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207화
[대문 사진] 센 마리팀 지역에 위치한 릴본느의 고대 로마 원형 극장 유적. [1]
노르망디 공국을 이끌던 기욤은 잉글랜드를 침공하려 했으나 큰 문제가 가로막고 있음을 깨달았다. 앵글로 색슨족을 무찌르고 그들의 땅을 평정하기 위해선 바다를 건너가야만 했던 것이다.
“우리는 모든 병사와 기사와 말을 실을 수 있을 만큼 큰 선단을 만들 것이다.”
바이외 자수박물관에 보관된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는 기욤 공작의 선단이 영국 해협을 건널 때의 상황을 생생히 전해준다.
잠시 논조를 바꿔 다른 역사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2]
겨울이 끝나갈 무렵, 기욤은 가신들을 릴본느(Lillebonne)에 모이도록 했다. 그러자 남작들이 전쟁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떨었다. 그때까지 기욤은 군 전열을 정비한 상태에서 적군과 대치한 전투를 단 한 차례도 치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륙작전을 감행할 때 따르는 엄청난 병력 손실 또한 어떻게 모면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남작들은 불안해했다. 가장 소심하고 겁 많은 기욤 휘츠 오스베흔은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
기욤 공작은 만약 전쟁에 승리한다면 부와 권력을 주겠노라 약속하며 이들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그는 가신들이 각자 담당할 병사와 선박의 숫자까지 제시하면서 그들의 역할까지 세세하게 명시했다. 로베르는 120척의 배를, 오동은 100척, 아브랑슈의 주교인 위그는 군선 60척, 몽고메리 또한 이에 상응하는 선박을 할당받았다. 가신들은 기욤이 요구한 숫자보다 갑절 많은 병사와 선박을 제공하겠노라고 적극 동참 의지를 표명하고 나섰다. 내내 회의적이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열광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침공이 결정되었다.
노르망디 인들은 전쟁에 성공할 만한 모든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기욤의 치하에 세워진 엄청난 수도원들은 이미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기마병과 기병대 역시 잘 훈련된 우수한 군인들로 채워졌다. 군마의 조달 역시 문제가 없었다. 공국 곳곳에서 혁신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종마사육장에서 잘 훈련된 말들을 조달하면 되었다.
이제 전쟁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건 없었다. 노르망디 인들은 신체적으로 키가 작고 몸집도 작았지만, 동작이 신속하고 빨랐다. 몸무게가 가볍다는 것은 선박의 적재량을 감안할 때 더 많은 병사가 탈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기욤은 그때까지 평상시 운영하는 군대가 없었다. 그는 가신들에게 40일 이내로 그들의 병사들을 보내도록 명령했다. 그는 정복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동안 가신들을 한 명씩 불러 정복전쟁에 따른 군신 계약을 체결해 나갔다.
원정 준비
하지가 되기 전에 선단을 디브(Dives) 만(灣)에 집결시켜야 했다. 공작은 가신들을 본느빌 성으로 불러 모았다. 원정 기간 동안 공국을 잘 다스리고 관리하려는 의도였다. 공국 한복판에 위치한 본느빌 성은 강 하구 깊숙이 자리한 투끄 포구와 가까웠고, 사냥감이 풍부한 지부아외즈 숲과도 근거리에 있었다. 본느빌 성은 공작이 몇 안 되는 애호하는 거처 가운데 하나였다.
기욤은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배우자 마틸드를 섭정으로 앉힌 뒤, 차례차례 호명했다. 공국의 국사를 담당할 최고 자문관은 원로이자 지혜로운 로제흐 드 보몽이, 세금 징수 관리와 재정은 공작의 시종장인 라울 드 탕꺄흐빌이, 그리고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기욤은 후계자로 로베르를 지명했다.
탕꺄흐빌 가문
로베르의 행정관이자 선단의 지휘를 맡은 라울 드 탕꺄흐빌은 노르망디 남작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공작은 고관대작들에 둘러싸인 형국이었다. 궁내부 대신, 원수(元帥), 재판관 그리고 시종장이 바로 그들이었다. 시종장은 공작의 궁정 내무대신을 담당하는 직책으로써, 궁정 전반에 관한 모든 업무를 도맡아했다.
