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래된 타자기 Dec 16. 2024

1066년 대서양 바닷가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몽생미셸 가는 길 206화

[대문 사진] 1066년 기욤의 영국 정복 기념비 설치 장면을 다룬 삽화


1066년 대서양을 끼고 대치하던 기욤이 이끄는 노르망디 공국과 에드워드가 다스리던 영국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에드워드가 죽고 해럴드 베섹스가 집권하자마자 기욤은 무슨 이유로 영국을 정벌하고자 나섰을까? 그가 이끄는 대선단은 어떻게 바다를 건너 영국에 상륙했는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기욤이 마침내 같은 해 12월 25일 성탄절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영국 국왕 대관식을 거행한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 같은 물음은 11세기 노르망디 공국과 영국 사이의 긴장 관계가 발생시킨 노르망디 공국의 영국 정복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된다. 혹자는 “어느 누구의 승리도 아니었다”라고 평가하지만, 또 다른 역사학자들은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후계 다툼’이 야기한 끔찍스러운 전쟁이었다고 설명한다.


어찌 되었든 1066년에 프랑스 왕국과 대치하고 있던 노르망디 공국은 영국까지 정복하고 세력을 확장했을 뿐 아니라 두 왕국의 공동 번영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여기서 미리 언급해야 할 것은 영국이 일방적으로 피지배국가의 신세로 전락한 것이 아니란 점이다. 기욤(윌리엄)이 이끄는 노르망디 공국이 영국을 정복하고 나선 특별한 이유가 나름 있었던 셈이다.






1065년 런던의 성탄절은 여느 때와는 달리 우울했다. 영국의 늙은 왕인 고백왕 에드워드는 중병을 앓고 있었다. 더군다나 나라는 백척간두 외적의 위험에 직면해 있었다. 북쪽의 덴마크인과 프랑스의 노르만족은 모두 영국을 탐냈다. [1]


에드워드는 창문을 통해 웨스트민스터의 새 수도원을 완공하기 위해 인부들이 분주하게 오가며 작업에 매달리는 작업장 소음에 귀 기울였다. 그는 어렸을 적 노르망디에서 보았던 성당 건축 공사 현장을 떠올렸다.


사흘 지나면 이 거대한 건물은 완성되고 하느님의 영광과 성 베드로의 이름으로 봉헌될 것이다. 하지만 왕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의 길고 긴 삶의 기억이 잠결에 떠올랐다. 국왕은 노르망디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을 꿈꿨다. 덴마크 왕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의 왕좌를 차지했을 때 그가 도망친 곳이 바로 노르망디였다. 벌써 50년 전의 일이다! 에드워드는 그렇듯 노르망디에서 25년을 보냈다.


“내 인생의 절반.” 그는 잠결에 중얼거렸다. 그는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기억했다. 그들 중 한 명은 이제 강력한 노르망디 공작이 된 기욤(윌리엄)이었다.


“땅! 땅!” 석공들은 수도원의 돌 위에서 시끄럽게 일하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침상에서 꿈틀거렸다. “머지않아 내가 죽으면 저 새 수도원에서 새로운 왕이 즉위할 것이다.”라고 그는 생각했다.


새로운 왕은 누가 될 것인가? “나는 내 뒤를 이어 다스릴 자식이 없다. 그리고 꿈속에서 나는 영국이 불과 칼에 휩싸이는 것을 보았다!” 에드워드가 큰 소리로 외쳤다.


에드워드 왕은 신심이 투철했기에 ‘고백왕’이라 불렸다. 그는 대주교에 의해 시성된 최초의 영국 왕이었다. 그의 통치는 평화와 번영으로 특징지을 수 있을 만큼 평화로운 영국을 이끌어갔다.


그러나 1066년 1월 초가 되어 참회왕 에드워드가 사망하자 잉글랜드의 차기 왕은 불분명 해졌다. 에드워드에게는 불행히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후계자는 4명의 주요 후보자 중에서 선택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그들 각자에게는 차기 왕이 될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해럴드 고드윈슨이었다. 해럴드 고드윈슨은 1022년경 웨식스에서 태어났다. 웨식스의 고드윈 백작의 장남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고드윈의 아들’을 의미하는 고드윈슨이었다. 해럴드는 또한 참회왕 에드워드의 처남이기도 했다.


1053년 고드윈 백작이 사망한 후, 해럴드는 웨식스 백작이 되어 잉글랜드 남부의 대부분을 다스렸다. 국왕으로서 해럴드 2세는 1066년 1월 6일부터 같은 해 10월 15일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사망할 때까지 영국을 통치했다. 따라서 그의 죽음은 영국에 대한 앵글로 색슨족의 통치의 종말을 의미했다.


노르망디 공작 기욤(영국에서는 Duke William of Normandy라 불린다)은 에드워드가 자신을 후계자로 선택했다고 믿었다. 그는 또한 자신이 옛 왕과 먼 친척 관계였기 때문에 자신이 정당한 통치자라고 믿었다. 기욤의 고모인 엠마는 참회왕 에드워드의 어머니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들은 사촌 간이었다.


또한 기욤은 에드워드가 잉글랜드 귀족들에게 에드워드가 죽은 후 자신을 차기 왕으로 삼겠다고 약속했으며, 해럴드 고드윈슨이야말로 기욤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돕겠다고 약속한 장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늙은 왕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충직한 가신들은 국왕의 침대 가장자리에 서서 괴로워했다. 갑자기 늙은 왕이 눈을 뜨고 손을 내밀었다.


