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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Jun 21. 2024

논쟁의 불씨가 된 공쿠르 상 수상작

프랑스 문학의 오늘 26화

[대문 사진] 마르그리트 뒤라스


1984년 공쿠르 상이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가 쓴 『정인(L’Amant)』에게 돌아가자 프랑스 문학계는 충격과 흥분의 도가니 속에 들끓었다. 논쟁의 불씨가 된 공쿠르 수상위원회의 이 같은 결정은 상을 수상한 사람이 나이로 보나 문학적 명성으로 보나 이미 프랑스 문학계의 원로라 할 만한 작가였기에 분명 이제까지의 관례를 벗어났다는 점에서 문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1984년 공쿠르 상 수상작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정인』.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정인』은 뒤라스가 이전에 발표한 『태평양의 방벽(Un Barrage contre le Pacifique)』(1950)의 재판에 불과하며, 같은 시기에 미우-미우(Miou-Miou)와 사미 프레(Sami Frey)에 의해 무대에 올려진 「뮤지카 2(La Musica II)」(1985), 그리고 역시 이전에 발표한 「뮤지카(La Musica)」(1965)에서 극적인 요소만을 발췌하여 다시 새롭게 각색한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난 또한 거세어졌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태평양의 방벽』, 1950.


비난의 대상이 된 두 작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줄거리를 지닌 것 이상으로 오직 작가 자신의 과거만을 쫓는 유일한 흐름에 기반한 서로 연속성을 띤 작품에 속했다. 이러한 사실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정인』에서 이미 이전에 자신이 펴낸 『태평양의 방벽』에서 털어놓았던 그녀의 과거를 단 한차례도 부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선명히 확인된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모친이 구입한 양도물에 얽힌 불행한 과거로 끊임없이 되돌아가면서 어떤 일말의 가능성을 지닌 구원조차 없는 끈적끈적하고도 긴 절망의 대해(大海) 속으로 한없이 침잠해 간다.


“시간은 점점 길게만 느껴졌다. 벌써 칠 년이란 세월이 흘러가버렸다. 우리가 그곳에 산 지 십 년째 되는 해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12년, 다시 13년, 14년, 15년, 또다시 16년, 17년.


그 긴 세월 동안 우리에게 존재했던 시간은 단 7년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기대는 허물어지고 말았다. 기대는 버려진 것이기도 했다. 세월의 망망대해 속에서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던 모든 시도들 또한 단념된 채로 버려졌다. 이제 우리는 단지 베란다의 그늘 속에 앉아 시암산 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 긴 그림자를 드리운 산은 칠흑에 가깝다. 갇힌 바다는 마침내 조용해진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처럼 우리 역시도 실의에 빠져든다.”


이러한 불행한 이야기가 ‘콘라드 풍’의 소설(일명 조셉이라 불리는 폴란드 태생의 영국 작가인 콘라드(Konrad)가 즐겨 쓴 모험 소설을 가리킨다)이나 영화의 줄거리에 기초해 있다기보다는 비가(悲歌)의 음조(lamento)를 띤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모음 중복(Ça a)은 단지 긴 탄식을 이루는 모음에 국한하고 있으며, 문법상으로 과거시제는 도대체 이런 형태가 존재하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과거-현재형으로 옮아간다(“Ça a duré” […] “Ça duré”). 자동사 또한 타동사로 바뀌고 있으며, 따라서 의미는 수동태로 전환하고 있다. 이는 소설이 지닌 음조, 즉 수동적이고도 무기력한 상태가 작품 속에 끊임없이 환기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마침내 기대는 허물어지고 말았다(Et puis enfin l’espoire a été renoncé).”


더군다나 위 인용문에서는 구문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단지 변하지 않는 시간, 그러면서도 거의 미미할 정도로 조금씩 변화해 가는 시간의 연도(蓮禱, la litanie)를 읊조리는 서로 병치된 짧은 문장들만이 병렬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음조는 애수를 띤 느린 것(moderato)이라기보다는 고통에 찬 조금 느리게(cantabile)에 가깝다.


