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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Jun 18. 2024

글쓰기의 속임수

프랑스 문학의 오늘 25화

『시간 나누기(L’Emploi du temps)』에서 뷔토르가 보여준 글쓰기의 혹독한 고통에 비견될만한 또 다른 지옥은 동시대의 작품 가운데에서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요컨대 『시간 나누기』에서의 글쓰기는 미궁 자체라 할 수 있는데 이 미궁은 안 밸레가 자크 르벨에게 준 500쪽에 달하는 백지에 해당하며, 아리아드네의 아주 가느다란 실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미로를 통하여 일기의 형태야말로 어느 것보다도 글쓰기의 표현을 용이하게 해주는 아리아드네의 실과도 같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와 같은 글쓰기를 통하여 우리 앞에 펼쳐지는 세계는 책과는 또 다른 세계일 수도 있다는 점에 자연 수긍하게 된다.


책 읽는 기쁨, 『아리아드네의 실』


필리프 솔레르스(Philippe Sollers)가 『공원(Le Parc)』(1961)에다가 뷔토르의 소설 『시간 나누기』의 첫 구절을 그대로 옮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러 빛깔을 띤 섬광들이 한꺼번에 폭발해 갔다.

“그녀는 객차의 좁은 통로에 서서 담배를 피워 문다. 차창 쪽으로 기댄 탓에 유리창에 거의 달라붙은 얼굴, 머리칼은 반대쪽으로 흘러내리고 그녀를 태운 기차는 갑자기 불빛들이 쏟아져 내리는 도시 근교의 이름 모를 부근에 정차한다. ”


필리프 솔레르스, 『공원』, 1961.


위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필리프 솔레르스가 보여준 글쓰기 수법은 결국 누보로망의 주제들을 자신의 소설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한 예만 들어보아도 솔레르스의 『공원』은 로브-그리예의 『질투』와 같이 3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있으며, 클로드 시몽의 『플랑드르로 가는 길』에서처럼 3개의 줄거리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공책 또한 미셸 뷔토르의 『시간 나누기』와 다를 바 없는 소설 그 자체를 비튼 경우에 해당한다.


더군다나 솔레르스의 『공원』에는 3장의 그림이 벽에 걸려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그림들은 소설에 필연적으로 등장해야만 하는 상징적 수수께끼가 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3장의 그림 가운데 세 번째에 해당하는 그림에는 3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의 배후에 펼쳐진 풍경 속에는 “마치 무슨 일인가가 곧 벌어질 것만 같은,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수수께끼와도 같이 아주 모호한 무슨 일인가가 꾸며지고 있는 듯한 어항의 부둣가가 펼쳐져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변형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한 그림에 해당한다. 책 속에 단지 희미한 신화적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세 여신을 묘사한 그림은 갑자기 현신하는 존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주로 이야기를 변조해 가는 도구로 사용되는데, 소설 전편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는 화자의 몽상은 바로 그와 같은 변조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소설 속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는 화자가 사는 어둠침침한 빛에 갇힌 아파트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화자 자신과 그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모호한 상태 속에 자리한 그림 속 인물들과 묘하게 겹쳐진다. 또한 이 세 사람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인물들이며, 곧 윤곽이 드러나게 될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에 해당한다.


“그녀가 사랑에 빠졌는지, 아니면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이야기 한 토막, 도피 중인 세 인물, 동양에서 치러지고 있는 전쟁의 여운, 종말을 앞둔 채 명상에 빠진…금치산 선고를 받은 이 말 없는 여인은 어떤 사람인가? 삶이 위험에 처한 젊은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방 안에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자와 파멸의 갓길에서 토해지는 이 고백은.”


이야기는 ‘실제’ 인물들을 소설 속에 끌어들여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일 수 있다. 다시 말해 『공원』의 화자는 자신의 방 안에서 관찰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는 “저만큼 가죽소파에” 앉아있는 남자와 그 곁에 빨간색 옷을 걸친 여자가 나오는 『질투(La Jalousie)』(1959) 속의 엿보는 이와 같다.


알랭 로브-그리예, 『질투』, 영문판.


그러나 우리가 이 부분에서 의아해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첫째, 화자와 여인의 결합은 무슨 이유로 그들 사이의 붉은빛에 의해 채워지지 않았을까? 즉, 공모의 표지로써, 또한 남몰래 서로 밀통하는 은밀한 만남의 표지로써 말이다. 둘째, 또 다른 한 사람은 무엇 때문에 극장의 다른 한쪽 높은 곳에서 이 두 사람을 관찰하지 않았을까? 셋째, 제3의 사나이는 무슨 이유로 돌연한 죽음을 약속했으면서도 모험을 즐기지 않았던 것일까?


