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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에도 개의치 않는 시

프랑스 문학의 오늘 46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장–미셸 몰푸와 친필 노트


여기 제목으로 취한 무엇에도 개의치 않는 시(la Poésie malgré tout)란 말은 장–미셸 몰푸와(Jean–Michel Maulpoix)의 에세이집(1996) 제목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시적인 산문을 통하여 서정주의(lyrisme)를 새로이 주창한 그는(『더 이상 내 관심을 기대하지 마오(Ne cherchez plus mon cœur)』, 1986) 오늘날 씌어지고 있는 시들이 여전히 의문에 둘러싸여 있는 “예전의 서정적인 고유한 특질들을 되찾아가[고]” 있음을 예시하고자 애썼다.


장–미셸 몰푸와, 『더 이상 내 관심을 기대하지 마오』, 1986.


물론 그의 글 속에는 문명(la civilisation)이란 위험 요소가 깔려있긴 하다. 제임스 조이스가 영어가 아닌 독일어를 통하여, 다시 말해 우리에게 여전히 구역질을 일으키는 독일어 특유의 악취를 풍기는 말의 유희를 통하여 제기한 바 있는 문명이란 매독화(la syphilisation)의 위협 또한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랭보는 벌써 대홍수 이후에 피아노가 알프스 산꼭대기에 놓일 수도 있음에 불안해했으며, 사막에는 다시 낙타 대상(隊商)들이 출현하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 모든 새로운 창조는 이처럼 랭보의 『채색문자들(Illuminations)』에서 읽을 수 있는 신비와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여전히 되풀이되는 랭보적 의도라 할 수 있다.


아르튀르 랭보, 『채색문자들』.


자코테(Philippe Jaccottet)는 1981년 1월 티베트의 수도 라싸(Lhassa)에 힐튼 호텔을 짓겠다고 발표한 이들의 계획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그가 분노한 이유는 어떻게 불경을 외우는 수도승들의 낭랑한 목소리만이 메아리치는 지상에 그 같은 건물을 지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자코테가 들었던 수도승들의 염불 소리는 “낮고도 힘찬 것이었으며 […] 마치도 오직 묵묵히 땅을 갈면서 간간이 토해내는 소 울음소리처럼 영원의 대지를 메아리치는 울림”이었다.


이러한 목가적인 소리들은 빅토르 위고가 마치 시에 있어서의 영원성이 그에 있다는 듯이 섬세한 비르길리우스의 노호(怒號)하는 쿵쾅거림(le mugitusque boum)을 발견하고자 원했던 바로 그 소리에 닿아가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자코테를 구원했던 이런 소리마저도 우리가 자연 상태 그대로 유지되리라 믿었던 지구의 다른 한쪽의 또 다른 세계를 침범해 들어가는 하나의 수단일 수 있는 것이다.


연일 보도되는 각종 취재물들이나 보도 사진들에게서 이 세계의 어떠한 비밀이라도 캐어내고자 한다는 것 이외에 달리 어떤 목적이 있다고 볼 수 있겠는가? 20세기말을 살고 있는 이 시점에서 역사의 그 어떤 미래도 지향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우리를 불안케 하는 이러한 침입과 간섭의 모든 형태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세계는 적어도 이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위협에 대해 자코테는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않았다. 아니 이러한 위협에 대해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를 위협하는 요소는 언뜻 보기에 가장 공포스러운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실상 핵폭탄에 의한 가공할 만한 재난은 지구 전체를 파괴하고도 남을 위험 요소이며, 그것은 적어도 히로시마의 재현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가장 잔인한 형태의 위협일 수 있다. 자코테의 『두 번째 파종기(La Seconde Semaison)』 처음 부분은 마쓰이(Masui)의 『나아가기(Cheminements)』의 일절로 채워지고 있는데,


“이윽고 이제 더는 자연스러운 삶이 조용한 가운데 진행을 계속할 지구상의 어떠한 지점에도 그는 자신의 처소를 마련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 조차연적인 것을 통해 세정(洗淨)한 자연스러운 어떤 삶을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필리프 자코테, 『두 번째 파종기』.


그러나 이러한 위협에 조차 자코테는 저항한다. 위험의 극한 상황에서조차 시는 여전히 존재하며, 더욱이 위험이 극에 달한 상황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그는 스스로 믿고자 원했다. 다음의 인용문은 1981년 2월 파리에서 자코테가 피터 부룩(Peter Brook)의 감동적인 오페라 『새들의 담화(Conférence des oiseaux)』를 관람하는 가운데 머릿속에 떠오른 단상들을 재빨리 글로 옮긴 것이다. 참고적으로 덧붙이자면 피터 부룩의 이 작품은 새들이 허무(Néant)의 계곡으로 자꾸만 날아들자 점성가가 새들을 계곡 저 멀리로 날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부추긴다는 내용이다.



