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프로방스 10화
[대문 사진] 로라 스티븐스(Laura Stevens) / 르 피가로(Le Figaro)
여행지의 기억은 강한 흙냄새로 피어오른다. 어디를 가든 그 고유한 땅의 흙냄새가 있다. 프로방스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라방드(레벤더) 꽃 향기와 해바라기 그리고 사이프러스 나무가 서있는 풍경일 것이다. 뇌리에 고정된 것들도 좋지만 가끔 무릎 꿇고 땅에다 입맞춤하듯 흙냄새를 맡는 경우가 있다. 마치 고위 성직자가 비행기 트랩에서 내리자마자 땅바닥에 무릎 꿇고 얼굴을 숙여 바닥에 입맞춤하듯이. 냄새는 고장마다 다 다르다. 사람의 냄새 또한 사람마다 다르다. 흙냄새는 그렇듯 그 고장만의 원형이자 상징일 지도 모른다.
레 보 드 프로방스 성채는 흙냄새가 나지 않는 아주 특별한 장소요 공간이다. 석회암을 파내고 성채와 망루와 민간인들을 위한 집들을 지은 탓에 흙냄새가 나지 않는 유일한 곳이다. 외려 석회에 핀 강한 곰팡내가 후각을 찌른다. 이 특유의 냄새를 나는 이곳저곳에서 자주 맡았었다. 프로방스라 해서 특별할 것도 없다. 심지어 파리 오래된 아파트에서도 이 냄새가 난다. 썩은 곰팡내!
사라센 망루를 가까스로 올랐을 때도 냄새는 코 끝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망루 정상에 올라 드넓게 펼쳐진 프로방스 들판을 바라보니 빨리 내려가서 저 포도밭 길을 차로 달려가봐야겠다는 욕망이 앞섰다. 푸르고 비옥한 소박하면서도 정리가 잘 된 듯한 풍경에 매료된 내 욕심은 포도밭 길을 가로질러 한 화가가 수감되어 있던 정신병동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그곳에 가면 테라핀 냄새 대신 디디티(DDT) 냄새가 진동할까? 아니면 소독약 냄새가 온몸을 흔들어댈까?
이들은 포도주를 마시기 전 포도주 향부터 먼저 맡는다. 그런 다음 시음하듯 한 모금 입안에 머금고 천천히 목젖으로 넘기면서 향과 맛의 어우러짐을 느낀다. 우리네 막걸리는 시원한 맛으로 마시고 희석식 소주는 그 강한 톡 쏘는 맛과 향에 스트레스 모두를 날려 보내고자 작정하고 마시는 술이다. 점심때 마신 분홍빛 와인 로제(Rosé)는 맛과 향에 있어서 9월 가을로 접어드는 프로방스에서 마시기 딱 좋은 와인이다. 그 로제 와인의 빛과 향과 맛을 지닌 곳이 레 보 드 프로방스라 확언해도 괜찮을 듯싶다.
성채를 돌아본 뒤 로마네스크 시기에 지어진 한 작은 성당마저 내부까지 찬찬히 돌아보고 천천히 돌길을 걸어 내려온다. 아래쪽은 마을이 들어섰고 주민들이 사는 집채와 기념품 가게, 식당, 카페, 미술관, 기념관, 성당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마을에서 제일 눈에 띄는 유적은 창문이 날아간 채 돌로 제작한 창틀만 남은 <포스트 테네브라스 룩스(Post Tenebras Lux)>다.
원래 망빌 대 저택(Hôtel de Manville) 맞은편에는 브리송 페레 숙소(Logis de Brisson-Peyre)로 알려진 1571년에 지어진 큰 저택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칼뱅주의의 경구(警句)와도 같은 ‘어둠 후에는 빛이(Post Tenebras Lux) 1571’ 라는 글자가 새겨진 창문 잔해뿐이다. 개신교 신앙에 입각한 이러한 믿음에 찬 확증은 16세기에 개혁주의 예배가 실제 존재했음을 예증해 준다.
개신교도들은 보 남작(Baron des Baux)이 관용을 베푸는 덕에 신자수가 꽤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루이 13세의 오른팔이자 성직자이면서 정치가였던 리슐리외(Richelieu)가 이끄는 가톨릭 군대가 이 마을에 들이닥치면서 개신교도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에 바빴고 건물은 파괴되기에 이르렀고 이곳에서 개신교도들을 처벌하기 위해 창문만 남겨놓았다고 전해진다. 창문만 덜렁 남은 유적은 그처럼 구교와 신교 간의 투쟁의 실상이 어떠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살아있는 역사책이다.