이러한 의문들에 비추어 볼 때, 『공원』에 교묘하게 자리 잡은 표지들은 또 하나의 허구가 만들어 낸 이야기가 이 소설과 같은 맥락 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다시 말해, 이 또 다른 허구가 만들어 낸 이야기는 “10명으로 조직된 특공대가 밀림으로 뒤덮인 산속에 투하되어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자연과 싸우면서도 끝까지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상황을 다룬” 영화일 수 있으며, 가판대에서 파는 신문의 한 면을 장식한 사진 한 장을 통해 곧 사형당할 다른 9명의 군인들에 둘러싸인 채 뜨거운 태양 아래 맨머리를 드러낸 한 사내의 얼굴임을 짐작할 수 있듯이 소설 속에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다.



모험은 그 자체로써 다양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책은 이러한 가능성 가운데 한 요소라 할 수 있는 음모의 관점에서 파악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소설 속의 소설, 즉 공책이 그 자체에 의해 여백이 채워진다는 인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 공책은 화자의 아파트에 걸려있는 거울에 비친 또 다른 거울에 해당하며, 이 거울은 또 다른 음모와는 무관하게 사진기 구실을 한다.


“책이 그것도 재빠르게 저절로 씌어진다는 생각이 들면서, 내 가벼운 나들이에 관한 이야기와 별 대수롭지 않으면서 눈에 띄지도 않는 이야기가 증가함에 따라 거리를 두고 멀리에서 조종되는 그 실체를 곧 되찾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녹음재생장치와도 같은 책은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에 나오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연상시키는 두려움마저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공책과도 같은 노트를 없애버리려는, 찢어버리려는, 더군다나 찻길 양옆의 배수구에 던져버리고 싶은, 하수도에 처넣고 싶은, 아니 너무도 간단하게 순서를 모조리 뒤바꿔버리고 싶은 유혹이 여러 차례에 걸쳐 되풀이된다. 그러나 이 공책은 아마도 그 자체로써 다시 발견될 성질의 것임은 분명하다. 왜냐면 다른 모든 누보로망의 소설들이 시간의 순서를 무너뜨리고 논리적인 요소들(les membra disjecta)을 서로 분산시키는 것을 준수하고 있듯이 『공원』 역시도 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 속에는 아이가 등장하기까지 한다. 화자 스스로 ‘나’이면서 동시에 ‘그가’ 되고 ‘아이’가 된다. 다른 존재로 분열해 가는 화자가 모험을 즐기는 이로 등장하는 이야기는 아이가 읽는 책 속의 세계에 대한 놀이거나 몽상이나 유희의 연장으로 해석된다. 이런 점에서 공책은 초등학생의 공책과 연결되며, 책은 글 읽기를 배우는 아이의 책과 묘하게 겹쳐진다. 시간과 순간의 모든 조화 속에 펼쳐지는 것은 그럼으로써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표현대로 “수없이 다양한 얼굴, 그러면서도 동일한 얼굴들은 그들의 수없이 많은, 분간하기 어려운 다양함들을 일컫는 것”이란 표현에서 비롯한 ‘관불처럼 무성한 인물의 정체성’일 것이다.


이미 그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공원은 소설 속에서 중요한 모티프로 자리 잡고 있다. 공책 역시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백지들과 책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가운데 출발한 글쓰기 공책은 다음과 같은 마지막 문장으로 마지막 장이 다할 때까지 이 소설에서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한다.


“오렌지색 표지를 두른 공책은 참으로 끈질기게 채워져 나갔다. 첫 쪽에서부터, 한 줄로, 마지막 구두점에 이르기까지 매번 낡은 만년필과 기계적으로 찍어대는 검푸른 잉크에 흠씬 젖어든 채로 규칙적인 글쓰기는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때로는 가까워지다가도 때로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또 때로는 위협적인 것이 되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구원처럼 이어지는 글쓰기, 즉 공책은 늘 존재(l’existence)에 대한 탐사의 도구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주체(le corps)에 대한 탐사의 도구이기도 했으며, 또한 변모하는 모든 것들을 위한 도구이면서 그 모든 모순들을 솔직히 예시해 주는 수단이었다. 그럼으로써 공책은 마침내 완전한 파멸을 피해 갈 수 있게 된다.


“공책을 집어던진 연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아무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이 비어있는 여백은 그대로 보존된 상태로 남아있지는 않을 것이기에 차라리 비어있는 여백은 아주 천천히 유폐당할 것이며, 스스로 응결되었다가 다시 부풀어 오르는 아주 단순하고도 기이한 이미지들로 가득 찰 것이다. 한계와 죽음 사이 생각에 빠져들고 마는 백지의 형태로 또다시 모습을 바꿀 것이 분명하기에.”