『고통(La Douleur)』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1985년에 발표한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그녀가 이제까지 우리에게 들려주었던 그녀 자신의 이야기와는 또 다른 자서전적 일화들을 담은 작품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소설은 『인간 부류(L’Espèces humaine)』(1947)란 충격적이면서 끔찍한 증언을 다룬, 작가이기도 한 그녀의 남편 로베르 앙텔므(Robert Antelme)가 포로수용소에서 돌아온 순간을 다룬 흥미로운 작품이다.


만년의 황혼 빛에 젖어가던 그녀로서는 단순한 허구는 이제 더 이상 흥미롭지 않았을뿐더러 거짓으로 지어낸 이야기조차 전혀 흥미를 느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따라서 그녀는 이제까지 해오던 이야기 방식을 느닷없이 멈추고는 “내 어린 시절을 다룬 작품들,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 속에서 갑자기 나는 내 스스로가 밝히기를 꺼려했던 속내와 내가 늘어놓았던 사연들이 어떤 이야기인조차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라고 심경을 토로하기에 이른다.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포로수용소에서 돌아온 남편 로베르 앙텔므가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고 기록해간 『인간 부류』를 바탕으로 써 내려간 소설 『고통』.


하지만 이러한 그녀의 고백이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것이 이미 여러 차례 자신의 작품 속에서 가족사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과 관련하여 스스로 애증에 찬 분노심을 표출하지 않았던가? 그녀의 오빠는 항상 돈을 필요로 했고, 그녀의 남동생(『태평양의 방벽』에 나오는 조셉)은 1942년 갑자기 요절함으로써 도저히 믿기지 않는 충격 속에 빠지게 하였을 뿐 아니라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긴 탄식에 젖어들게 만들었다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녀 자신에 국한해 보더라도 그녀가 열다섯 하고 반이었을 때, 파리로부터 돌아온 숄랑의 부유한 중국인,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유럽 백인 여자와의 혼사를 허락하지 않던 부친의 강권으로 말미암아 심정의 갈등을 겪는 동양 남자와의 첫사랑을 계속 숨겨왔다는 이야기인가?


그렇지 않다. 그녀가 자신의 모든 과거를 비밀에 부쳤다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이란 작품, 즉 일련의 허구라는 틀 속에 조금씩 부어 넣음으로써 실제 이야기들을 약간씩 변조해 갔을 따름이다. 예를 들면, 그녀의 모친을 비롯하여 오빠와 남동생은 『태평양의 방벽』에 등장하고, 동양인이었던 그녀의 정인(情人)은 이미 1960년에 영화로 제작된 『히로시마 내 사랑(Hiroshima mon amour)』에 등장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정인>과 <히로시마 내 사랑>.


뒤라스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실제 이야기들에 대한 일종의 교차 현상 역시 그녀의 작품 속에 자리 잡고 있음은 물론 ‘남동생’의 죽음이라는 전조로 이어졌던 울부짖음은 『히로시마 내 사랑』에 와서 죽은 연인에 대한 울부짖음, 즉 네베르에서의 머리를 짧게 자른 프랑스 처녀의 울부짖음으로 뒤바뀐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히로시마 내 사랑』


『정인』에 오면 이러한 모든 멜로드라마적 요소들은 자취를 감춘다. 이 소설에서 한 젊은 프랑스 여자를 사랑했던 숄랑이란 중국인 남자는 그녀와 헤어진 뒤, 다시 말해 그 백인 처녀가 유럽으로 떠난 후에(이 떠남은 그녀가 원하던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녀의 정인의 완고하기 이를 데 없는 부친이 원하던 바이기도 했다) 어느 중국인 처녀와 결혼하기에 이르렀고, 그 둘 사이에는 아이가 한 명 태어난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파리에 들르게 된 중국인 남자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예전과 같이 지금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전하며,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라고 하면서 “죽는 날까지” 그녀를 “사랑할 것”이라는 속내를 털어놓는다.