쓸쓸한 풍경을 뒤로하고 마을 끝으로 걸어 나오면 <백인 참회자들의 성당(Chapelle des Pénitents Blancs)>이란 모호한 이름이 붙은 교회가 나온다. 레 보 드 프로방스의 시작을 알리는 계곡 안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 발롱 데 라 퐁텐(Vallon de la Fontaine)인데,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절벽 가장자리의 교회 광장(Place de l’Église)에 위치한 이 소성당은 17세기 중반 참회자들의 평신도 형제단에 의해 지어졌다. 이 역시 구교도와 신교도 간의 그칠 줄 모르는 싸움을 반증하는 예에 속한다.
성당은 사이프러스 나무로 그늘진 교회 광장에 들어섰고, 지하실에는 형제단 회원들의 시체가 보관되어 있었다 한다. 성당은 1937년 랑그도크(Langue d’Oc) 지방에서 활동하는 <형제애 협회> 회원들의 순수하고도 자발적인 참여와 조사로 폐허에서 발굴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참회하는 뜻에서 폐허 위에 성당을 지었는데, 레 보(Les Baux) 마을에서 만행을 저지른 참회자들을 기억하기 위하여 이들을 지켜보는 수호성인인 에스델 성녀에게 성당을 봉헌했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에스델은 몸매가 아름다웠을 뿐 아니라 용모도 단정하여 궁궐에 후궁으로 들어가 왕후에 오른 인물로 알려졌다. 성녀(聖女)는 페르시아에 사는 유태인들을 구한 인물로 종종 종교화(聖畵)에 등장하기도 한다.
소박한 돌로 장식된 기념비적인 교회 건축물 입구 정문 위에는 얕은 돋을새김이 눈에 띈다. 이는 돌에 새겨진 비문을 능가하는 두 명의 무릎을 꿇은 참회자를 묘사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이는 무릎 꿇어야 한다.
In nomine Jesus omne guenus flectatum.
성당 제단 뒤의 벽화는 1974년에 이브 브레이에흐(Yves Brayer)가 제작한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다. 내용은 프로방스 전통에서의 목자의 성탄절을 묘사한 그림이다. 프레스코화는 문화부 장관 모리스 드뤼옹과 당시 시장이었던 레이몽 튈리에의 요청에 따라 그려진 것으로 알려졌다.
교회 광장 한쪽 귀퉁이에 앉아 성당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나는 틀림없이 저 성당을 여행화첩에 담을 것이 분명하다. 웬고하니 내 맘속에 상처처럼 각인된 종교에 대한 불명확한 낯가림을 내 스스로 참회하는 방법은 오직 그뿐일 것이기에 저 백인들의 참회처럼 나 역시도 참회해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반문한다.
참회하는 자만이 저 성당 문턱을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든, 영성체 하기 위해서든, 아니면 내 스스로 묵상과 기도의 힘을 빌리고자 자연스레 무릎을 굻는 것이든, 어떤 상황에서든지 진정한 참회와 용서는 나와 또 다른 존재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소박한 믿음에 따른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해서 참회할 것이 없다는 말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이야기다. 알라의 쿠란(코란)도 인류 모두를 형제라 이름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참회하고 화해롭게 살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구교와 신교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참화를 겪은 이들에게 있어서 참회의 정도는 우리와 다를 것이지만, 우리 역시 종교란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타인에 대한 배타적 감정을 품고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참회한다. 그리고 고백한다. 나의 시기심과 질투심에 찬 ‘믿음’이란 이름으로 행사한 내 모든 ‘증오’를!
비로소 맘이 편안해진다. 이제는 화가가 1년여 동안 수감생활을 한 정신병동으로 향해야 할 때다. 2017년 9월 가을로 접어든 화사한 날에 아내가 막 차의 시동을 걸려는 내게 물병을 건넨다. 병째 입에 대고 한 모금 마시니 물이 ‘기적수’ 같기만 하다. 다음 행선지를 향한 출발이 산뜻해진다.
여행이 참으로 묘한 것이 떠날 때쯤 되면 지난 모든 기억은 사라지고 단지 앞으로 전개될 상황만 머릿속에 그려진다. 먼 훗날 이 글을 쓸 때쯤 레미니선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것도 여행 중에는 상황에 예민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아내와 지인의 목숨이 딸린 자동차 여행 중인데 하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