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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상을 노래한 시

프랑스 문학의 오늘 44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홀로코스트


참상을 주제로 한 시는 프랑스보다도 외국에서 더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그 구체적인 성과조차도 프랑스 시에서보다는 다른 언어로 씌인 시에서 더 자주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마리 루이즈 카슈니츠(Marie Luise Kaschnitz ; 독일 작가)나 일본 시에서 필요 불가결한 시적 제재로 나타나고 있는 전쟁의 참화를 통하여 쇼아(La Shoah : 1939 년부터 1945 년까지 나치와 그 조력자들에 의해 자행된 유럽의 유태인 대량 학살을 가리키는 프랑스어로 ‘유태인 절멸’을 뜻하는 홀로코스트의 프랑스 식 표기)와 히로시마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 시인인 레옹 펠리프(Leon Felipe)는 1965년에 펴낸 시집 『i Oh, este viejo y roto violin!』 가운데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태인들에게 바치는 시에서 “오늘 / 지상에 존재하는 어느 누구든 지를 막론하고 / 이 세상이 지옥보다 더한 곳임을 알고 있다”고 부르짖기도 했다.


레옹 펠리프(Leon Felipe)의 시집 『i Oh, este viejo y roto violin!』.


레옹 펠리프가 이야기한 지상은 단테를 비롯하여 블레이크와 랭보가 노래한 지옥 모두를 더한 곳보다도 훨씬 더 무지막지한 곳이다. 또한 신생의 시적인 언어를 질식시키는 것은 포로 수용소에서의 끔찍한 경험이기도 하다. 조르주 셍프렝(Jorge Semprun)이 『글쓰기와 삶(L’Écriture ou la vie)』에서 표명했던 것도 바로 그와 같은 문제였다.


조르주 셍프렝, 『글쓰기와 삶』.


시는 그럼으로써 때로는 우리를 자극하며, 때로는 충격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1940년부터 43년까지 브란데부르크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앙드레 프레노(André Frénaud)가 『동방박사들(Les Rois Mages)』에서 노래한 순진무구한 영혼들에 대한 학살을 다룬 시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앙드레 프레노, 『동방박사들』.


시는 또한 에드몽 자베스(Edmond Jabès) 『마지막 남은 어린 유태인 아이의 노래(La Chanson du dernier enfant juif)』(1943년에서 4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식인귀의 식사를 위한 노래들’을 담은 『처소를 세우다(Je bâtis ma demeure)』(1959)의 한 편)나 미셸 드귀이(Michel Deguy)가 유태인 수용소가 있던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여행하면서 써 내려간 『교환 방식(Donnant donnant)』에 수록돤 시들처럼 우리의 양심에 섬뜩하게 전해지는 공감마저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하다. 미셸 드귀이는 노래하기를,


온순하게 죽음으로 다가가는

말없이 죽음의 형장으로 끌려가는

아우슈비츠에서 가스에 질식해 죽은 영령들과도 같이

거리에는 누구도 일어서거나 눕거나 포효하는 사람이 없다

각자 바삐 자신들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을 뿐

나 또한 유태인인 채 죽어가는 유태인들과는 다른 죽음을 맞이하는

이 다른 죽음을 나 역시도 유태인으로 맞이하는 것이라 한다면

그때 그 수많은 유태인들은 또 한 차례 죽음을 당하는 것과 같으리라.

Menés sagement à la mort

à la mort sagement

comme gazés d’Auschwitz

Nul ne se lève ne se couche ne hurle dans la rue

chacun s’affaire à sa propre mort

Et juif je meurs je suis séparé des juifs qui meurent

Quand juif je meurs d’une mort distraite

Des juifs qui remeurent.


에드몽 자베스의 『처소를 세우다』와 미셸 드귀이 『교환 방식』.


이러한 참상을 주제로 한 글쓰기(모리스 블랑쇼의 말을 빌자면)가 단지 유태주의적인 글쓰기라고만은 볼 수 없다. 포로 수용소에 갇혀 신음하던 이들은 단지 유태인들만이 아니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 역시 참해의 유일한 형태만은 아닐 것이다.


유태주의적인 글쓰기 역시 여러 다른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알베르 코엔(Albert Cohen)이 보여준 바 있는 이전의 고통에 찬 길고도 가느다란 비탄에 찬 어조와는 달리 1968년에 그의 문학적 명성을 절정에 달하게 한 소설 『주인나리의 고상함(Belle du Seigneur)』에서의 유머로 가득한 유태인의 인상이 그러하며,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유태인의 기도 소리를 이용한 ‘침묵의 각적(角笛)’을 듣게 되는 클로드 비제(Claude Vigée)의 시나 “동트는 아침에 살인자들이 걸어나오는” 1980년의 『유태인(Judée)』의 풍경을 다룬 로랑 가스파르(Lorand Gaspar)의 시들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로랑 가스파르의 『유태인』과 알베르 코엔의 『주인나리의 고상함』.


부연하면 로랑 가스파르와 폴 셀랑은 두 사람 모두 트란실바니아 태생임을 비롯하여, 1944년에는 수아브-프랑코니(Soube–Franconie :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지대) 포로 수용소에 강제 수용된 경험 등, 두 사람 다 같이 의학공부를 위해 프랑스로 왔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점을 이룬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그것이 전부다. 전자가 단순 시학에 기초한 시를 썼다면, 후자는 이와는 다르게 마디마디 끊어진 언어들로 시를 썼다는 데 두 사람의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시인이 지상 세계를 단지 악몽으로 여기는 한, 그의 형식들은 아주 민감한 것이 되며, 이 경우에 역사의 도끼(La Hache de l’Histoire)는 기억의 무덤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역사’를 가리켜 제임스 조이스는 “나라는 존재를 각성시키기 위한 노력으로써의 악몽”이라 이야기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생고르(Léopold Sédar Senghor)나 세제르(Aimé Césaire)의 시들에서처럼 강점 하에 신음하는 모든 지역에 대한 해방의 동요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이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근동 지방에서의 폭력 사태를 다룬 작품들이나(앙드레 쉐디드(André Chedid)의 『저항시(Contre-chant)』(1968)와 『폭압의 기념일 축제(Cérémonial de la violence)』 (1975)를 비롯하여 루방 멜리크(Rouben Mélik)의 『행렬(La Procession)』 등), 구 유고슬라비아 영토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근 국가들의 시민 전쟁을 다룬 작품들 역시 역사의 도끼라는 모티프를 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앙드레 쉐디드의 『폭압의 기념일 축제』와 루방 멜리크의 『행렬』.


장-뤽 슈타인메츠(Jean-Luc Steinmetz)는 1994년에 펴낸 시집 『아침 제멋대로의 추락(Chute libre dans le matin)』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마치 지옥에 떨어진 자처럼
세월은 다리를 절고 있구나.



장-뤽 슈타인메츠의 시집 『아침 제멋대로의 추락』,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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