그는 또한 왕세자를 보좌하고 아주 독특하게 공작의 특권을 바탕으로 한 징세담당관의 역할도 수행했다. 탕꺄흐빌 가문은 기욤 치하에서 노르망디 공국의 시종장 직위를 세습했다. 대대로 명예롭게 탕꺄흐빌 지역을 소유해 온 이 가문은 라울 때에 이르러 성 둘레에 장벽을 쌓고 탑을 건설하였다. 탕꺄흐빌 가문은 노르망디에 90개의 봉토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영국 정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라울의 아들 기욤 드 탕꺄흐빌은 기욤 공작의 맏아들인 로베르 꾸흐뜨외즈 공작의 시종장이 된다. 이 뿐만 아니라 그는 로베르의 형제인 앙리 보클레흐 국왕의 시종장이자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국정 자문을 담당하는 참사관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노르망디 대 함대
디브 만(灣)은 트로아흔에 이를 정도로 넓었다. 이 광대하고 사구(砂丘)에 의해 가려진 만은 배들이 은밀하고도 안전하게 접안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기욤은 군함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가신들이 보내준 배들로 선단을 꾸렸다. 그는 놀라우리만치 엄청난 규모의 대 함대를 꾸리기 위해 노르망디 각 지역에서 선박들을 징발하기도 했다.
유(Eu) 도성을 시작으로 헤네빌(Régnéville)에 이르기까지 모든 선박 제조소로부터 도끼와 톱 그리고 망치를 끌어 모았다. 이는 노련한 선박 제조공의 손을 거쳐 군함을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그들은 바이킹의 후손들이었기에 배를 만드는 데는 선천적으로 기술을 타고 난 사람들이었다.
또한 디브 만으로 힘센 말들을 이용해 떡갈나무 원목을 쉬지 않고 실어 날랐다. 길이가 20미터가 넘는 통나무도 수두룩했는데, 이는 돛대와 노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노르망디 인들이 만든 배는 속도가 빨랐다. 배 한 척당 노 젓는 사람은 15명에서 20명 안팎이었다. 1천 척의 배가 군선으로 개조되었다.
마틸드는 남편 기욤 공작과 함께 가장 멋진 선박의 건조를 지켜보았다. 모라(Mora)라 명명된 배에는 교황의 깃발이 내걸렸다. 어린 공작을 수행한 기욤 휘츠 오스번이 선단의 대원수로 임명되었다.
디브 만 인근의 바라빌 평원에서는 기마병들과 보병들이 훈련에 열중했다. 드디어 배에 승선할 시간이 다가왔다. 원정을 위해서는 적어도 4천 척의 배가 필요했다. 또한 마부들과 말편자 대장장이들도 함께 해야 했다. 말편자를 갈기 위해서는 10여 톤에 달하는 쇠가 필요했으며, 병사들이 매일 소비할 밀은 30톤에 달했고, 말먹이로 20톤이 넘는 보리가, 또한 상당량의 건초더미가 필요했다.
말이 마실 물은 하루에만 60에서 80리터에 달했다. 모든 병사들이 매일 마실 포도주와 물은 각각 300엑토리트르 이상이었다. 전쟁 무기들의 무게는 또한 어떠한가? 말들을 배에 싣는 일은 바이외의 자수가 보여주듯 아주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힝힝 소리를 내지르며 뒷걸음질 치는 말들을 채찍으로 몰아 배에 실은 뒤, 다시 서로 마주 보게 밀착시키는 일처럼 곤란한 경우도 없었다.
역사가들은 대 선단에 참가한 병력을 대략적으로 7천에서 8천 명의 병력과 2천 명의 기마부대가 승선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공작의 군대는 노르망디 병사들뿐만 아니라, 브르타뉴, 흘라망, 앙쥬, 아끼텐느, 그리고 프랑스 병사들로 편성되었다.