“해럴드 고드윈 슨, 웨식스 백작!” 국왕은 침대를 둘러싸고 임종을 지켜보는 신하들 중 한 명인 헤럴드의 손을 잡고는 말을 이어갔다. "내 아내 에디스의 형제여! 나는 그대를 나의 후계자로 임명한다. 내가 죽으면 그대는 왕이 될 것이다!”


당시 영국은 앵글로 색슨족이 거주하는 땅이었다. 고드윈의 아들인 해럴드 백작은 에드워드 왕 다음으로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앵글로 색슨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그의 형제들도 강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2월 28일 웨스트민스터 성당이 봉헌되었다. 그러나 왕은 너무 쇠약해진 탓에 침대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8일 후인 1066년 1월 5일 마침내 에드워드 국왕이 사망했다. 그리고 같은 달 16일 국왕은 웨스트민스터에 들어선 새 수도원에 묻혔다.


해럴드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재빨리 나라를 장악하고자 늙은 왕의 장례식이 있던 바로 그날, 웨스트민스터에서 치러진 대관식을 통하여 영국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왕은 죽었다. 내가 이제 영국의 왕이 된 것이다.” 헤럴드는 읊조렸다.


그는 왕관과 함께 엄청난 부가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영국은 부유한 나라였고 에드워드는 영국을 상당히 잘 다스렸다. 도시들은 번영하였고 땅은 비옥하였다. 이는 해럴드가 차기 왕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해럴드 2세는 왕좌에 자랑스럽게 앉았다. 신하들이 머리에 영국 국왕을 상징하는 왕관을 씌우고는 그에게 지구본과 왕홀을 건넸다.


바이외의 자수(刺繡 ) 속 해럴드 국왕.


“해럴드 국왕 만세!” 백성들은 환호했다.


이를 멀리 노르망디 공국에서 지켜보던 공작이 분노했다. 모두가 국왕 즉위를 축하할 분위기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영국 해협 건너편에 있는 노르망디에 있는 그의 성에서 기욤 공작은 좌불안석이었다. 해럴드 고드윈슨의 대관식 소식을 전하는 전령들이 막 도착한 참이어서 그는 끓어오르는 화를 억눌렀다.


“나야 말로 잉글랜드의 합법적인 왕이다. 에드워드는 나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고함을 질렀다.


이것이 사실일까? 에드워드는 해럴드에게 잉글랜드 왕좌를 넘겨주기 전에 기욤(윌리엄)에게 잉글랜드 왕좌를 약속했을까? 이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지만, 에드워드는 실제로 기욤과 노르망디 공국 간의 강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맹세는 헌신짝같이 버려졌다고 생각했기에 기욤 공작은 분노에 휩싸였다.


“해럴드의 배신자가 나와의 약속을 어겼다. 내가 그의 목숨을 구해줬는데도 말이다.”


사실 2년 전, 해럴드는 바다를 건너 노르망디에 도착했다. 그가 왜 노르망디에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곳에서 그는 기 드 퐁티외(Guy de Ponthieu)에게 붙잡혀 몸값을 요구당했다. 그때 기욤은 해럴드를 구했고, 그 대가로 해럴드는 기욤에게 약속하기를 앞으로 기욤의 충실한 후원자가 되겠다고 맹세했다. 훗날 해럴드는 맹세를 강요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와 같이 약속했을 뿐이라고 말을 바꿨다.


그러나 해럴드는 이제 잉글랜드의 국왕 자리에 올랐고, 기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세기에 제작된 바이외(Bayeux)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기욤 앞에서의 해럴드의 서약을 묘사한 귓돌 부조. [2]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 캉에 위치한 궁전에서 기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몇 번이고 고민했다. 마침내 공작은 “전쟁 회의를 즉각 소집하라! 가서 내 형제들을 데려오너라. 바이외의 로베르와 오동 주교, 이제야 말로 우리는 영국 정벌을 실행에 옮겨야만 한다.” [3]






[1] 여기서부터의 기술은 프랑스인 피에르(Pierre)가 영국에 살며 영국인을 위한 프랑스 역사를 소개하는 글을 지속적으로 인터넷상에 발표하고 있는데, 그가 쓴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었던 헤이스팅스 전투(La Bataille d’Hastings pour les nuls)」 (French Moment, 영국)에 관한 글을 인용한 것임을 밝힌다.


[2] “해럴드의 서약은 그 자신이 공식화한 이미 그곳에서 준비된 것이었다. (중략) 국왕이 죽자 기욤은 당연히 이를 승계하리라 생각했다. 모든 왕국들이 공작에 대항하고 나섰지만, 기욤은 영국 왕의 제위를 계승할 때까지 참고 기다렸다. 그리고 정반대로 그는 자신의 모든 왕국을 지켜나갔다.” - 중세 사가 브누아 드 생트 모흐의 연대기에서. 미셀 우흐께, 질르 피바흐, 장-프랑수아 세이에흐 공저 『정복왕 기욤』, 오렢 출판사, 파리.


[3] 피에르(Pierre), 「어느 누구를 위한 전쟁도 아닌 헤이스팅스 전투(La Bataille d’Hastings pour les nuls)」, French Moments, 영국 참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