두 세계가
갑자기 사라진다 할지라도
지상의 유일한 모래알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만일 지상에
어떠한 흔적도, 인간도, 천재도
남지 않게 된다면,
빗방울의 신비에나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자코테는 덧붙이기를, “이는 우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글을 쓰고 그것을 출간함에 있어서 모든 시집의 장 첫머리에 붙일 명구에 해당할” 것이라고 표명하고 있다.


살라 스테티에(Salah Stétié)의 시들은 이렇듯 그 무엇에도 개의치 않는 시를 단적으로 예증하는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주불 레바논 대사로 재임하면서 두 나라 간의 서로 다른 문화를 한 몸으로 체현해 낸 바 있는 그는 역사의 시기를 관통하면서 온몸으로 전쟁의 참상을 노래하기도 했지만, 그의 시적 의도는 어디까지나 일상의 문제를 초월하는 시적인 언표 행위를 이룩하는 데 있었다. 여기 인용한 시는 그가 첫 번째로 발표한 시집 『차갑게 고인 물(L’eau froid gardée)』(1973)에 수록된 것인데, 이 시를 통하여 스테티에는 전쟁을 통한 침략 행위를 고발하고 나선다.


어둠에 갇혀 신음하는 여인네들

그래서 더 고귀한 정결의 나라를 비추는

불빛의 젊음을 노래하노라


속눈썹 사이 감춰진 사랑이 정결히 씻은

남정네들 가슴 이글거리는 심장을 위해

여인네들 가슴을 덮은 날개를 달고 있구나


망치질 소리에 귀가 먼 이 나라를 구할 자는 누구인가차갑게 고인 물 뽑아 올려

이 땅에 흐르게 할 자 누구인가?


Je salue la jeunesse de la lumière

Sur ce pays de grande chasteté

Parce que ses femmes sont fermées


Elles ont des ailes croisées sur la poitrine

Pour protéger le cœur ardent des hommes

L’amour aux cils baissés l’a circoncis


- Qui sauvera ce pays du martèlement

Des soldats qui s’avancent sous un triomphe

Pour arracher l’eau froide gardée – et la prendre?


살라 스테티에, 『차갑게 고인 물』, 갈리마르, 1973 및 아마존 광고.


스테티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독자들을 위해 위의 시를 애송하고 싶어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와는 다른 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스테티에에게 있어서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자신의 시가 보다 구체적인 것으로의 이행을 촉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 내의 존재(『나무와 침묵의 전환(Inversion de l’arbre et du silence)』, 1980)에서 올리브나무의 모티프로 나타나고 있는)라는 주제로의 이행을 감행하게 했으며, 또한 이마저 초월하는 시적 순수의 재발견이라는 차원, 다시 이야기해서 무기물을 비롯한 원소, 유년, 사랑과도 같은 되찾은 순수성을 노래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살라 스테티에, 『나무와 침묵의 전환』, 1980.


그의 다른 시집 『흠 하나 없이 불타는 다른 한쪽(L’autre côté brûlé du très pur)』(1992)에서의 ‘불빛의 철자 엘(L)’은 알파벳 자음의 하나임이 분명하거니와, 이는 랭보의 ‘불빛-자연’이란 시어에 이어져있는 그의 시에 있어서의 중요한 시적 모티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적 동기들만으로도 스테티에 역시 본느파처럼 랭보에 관한 탁월한 주해자(註解者)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살라 스테티에, 『흠 하나 없이 불타는 다른 한쪽』, 1992.


그러나 스테티에가 알파벳 철자만으로 랭보적인 의도를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를 해체하는 철자화의 과정을 탐색하기도 했던 시인이었다. 우리는 그의 모순 어법(oxymores)을 통하여 시어의 풍부함을 토대로 하여 씌어진 작품들과 함께 이 시인이 언어의 재조립과 그에 대한 성찰과 명상을 동시에 획득하고 있음은 물론, 이른바 ‘가공품’으로서의 언어를 재발견하고 있음에 유의해야만 한다.


눈 내리는 여름은 새롭기만 하며, 맨살을 드러낸

포도송이들 차가운 슬픔만이 돋아난다.

C’est de nouveau l’été de neige et c’est

Le chagrin froid des raisins 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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