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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장난 시 : 자크 프레베르

프랑스 문학의 오늘 47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자크 프레베르


시의 구원 아니 시를 통한 구원 – 비록 그러한 시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 내게는 그렇게 쉽게 시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결코 용이하지만은 않다. 노래 가사로 읊조리는 시 또한 마찬가지다. 적어도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évert)의 시에 있어서 시의 구원은 가당치도 않으며, 시를 통한 구원 역시 우스운 짓에 불과하다.


자크 프레베르의 시를 논함에 있어서 우리는 오직 우리의 존재와 세계를 위협하는 요인들이 이제는 시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는 우리의 인식의 전환을 이행할 필요성만이 주어질 뿐이라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1996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간행된 『자크 프레베르 플레이야드 총서 2권』의 출간과 함께 쏟아진 작고한 시인에 대한 찬사는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자크 프레베르 사후에 간행된 갈리마르 플레이야드 총서, 1996.



신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는 달리
시는 항상 어느 상황에서건 존재한다.



1972년 <주간지(Hebdomadaires)>에 게재된 앙드레 포즈네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자크 프레베르의 이러한 단호한 표명은 그가 발표한 전 작품을 관통하는 시에 대한 인식(詩觀)으로서 긍정적인 확신과 부정적인 신념을 한데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잘못된 확신은 말기에 이르러 더욱 굳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한다.


『이 예기 저 예기(Choses et autres)』(1972)의 둘째 장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표명, “나는 항상 신을 모독해 왔다”라는 시인의 표명은 종교와 그에 대한 자신의 ‘속죄’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나선 되풀이에 불과하다.


자크 프레베르, 『이 예기 저 예기』, Folio 판.


그러나 내 판단으로는 그와 같이 프레베르가 굳이 이야기할 문제는 아니었으며, 또한 그가 쓴 시들에 근거해 볼 때, 전혀 그럴 필요성조차 없었다는 데 오히려 문제가 있다. 더 나아가 그의 이러한 기이한 논리는 어떤 상황에서건 존재해야만 할 이유를 가로막는 시의 부재(不在)에 관한 괴상망측한 논리가 프레베르의 말속에 함축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이 얘기 저 얘기』의 둘째 장은 여섯 행 가까이가 거의 횡설수설에 가까운 말의 되풀이와 이철동음(二綴同音)의 파격적인 문법을 동원한 산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콘체르토(concerto)라는 단어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꼰체또(concetto)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말로 바뀌어 있는 탓이다.


이러한 말장난은 그의 시를 적절히 해명하는 것을 오히려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역시 같은 책에 수록된 「벽낙서(Graffiti)」란 글은 거의 한심한 수준을 보여주기까지 하는데, 대체 그의 이러한 미치광이 짓 같은 무신론(“신앙은 습관이다”)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늙은 부랑아의 횡포와도 같은 표현(“살이 썩어들어가는 듯한 언어의 권능에 대하여”)은 어떤 발상에서 기인한 것인지 의아해질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베르는 어떻게 다음과 같은 자명한 이치를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일까? “이 세상에는 다섯 혹은 여섯 개의 아주 경탄할 만한 것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제일은 사랑이니라.” 내가 볼 때는 프레베르의 이 같은 표현은 이제까지 보여준 그의 시적 발상과는 한참 동떨어져있을 뿐이라고밖에 달리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는 해도 시가 무엇인가를 표현할 수 있다는 시적인 가능성을 이야기한 ‘복수의 […] 미’에 대한 설파는 그의 신념과는 달리 시에 대한 한층 풍부한 발상에 입각한 것이다. 프레베르의 이러한 발상의 풍부함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한데 병합한 것으로 만족한 듯한 『말(Paroles)』(1945)을 비롯한 일련의 시집들을 해명해 주기에 충분하다.


자크 프레베르, 『말』.


『이야기들(Histoires)』(1946), 『특별한 장면(Spectacle)』 (1951), 『흐린 날 갠 날(La Pluie et le Beau Temps)』(1955) 이후에 발표한 『잡동사니(Fatras)』(1965)는 그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경험에 의해 재구성된 너절한 이야기들을 시의 제재로 삼고자 한 프레베르의 유일한 시적인 믿음을 드러낸 것에 가깝다.


자크 프레베르의 『이야기들』(1946), 『흐린 날 갠 날』(1955), 『잡동사니』(1965), 『특별한 장면』 (1951).


한마디로 요약해서 그의 시들은 영화배우 사무엘 라바르뜨(Labarthe)가 쏟아놓는 대사와도 같이 “어제 또는 엊그제 아주 가깝게 혹은 아주 멀리에서 발생한 또는 벌어진” 일들을 한데 모아 “사생(寫生)하듯” 묘사해간 글들에 해당한다. 『이 얘기 저 얘기』의 「꾸밈없이(D’après nature)」가 그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대중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그의 기발함”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가야만 했던 모순된 시적 열망은 프레베르로 하여금 사물들의 신비를 제시하고자 한 열의와는 달리 그를 자꾸만 이와는 정반대의 영역으로 몰고 갔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푸른 대지 저편(le bleu outre–terre)’이나 목을 맨 ‘하늘–비둘기(le ciel–pigeon)’와 같은 표현에서 보듯, 프레베르는 대중의 힘을 빌려 그 자신 가능한 모든 시적 표현들을 더욱 타락시키는 쪽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의 시가 우리를 사로잡은 힘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세스터 고양이의 웃음 짓기(le sourire du chat de chester)」와 같이 우리가 아무리 프레베르를 스스로 뉘우친 초현실주의자로 간주한다 할지라도 그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 속으로 점점 빠져 들어가던 엘리스였지 루이스 캐럴은 아니었던 것이다.