한편 잉글랜드의 해롤드는 소유하고 있던 80여 척의 배들을 방어용 선단으로 꾸려 영국 연안에 배치했다. 잘 정비된 배들이었기는 하나, 더 이상 군대를 유지할 자금을 확보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기욤은 이를 파악하고 있었고 오직 출발할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9월 8일, 군대 운영상의 실수로 영국의 색슨은 자신의 군대를 해산해야만 했다. 이때 기욤은 노르웨이와 토치그의 국왕이자, 해롤드에게 반기를 든 하랄드와 협의를 하였을까? 기욤의 노르망디 공국과 해롤드의 영국 사이에서 동시에 서로 다른 두 모습을 보인 하랄드의 처사는 영국에 치명적인 오점으로 작용했다.
11세기 노르망디 선박과 항구
기욤이 통치하던 시대에는 노르망디 인들의 배들 상당수가 바이킹들이 타고 다니던 작은 보트들과 거의 흡사했다. 이들은 공동으로 배를 만들고 관리했는데, 배의 길이와 맞먹는 통나무 쪽을 대고 만든 형태였다.
배의 양쪽 가장자리는 널빤지를 이어 붙이고, 쇠로 만든 리벳으로 조여 보트 뱃전이 겹쳐 포갠 형태로 이중 피복했다. 이런 배들은 물살에 쉽게 휘청거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래서 부둣가에 접안할 때마다 뒤집히곤 했다. 배들은 모두 단 하나의 돛대와 정사각형의 돛으로 움직였다. 키는 배 고물 오른쪽 가장자리에 자리 잡았다.
배들은 세 가지 형태였다. 전투를 벌일 때 사용하던 덩치가 큰 에쉬에즈(eschiez), 작고 밑이 움푹 파여 말들을 실을 수 있는 에스네끄(esnèque), 배 안이 제일 넓어 물자를 싣기에 적합한 케나르(kenar)로 분류되었다.
배 앞머리에 해당하는 이물엔 용 형상을 한 조각을 설치했는데, 상대적으로 가벼워서 바람만 제대로 불어준다면 충분히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밤엔 오직 별들만을 보고 항해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정사각형의 돛을 매단 관계로 배 바로 뒤나 옆에서 바람이 불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항구에서나 연안에서는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노르망디 인들은 연안을 이동할 때 특별한 재질을 타고 난 사람들이었다. 아마 이런 이유로 솜므 만을 출발한 기욤의 선단이 연안을 따라 생 발레리까지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시대의 노르망디 항구들은 배 밑이 닿을 정도로 물살이 얕은 지대에 위치했다. 대부분 모래톱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태반이었다. 캉이 그러했고, 위스트르암, 디에프, 훼깡, 루앙, 포흐앙브쌩 그리고 디브 등이 그러했다. 공작이자 국왕이었던 기욤의 선단이 출발하던 곳은 항상 바흐흘뢰흐였거나 훼깡이었고, 그들이 노르망디에 도착할 때는 대부분 투끄였다.
물론 배가 이동할 수 있도록 충분히 바람이 불어줘야만 했다. 정복자의 둘째 아들이었던 기욤 르후는 두 번이나 투끄에 도착했고, 다시 영국으로 가기 위해서 역시 투끄에서 배를 탔다. 노르망디에는 이처럼 바람이 불면 언제든지 배를 띄울 수 있고 접안할 수 있는 작은 항구들이 여럿 존재했다. [6]
[1] 센 마리팀 관광청 인터넷 홈페이지 릴본느(Lillebonne) 홍보용 사진.
[2] 여기서부터의 기술은 미셀 우흐께, 질르 피바흐, 장-프랑수아 세이에흐 이 세 사람이 펴낸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서, 정복왕 기욤>, 오렢 출판사, 파리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힌다.
[3] 위의 책에 수록된 사진.
[4] 같은 책에 수록된 사진.
[5] 같은 책에 수록된 사진.
[6] 위의 책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