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학의 오늘 45화
[대문 사진] 팀 로빈슨의 삽화
아도르노에 의해 제기된 시 창작 자체에 대한 단념은 조르주 셍프렝(Jorge Semprun)의 시를 특징짓고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드니 로슈(Denis Roche)가 주장한 바처럼 대단히 급진적인 것일 수 있었다. 아도르노의 창작 태도에 관한 이런 표명은 시작(詩作) 자체에 대한 거부라기보다는 오히려 그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지난 12년간의 텔켈주의(telquélisme : 문학잡지인 <텔 켈(Tel Quel)> 지에 작품을 게재하던 일군의 작가들의 창작 태도를 가리킴)라는 용어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기도 했다.
1962년에 펴낸 『아마존 열대림(Forestière amazonide)』에서 – 그러나 이 작품이 대단히 진부한 방법에 의해 씌어진 것임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 드니 로슈는 “시어는 언어가 지닌 고유한 성질에 해당하는 어떤 특별한 내재성(intériorité)에 기초한 표현이외에는 그 어떠한 다른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 달리 말해, 언어는 그 자체로써 충분한 시어인 것이다”라고 표명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어조는 『반 기술체(Le Mécrire)』(1972)에 이르면 더욱 극단적인 양상을 띤다. – 그의 『반 기술체』는 기술체에 대한 일종의 사망선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 나아가 드니 로슈는 “시란 용인할 수 없는 것이며, 게다가 시는 존재하지도 않는다.”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시는 더 이상 교훈적인 성격을 띤 작품이 아니며(일찍이 앙드레 브르통이 주장했듯이), 더 이상 시적인(poéthique ; 미셸 드귀이가 시적인 작품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해 만든 신조어) 것도 아님은 물론, 그 무엇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기까지 한 것이다. 그렇기에 글을 쓰는 행위에 반대한다는 것(mécrire)은 “시적인 창작품을 반문화(méculture)의 극점, 다시 말해 기술체의 영도(제로 수준)에까지 끌어내리는 것을 포함하여, 시를 시답게 만드는 특질(la poéticité)에 입각한 명백함으로 시를 이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니 로슈의 『반 기술체』 역시 1947년에 펴낸 앙리 피쉐뜨(Henri Pichette)의 『돌발적인 시(Apoèmes)』와 같은 텍스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적인 타락’을 예증하는 증거들로 가득 차 있다.
『반 기술체』를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이 시집에서 어휘의 기포들은 파열해 가고 있으며, ‘다시 꽃피다(refleurir)’란 동사는 셀랑의 ‘꽃피다(blühen)’란 어휘처럼 이어지는 다음 단어와 끊어진 채 놓여 있다가 다음 행에서 ‘역류하다(refluer)’란 말로 솟아오른다. 이 어휘를 전후로 해서 ‘점잖은 어조로 상승하는’ 조롱 섞인 말과 말 더듬기의 형태를 보여주는 언어 유희는 온통 시행들을 가득 채우고 있다.
[…]다시 피어나는 상피병(象皮病)
멋진 시인들, 시인들의 항아리들, 시인들의 밭들,
작품이 줄거리 또한 변질되지 않은 완전한 물통에 의해
쏟아부어지게 되리라 […].
[…] L’éléphantiasis refleur –
Refluerait que par brocs entiers l’inaltérable
Conduite, les beaux poètes, les pots poètes,
Les clos poètes […].
위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시에 대한 공격이 언어의 완전한 파탄에 대한 감정에 기초한 것인 한에 있어서는, 더군다나 서로 어긋나 있는 각 시행들이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시의 주제어가 각 시행마다 연결되고 있는 한에 있어서 위 시는 셀랑의 시에 근접해 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