프레베르의 세상 역시 콜레트(Colette)와 라벨(Ravel)의 『아이와 요술(L’Enfant et les Sortilèges)』 속의 깊은 상처를 지닌 나무들은 아니었다. 프레베르, 이 생태학자와도 같은 시인은 더군다나 『나무들(Arbres)』(1976)에서 말을 바꾸기까지 한다. 즉, 그에게는 나무들이란 다름 아닌 어휘들을 가리켰다.


자크 프레베르, 『나무들』, 갈리마르, 1976.


왜냐하면 프레베르에게 있어서 시란 되찾은 유년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이 얘기 저 얘기』의 첫머리에 자서전적인 글을 실은 것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뇌이이 쉬르 센느(Neuilly–sur–Seine), 그는 여섯살이고 불로뉴 숲은 아직 브라질 풍으로 바뀌지 않은 아름다운 시대(Belle époque)를 구가하고, 오솔길을 뛰어가는 사슴, 음악을 연주하는 이들, 그리고 러시아의 높은 산들을 등 뒤로하고 서있는 나무에 그려진 소녀들, 이곳은 가나다라를 배우는 그 어떤 학교보다 훨씬 매력적인 곳으로 보이는 ‘시골 학교’의 풍경으로 비친다.


이윽고 불안의 징표들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막세이에서의 정치적인 격변을 전하는 소식들과 함께 아버지가 실직했다는 사연을 담은 전보와 등기우편 뭉치들이 날아오고, 그러나 그는 글을 끼적이는 재미와 계속되는 방학으로 말미암아 신바람이 난 상태다.


이처럼 그의 회상은 1914년의 전쟁 직전에 끝나고 있다. 이를 종합해 볼 때, 프레베르에게 있어서 고백은 모종의 탐구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잃어버린 시간을 향한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어떤 분위기에 대한 그 자신의 몰입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프레베르의 마지막 시집은 예전의 『말(Paroles)』이 이룩한 시적 성과와는 동떨어진, 그의 시를 더욱 돋보이게 하던 특징들로부터 저만큼 비켜서 있다. 또한 그의 시들은 더 이상 쥴리에뜨 그레꼬나 이브 몽땅이 노래한 예전의 시들에 대한 아련한 기억조차 반향하지 못한 채 멀찍이 떨어져 있을 따름이다.


자크 프레베르의 시를 샹송으로 부른 쥴리에뜨 그레꼬(왼쪽 사진)와 이브 몽땅(오른쪽 사진).


그렇듯 그의 최후의 시편들은 어느 것 하나 우리를 사로잡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느 것 하나 노래로 불린 적도 없다. 더군다나 그가 생애 마지막으로 써 내려간 시들은 어느 것 하나 노래 같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다.


음악은 그가 『이 얘기 저 얘기』의 「카르미나 뷔라나(Carmina Burana)」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제 ‘침묵의 태양’이 된 것인가? 프레베르에게 있어서 시 역시 ‘짧고도 아름다운 시절’과도 같이 너무 이르게 시작되어 너무도 빨리 시들어 버린 것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에는 주목할 만한 무척이나 아름다운 시 한 편이 실려있는데, 우리는 그의 최후의 시편 「세느는 파리와 조우했다(La Seine a rencontré Paris)」를 통하여 다층적인 울림을 지닌 시인의 목소리, 즉 종말을 이야기하는 자의 아득한 울림 – 만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 을 들을 수 있다.


퐁 네프 다리 아래 최후의 날을 향해 부는 바람이 끝내 촛불을 고통으로 잠재우는 때

내 다시 삶의 순간들로 되돌아가는 때

내 오직 기쁨의 만족에 취하는 때

바뇨와 페르-라쉐즈 묘지의

열을 지어 늘어선 장광(長廣)의 묘석들에게

내 미소 지으며 이야기하노니

그것은 세느 강이었노라

이미 지나간 과거이었노라

아득한 시간 속의 사랑이었노라

불행이었노라

또다시 깃든 망각이었노라

그것은 세느 강이었노라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삶이었노라.


quand dessous le Pont – Neuf le vent du dernier jour soufflera ma bougie

quand je me retirerai des affaires de la vie

quand je sera définitivement à mon aise

au grand palace des allongés

à Bagneux au Père–Lachaise

je sourirai et me dirai

Il était une fois la Seine

il était une fois

il était une fois l’amour

il était une fois le malheur

et une autre fois l’oubli


Il était une fois la Seine

il était une fois la vie.


자크 프레베르, 세느는 파리와 조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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