 또 다른 공격을 받아 이에 맞섰다.


필립 제임스가 묘사한 헤이스팅스 전투 장면. [3]


격돌
PATATRAS


헤이스팅스 전투의 최악의 순간에 레오프와인(Leofwine)은 장렬하게 전사했다. 영국 군 가운데 일부 겁에 질린 농부 출신의 병사들이 줄행랑을 치면서 도망쳤다.


해럴드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욤은 병사들을 독려했고, 노르만 병사들은 앵글로 색슨족을 후퇴시키면서 피비린내 나는 백병전을 펼쳤다. 앵글로 색슨족은 추풍낙엽처럼 죽어 나갔다. 양쪽 모두 지쳐가기 시작했다. 해럴드는 해가 지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날이 저물어 갈 무렵 새로운 군대가 도착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겨우 오후 두 시에 불과했다. 그때 무서운 울부짖음이 들렸다.


“기르스가 쓰러졌다!”


해럴드의 충실한 두 형제가 모두 죽고 만 것이다.


그때 기욤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는 궁수들에게 방패 벽을 넘어 앵글로 색슨족의 머리를 향해 화살을 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영국 진영의 방패 벽이 산산조각 났다. 이제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노르만족의 진격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필사적으로 해럴드 국왕과 그의 가문의 군사들은 쓰라린 최후까지 싸웠다. 그러나 기욤의 기사들이 해럴드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했고, 해럴드는 결국 말에서 떨어져 쓰러지고 말았다. 창이 쓰러진 국왕의 가슴을 꿰뚫었고, 그의 몸은 갈기갈기 찢겼다. 땅은 피로 얼룩졌다.


모든 것을 잃었다. 모든 용감한 하우스칼[3]은 왕과 함께 죽임을 당했고, 탈출을 시도한 모든 사람도 죽임을 당했다.


해 질 녘이 되자 헤이스팅스 전투는 끝이 났다. 해럴드와 그의 형제들은 모두 죽었고, 앵글로 색슨 잉글랜드도 죽었다. 기욤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고드윈 슨의 죽음을 다룬 삽화. [4]
해럴드가 죽은 뒤 그의 아내인 에디트 스와네크가 그녀만이 아는 해럴드 가슴팍 흉터를 보고 시신을 거두는 장면, 호레이스 버넷(Horace Vernet)의 그림. [5]


1066년 성탄절,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사원에서 노르망디 공작 기욤이 영국의 왕 윌리엄 1세로 즉위했다. 그는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한 정복왕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잉글랜드 전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1066년, 영국의 역사는 방향을 바꿨다. 새 왕의 언어는 영어가 아니라 노르만 프랑스어였다.


윌리엄의 가신들은 색슨족의 땅을 차지했고 노르만족 주교들은 색슨족 주교들을 대신했다. 이로써 노르만족은 잉글랜드에 영원히 정착한다.


노르만족은 영국에 영원한 흔적을 남겼다. 그들은 성을 쌓고 거대한 대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전투가 벌어졌던 바로 그 장소에 윌리엄은 배틀 수도원(Battle Abbey)을 세웠다. 12세기 역사가들에 따르면, 윌리엄은 승리 후 대수도원을 설립하기로 맹세했다고 한다. 교회의 높은 제단은 해롤드가 죽은 자리에 마련된 것이다.


영국의 배틀 수도원(Battle Abbey) 모습과 이른바 해럴드 스톤(Harold Stone)이라 불리는 기념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가 죽은 지점을 일러주는 표지판. 위키피디아 사진.


1086년, 윌리엄의 신하들은 『돔스데이 북(Domesday Book)』[6]을 완성했다. 장부책에는 윌리엄이 영국에서 소유하고 있는 모든 부동산 목록이 열거되어 있다.


그의 이복형제인 오동도 자신의 흔적을 남겼는데, 그게 바로 영국의 재봉사들에게 태피스트리를 수놓으라고 명령해서 만든 길이가 70미터에 달하는 자수다. 이 자수가 바로 헤이스팅스 전투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열쇠인 셈이다. 노르만족이 그것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 했던 것처럼, 이 자수는 노르망디의 바이외 <자수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바이외 자수박물관.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1066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자료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 묘사된 장면들이 완전히 사실인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왜 그런고 하니 노르만족에 의해 의뢰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적인 앵글로 색슨족의 입장에서는 전혀 언급할 가치를 못 느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누가 만들었는지조차 아직까지 결론을 내리고 있지 못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이가 70미터에 달하는 세계에서 제일 긴 자수에 새겨진 정복왕 기욤(윌리엄)의 서사는 노르망디의 바이외 주교이자 기욤(윌리엄)의 이복형제인 오동의 의뢰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다.


기욤(윌리엄)의 이복동생인 오동. 그는 캔터베리 주교 시절 바이외 자수 박물관에 소장된 자수를 주문한 인물로 알려졌다.





[1] 피에르(Pierre), 「어느 누구를 위한 전쟁도 아닌 헤이스팅스 전투(La Bataille d’Hastings pour les nuls)」, French Moments, 영국에서 인용.


[2] 후스카를(고대 노르만어 : húskarl) 또는 허스칼(고대 영어 : huscarl, 영어 : housecarl). 하우스칼은 중세 스칸디나비아의 노예가 아닌 종복, 또는 귀족, 왕족들의 근위병을 지칭한다. 11세기 덴마크의 데인족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뒤, 잉글랜드에 살고 있던 앵글로 색슨인들에게도 이 제도가 생겼다. 이들은 대부분 정규군과 같은 대우를 받고, 정기적인 군사훈련을 받았다. 잉글랜드의 하우스칼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헤롤드 2세를 위해 싸운 하우스칼들로 유명하다.


[3] 위의 책.


[4] 피에르(Pierre), 「어느 누구를 위한 전쟁도 아닌 헤이스팅스 전투(La Bataille d’Hastings pour les nuls)」, French Moments, 영국에서 인용.


[5] 위의 책에서 인용.


[6] 돔스데이 북(Domesday Book)은 1086년에 완성된 영국의 각 지방에 속한 방대한 부동산과 주민 숫자를 비롯하여 여러 항목으로 작성된 연감인데, 정복왕 윌리엄을 위해 제작되었으며, 굳이 오늘날과 비교한다면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인구 조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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