죽음에 관한 이러한 여러 다양한 역설들(paradoxes)은 단순함을 가장한 텍스트로부터 조차 자유롭다. 그 가운데 하나가 ‘남동생’의 죽음에 관한, 그 어린 남동생이 표현하고자 했던 스캔들만큼이나 참을 수 없는 긴장감으로부터 발생한 모순 어법(oxymoron)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모순 어법을 통해 그녀는 장장 한 페이지에 걸쳐 다음과 같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착각이었다. 단 몇 분 만에 우주를 거머쥐려 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스캔들은 신에게나 어울리는 일이었다. 내 어린 남동생은 절대 죽지 않을 존재였고 사람들이 단지 그 아이를 보지 못할 뿐이라는 착각. 내 어린 남동생의 몸뚱어리는 그처럼 불사조의 몸이었기에 아이 역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존재이어야 마땅했지만, 우리는 아이의 몸속에 불사조가 깃들어있는지 어떤지를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내 어린 동생의 시신은 점차 온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아이가 죽지 않는다는 믿음도 아이의 몸뚱어리와 함께 사라져 갔다. […] 이 사실을 사람들께 알려야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불멸 역시도 사라지는 법이며, 내 동생의 경우와 같이 앞으로 발생할 어떠한 경우이건 간에 인간의 몸이 불멸한다는 믿음도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어야만 했다.”


또 하나의 역설은 사라진 사랑의 불멸(l’immortalité)에 관한 것인데, 작품을 완성하고 있는 이 역설은 라신의 비극 『베레니스(Bérénice)』의 결말을 두고 우리가 감정을 가라앉힐 때 사용하는 말로 잠재우기(l’apaisement)라 부르는 의미에서 동요를 가라앉히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수에토니우스(로마의 전기 작가)의 너무도 유명한 다음과 같은 정언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invitus invitam dimisit. “그로 인하여, 그녀 때문에, 그는 그녀를 떠나보냈다.”


그러나 젊은 여자는 떠나고자 원하였을 뿐이다. 그녀는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비로소 기쁨에 바들바들 떨던 육체에 가려진 사랑의 심연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야말로 그에게 사랑의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 어떤 삶의 시간과도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마저 깨달았다.


그렇기에 그녀에게는 오직 글 쓰는 고통만이 값진 일이었다. 또한 거기에는 마르그리트 뒤라스를 중상모략하려는 사람들과 그들의 이미 균형을 잃어버린 비난이 존재할 필요마저 있었다.


예를 들어 그녀 자신의 알코올 중독을 토로한 「생략 부호들(Apostrophes)」이란 방송 프로그램에 출현한 이후로 작품의 상업적 성공은 작가가 청중들 앞에서 자신에 관해 토로함으로써 발생한 것이었을 따름이라는 비난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비록 『정인』의 상업적 성공이 그처럼 엄청난 판매 부수(책이 출판된 당해에만 칠십만 부가 팔려나간)에 따른 것이었다 할지라도 이는 단지 작가 자신의 직접적인 고백을 문학 작품 속에 도입한 결과는 아니었으며, 「생략 부호들」이란 프로그램이나 다른 프로그램에 겹치기 출현하면서 얻은 반사이익도 아니었고, 공쿠르 상 수상 덕분은 더더욱 아니었고, 독자들에게 신중하게 그녀 자신을 지속적으로 알린 광고의 부산물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와 같은 성공은 그녀의 책이 읽기 쉬워서도 아니었거니와 누보로망 기법보다는 단순한 형식을 고집한 결과도 아니었고, 오늘날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유행(예를 들어 제1의 인물과 제3의 인물을 교대로 등장시키는 작중 인물의 교체 수법)을 그대로 답습한 결과도 아니었다.


『정인』의 성공은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리무진을 타고 여행하는 장면이나 상가와 돈다발을 등장시킬 정도로 어마 무시한 영화 제작상의 기획, 또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이루어지는 장면 바뀜(flash-back) 등 동시에 많은 것을 떠오르게 해주는 시퀀스 상의 각 주요 장면 때문만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들은 단지 ‘사물들의 언저리’에서 맴도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 가까이에로’ 다가가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의 소설들은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나 “쓴다는 것 자체는 드러내는 행위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와는 분명 다른 차원의 것일 수밖에 없었다. 달리 이야기하자면, 폐기된 과거로부터 탁월한 심상들과 어휘들을 건져 올린 그녀의 소설들은 존재할 이유 때문이 아니라 존재했던 까닭으로 전율하는 떨림(un frémissement)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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