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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도끼

프랑스 문학의 오늘 43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아우슈비츠


이브 본느파의 저술 활동을 일별해 보면, 시와 에세이에 관한 다양한 저술들에도 불구하고 그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정황을 극히 미미하게 다루고 있음에 적잖이 놀라게 된다. 이러한 당혹감은 본느파가 휠더린과 같이 전쟁의 참상의 순간들 속에서 시인들이 직면한 상황의 문제를 제기하거나 이를 인용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는 점에서 더욱 증폭한다.


본느파가 첫 시집 『두브의 유동과 부동에 대하여(Du mouvement et de l’immobilité de Douve)』를 발표한 1953년의 상황만을 보더라도 그는 이미 시에 있어서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브 본느파 시집 『두브의 유동과 부동에 대하여』, 문고판, 갈리마르.


그러나 이 시기에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는 『문화 사회 비평(Critique de la culture et société)』(1949)이란 주목할 만한 글을 발표하고 있으며, 1953년에 이르러서는 이를 다시 『프리즘(Prismes/Prismen)』이란 한 권의 책자로 재 간행하고 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프리즘(Prismes/Prismen)』.


아도르노의 대표적 저술로 평가되고 있는 이 글만 보더라도 아도르노는 독일 나치 강제 수용소의 끔찍한 참상을 목격한 이후로 더욱 글쓰기의 허구성에 관한 문제에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문화 사회 비평』에서 표명하기를, “아우슈비츠가 존재하는 한 시를 쓴다는 것은 미친 짓에 불과하며, 이와 같은 인식은 또한 오늘날 시로써 무엇을 노래한다는 것 자체가 이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이유로 작용한다”고 결론짓는다.


셀랑은 이와 같은 기술체의 불가능성을 뛰어넘어 글쓰기가 직면한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와 언어는 물론이고, 독일어에 저항하여 독일어로 시를 쓴 유일한 시인에 해당했다.


이와는 달리 본느파는 동시대의 대부분의 시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시적인 언어로 시를 지었으며, 시 자체를 위해 시를 쓴 시인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혼미한 세계의 소용돌이 바깥에 위치한 상태에서 시를 쓴 것일 뿐, 그와 같은 소용돌이를 자신의 시적 주제로 삼고 싶은 어떠한 의도도 없었던 것이다.


설령 본느파에게 전쟁의 참상과도 같은 현실 세계에 직면한 문제를 표명할 기회가 주어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품 활동의 바깥 영역에서 이루어진 가외적인 일에 불과했으며, 그것도 극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1994년 7월 7일 자 <르 몽드> 지에서 저널리스트 파트릭 케쉬쉬앙과의 대담을 통해 밝힌 그의 문학관은 이를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즉, 그는 “글을 쓸 때조차 어떻게 하면 정신의 문제를 잘 드러내느냐”하는 것만이 중요하며, 현대 세계는 “작가가 아주 생경한 문학을 추구하지 않는 한, 또한 거짓 문학에 골몰하지 않는 한”, “전혀 고통스럽지 않은 세계”라고 의견을 개진하고 있기까지 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들은 오늘날 시문학 작품들을 작가의 태도란 관점에서 해명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에 따른 작가의 시적 태도는 다음과 같이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 첫 번째가 <참상을 노래한 시>라 한다면, 두 번째는 <반시적(反詩的) 경향>이며, 세 번째는 <무엇에도 개의치 않는 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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