그 자신 소설가이자 누보로망의 비평가이기도 한 장 리까르두(Jean Ricardou)가 60년대에 창안해 낸 누보로망(Nouveau Roman)이라는 신조어는 불행하게도 이후로 발표한 그의 작품들로 말미암아 그 빛이 퇴색하기는 하였지만, 솔레르스의 멋진 책을 한마디로 요약해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장 리까르두, 『누보로망』


장 리까르두는 누보로망이라는 신조어를 통해 오렌지색 표지로 장정된 공책을 지칭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열린 페이지들로부터 “창조적인 독서에 대한 완벽한 기능을 전제로 한 닮은 꼴들(Simulacres)을 보여주는, 아주 단순하고도 단편적인 현상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의도한 것이었다.


장 리까르두의 이 같은 섬세한 분석은 여기에서까지 굳이 상세하게 인용할 필요는 없겠지만, 한마디로 말해 누보로망에서 시도된 바가 다름 아닌 책이 그 자체로 보여주고자 한 또 다른 책에 대한 이미저리를 이미 넘어섰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의 견해에 따르자면, 누보로망은 시빗거리나 제공하는 전무후무한 유일한 형태는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누보로망이 독자들로부터 독서의 즐거움을 빼앗아버린 소설 유형이라는 판단 역시 온당하다. 만일 누보로망이 어떤 일말의 개연성을 지닌 허구적 글쓰기의 한 표현임을 표명하지만 않았어도 이러한 독서의 즐거움을 빼앗는 행위야말로 지극히 잘못된 지성주의에서 비롯되었으며, 누보로망이야말로 그 빗나간 지성주의가 낳은 사생아라는 오해는 사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클로드 시몽에게 이제까지 이루어진 평가와는 결이 다른 것이다. 다른 누보로망의 기수들과는 다르게 클로드 시몽은 작품을 통한 인간적인 책임을 도외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작가적 태도에 의문을 품을 여지마저 없다는 점에서 그가 발표한 작품들은 온전히 감동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별궁(Le Palace)』(1962)은 스튜아르 시케스(Stuart Sykes)의 말을 빌건대, “이야기와 묘사 간의 그칠 줄 모르는 싸움, 텍스트가 극화한 전무후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작품에 해당하며, 『이야기(Histoire)』(1967)는 하루 동안에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조이스의 소설에서 빌려온 형태로써 “문학 언어(le langage littéraire)에 대한 탐구가 닻을 내리기” 위한 계기로 작용하는 작품에 해당한다.


클로드 시몽, 『별궁』과 『이야기』


결국 누보로망은 독서의 되풀이 형태를 남용한 것은 아닌지, 혹은 모험으로(빛을 발하는) 글쓰기를 희생시켜가면서까지 ‘글쓰기의 모험’을 감행하려는 지나친 의도(장 리까르두가 누보로망에 대해 내린 판단에 딱 들어맞는 형태로써)를 표출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누보로망이야말로 거울의 유희에 만족했던 문학 형태라 말해야 온당할 것이다. 예를 들어 조르주 뷔흐통(George Burton)의 추리소설을 비롯하여 미셸 뷔토르(Michel Butor)의 『시간 나누기』에서 벌어지는 ‘블레스톤에서의 살인’, 로브-그리예의 『질투』 같은 식민지 소설 등 모두가 ‘액자 소설화(mis en abyme)’의 경향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미셸 뷔토르, 『시간 나누기』


여기에 한 작품을 더한다면 클로드 시몽의 『전원시』라 할 수 있는데, 다음의 인용문에서 보듯 다른 한쪽이 닫히지 않은 채로 열려있는 둥근 괄호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 역시 액자 소설의 한 유형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클로드 시몽, 『전원시』


“한두 시간이 더 흐른 뒤에 그는 기병대장과 부관참모의 뒤를 따라 다른 한 명의 기병 요원과 함께 말을 타고 간다. (그는 그 사이에 전개된 사물들의 양상과 상황들을 소설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러한 구문 역시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액자 소설화’란 ‘파이 위에 크림 얹히기’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무수히 많은 작가가 이를 되풀이하고 있으며, 또한 적어도 그렇게 하고자 진력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뤼시앙 달랑바흐(Lucien Dälenbach)를 언급해도 좋을 것이다.


뤼시앙 달랑바흐, 『거꾸로 씌어진 이야기』, 1977.


그는 액자 소설이란 어렵고도 심난한 문제에 대해 아주 고전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반사 문학(littérature spéculaire)에 대한 폭넓은 예들을 취하고 있는 그의 저술(『거꾸로 씌어진 이야기(Le Récit spéculaire)』, 1977)을 통해, 누보로망 계열의 작품(『시간 나누기』, 『질투』, 『풀』)과 ‘누보 누보로망’ 계열의 작품(뷔토르의 『어디(Où)』, 리까르두의 『별명을 가진 장소들(Les Lieux-dits)』, 로브-그리예의 『뉴욕에서의 혁명을 위한 계획(Projet pour une révolution)』, 클로드 시몽의 『세 폭 수첩(Triptyque)』)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액자 소설화의 경향은 ‘앙드레 지드 가문’으로부터 이어진 연속성임을 적절하게 묘파하고 있다.


누보 누보로망 계열에 속하는 클로드 시몽의 『세 폭 수첩』, 미셸 뷔토르의 『어디』, 로브-그리예의 『뉴욕에서의 혁명을 위한 계획』, 리까르두의 『별명을 가진 장소들』.


뤼시앙 달랑바흐의 판단에 따르면, 누보로망이 획득한 것으로 알려진 소설의 독창성조차도 이미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지드의 『사전(私錢)꾼(Les Faux–Monnayeurs)』이나 『나르시스 론(Traité du Narcisse)』 저 멀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의 계보 속에 안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앙드레 지드, 『사전꾼』


달랑바흐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프랑스 문학이 어떻게 해서 “서구의 훌륭한 전통의 지배 하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제일의 누보로망조차도 이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던 재현적 사고와의 단절을 꾀하는 작품 목록”으로 풀이되는 ‘개화-소멸(épanouissement – évanouissement)’의 선상에 위치해 있었는지를 예증해 보여준다.


결국 그의 말을 종합해 보건대, 새로운 전위 문학이란 것 역시 늘 이미 전위(아방가르드)라는 말이 지닌 섬광조차 상실하기에 이른 기존의 전위 문학과 자리를 교대해 왔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것과 기존의 것 간의 자리바꿈은 과거의 새로운 전통으로부터 현재 시점에서 거론되는 또 다른 새로운 전통과의 교체 현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교체는 기존의 문학 작품으로부터 새로운 경향만을 답습하려는 아류(des épigones)와 그들에 의해 새롭게 굳어지고 있는 문학의 새로운 경향으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전통조차도 기존의 전통의 새로움 속에 뿌리를 둔 또 하나의 전통에 불과할 따름이라는 것이 그가 내린 판단이다. 이러한 기존의 것에 대한 추종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옥타비오 파즈(Octavio Paz)의 전위에 관한 예지적인 명상들로 되돌아가게 만든다. 즉, 근대라 부르던 시기들은 항상 변화를 촉발시켜 왔으며, 이러한 변화에 기초해 있었다는 사실에 이르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있어서 새로움을 지향하던 변화의 요소들마저도 결국 자체의 본원적인 것들에 매달려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 요컨대 우리가 누보로망이라든가 전위 문학이란 이름으로 거론하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적어도 새로운 것을 지향하려는 모든 문학 작품들에 대해 다시 결론을 내리자면, 이러한 작품들은 항상 모험적 양상을 구축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 어떤 특별한 문학적 전통을 수립하기 위해 허구라는 특별한 전통만을 고집할 수만은 없었다는 점을 마저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신화 역시도 단지 반인 반어의 요정들의 이야기에 국한하지 않으며, 테세우스의 이야기로 그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신화는 글쓰기가 만들어낸 그 무엇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스핑크스는 새로운 테베(이집트 나일강 중류에 위치한 기원전 도시. 고대 중왕국 시대 이래로 수도가 된 곳으로써 신왕국(서기 18-19) 왕조에 이르러 최전성기를 구가함. 카르낙과 룩소르의 신전과 분묘 등 인류 문명사상 기념비적인 역사 유적을 자랑한다) – 또는 또 다른 테베라 할 수 있는 테바이드(수만의 기독교도들이 크네이우스의 박해를 피해 모여들기 시작한 이집트 북부의 사막지대. 라신의 비극 무대이기도 하다)의 문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우리에게 또 다른 수수께끼를 던지지도 않는다. 스핑크스 역시 이 세상과 함께 늙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제 글쓰기에서 발생하는 이야기들은 어디로부터 기인하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클로드 시몽의 글쓰기의 유희 속으로 – 그의 이야기들을 대충 짐작해 가면서, 그야말로 이야기를 다루는데 가장 능숙한 인물이라 생각하면서 – 진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어떤 빛에 이끌리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장님의 오리온(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보이오티아의 거인 사냥꾼 아르테미스에게 살해되었다고도 하고, 플레이야테스를 쫓아서 함께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고도 하는 신화 속 영웅)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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