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학의 오늘 48화
[대문 사진] 사진출처 unpoeme.fr
요즘 씌어지는 프랑스 현대시의 일 경향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는 것은 실로 난감한 일에 속한다.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에서 시도하는 것은 요즘의 시가 함축하고 있는 시적 비의(秘義, secret : ‘시적인 신비’와는 다른 의미로써)에 관해서다.
마틴 브로다(Martine Broda)는 폴 셀랑(Paul Celan)의 시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바 있다. “인류가 고리 찾기와도 같은 의미에 대한 탐색을 계속하는 것은, 적어도 이를 되풀이하는 것은 바로 의미 때문이다. 아주 묵직한 의미에 해당하는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만일 오늘날 많은 시인들이 언어의 해체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형이상학의 조종(弔鐘)을 고하리라 믿었던 데리다의 『조종(Glas)』에 대한 철학적인 해체를 포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프랑스 현대시는 여전히 형이상학 그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더해서 상징주의자들의 이원론으로 회귀해 가고자 하는 무익한 탐색을 시도하는 것 또한 무의미하기는 마찬가지다. 보들레르를 비롯하여 랭보와 말라르메를 탐구했던 이브 본느파(Yves Bonnefoy) 역시 상징주의에 대한 불신만을 지니고 있었을 따름이며(랭보를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시인에 대해서도 면밀히 고찰해 보지 않은 이유로 말미암은 것이겠으나), 이원론에 대한 모든 형태를 단지 의혹의 시선으로만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하기에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프랑스 현대시에 관한 탐구는 비의에 대한 추구를 띠고 있는 고통스러운(Douloureux) 표현(유형의 고통을 비롯한 실종과 상흔에 관한 것으로서의)에 대한 것이어야만 한다. 이는 보들레르를 비롯하여 셀랑이나 페렉의 경우를 모두 포함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탐구는 동궤에 놓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같은 주제적 양상을 띤 다른 시인들의 작품들이나 스테티에와 같은 시인의 작품 모두를 포함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시에 있어서 이 되찾은 비의는 향수나, 또 다른 잃어버린 세계, 혹은 우울한 세계에서 시인을 몸 달게 하는(languir) 욕망의 이상으로부터 주어진 것은 아니다. 이는 오로지 우리가 존재하는 이 세계와 같은 세계 내에서 주어진 것일 뿐이다.
이브 본느파는 『배후지(L’Arrière-pays)』에서 이탈리아의 카프래아라는 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카프래아,
너는 우리처럼
세계의 이곳과도 닮아있구나.
무한히 고통받으며,
신비를 박탈당한 채
뒤로 처지고
끝내는 밤이 깃들면서
자취조차 감추는구나.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장-클로드 르나르(Jean-Claude Renard)는 “모든 섬은 오묘하다(Toutes les îles sont secrètes)”라고 표현한다. 1984년에 펴낸 시집의 제목을 위하여 르나르가 한 편의 시에다 붙인 제목이면서 또한 한 구절의 시구에 해당하는 이 구절을 선택한 것은 그의 모든 시가 이 한마디 속에 응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은 그럼으로써 “오묘한 비의를 말로 풀어갈 수 있기를” 희망하게 된다. 이 표현이 그럼에도 애매모호한 것으로 비치는 것은 표현 자체가 불가사의한 것과 시적인 언사(言辭)를 통해 획득한 의미 사이에서 심하게 진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문의 형태로 출발하는 그의 시들은 따라서 비의적이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그것은 이윽고 심오한 뜻(arcanes; 시편 1에서 9까지)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신비에 대한 판독을 행하는 끈질긴 작업을 통하여 처음에 제기된 비의에 관한 해답의 가능성이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를 통해 더없이 자유로운 정신에 입각한 표현들을 추구했던 르나르이기는 하지만, 완벽한 가톨릭 시인으로서 그는 본느파와는 달리 문턱의 속임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았거니와 시속에 다른 저 편의 세계에 대한 환기를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점이 그로 하여금 세계에 대한 신비로움을 허용하게 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새로운 독창성을 구현하고 있는 시라는 제식을 통해서 일 것이며, 또한 「제식(Rites) I」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이다(il y a)로 열거되고 있는 여러 다양한 대답을 통해서 일 것이다.
우리는 「제식 II」를 통하여 글쓰기 역시 이러한 제식의 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글쓰기가 이 세계에 대한 비의를 모두 드러내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글쓰기는 세계의 신비를 밝혀내는 가운데 불가사의들을 해명하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고독한 시인을 유일하게 감싸주는 말들이면서 또한 증거해주고 있는 문자들이 그 자체 내에 은닉하고 있는 불가사의들은 그의 시에서 차례차례 신비의 베일을 벗어가는 중이다.
‘신화’, ‘기술체’, ‘문헌’, ‘언어’ 등, 그것들이 충분한 의미를 지닌 의미 체계든 불충분한 것이든지 간에 그의 글쓰기를 지배하는 이와 같은 용어들은 시를 통해 결코 난해하지 않은 복합적인 형태 속에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가 지닌 일련의 흐름 속에서 처음 제기했던 질문이 반드시 어떤 해답에 이르는 것이어야만 한다면, 그의 시 한 편 한 편은 처음의 물음과 같이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나름대로의 결론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가 『무한한 이야기(L’Entretien infini)』를 통해 문제 제기의 난맥상을 시준한 바와 같이 궁색한 답변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모리스 블랑쇼는 의문의 난점에 대해 언급하기를, 이와 같은 불행은 다음의 이유에서 비롯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부재에 휩싸인, 즉 존재하지도 않는 공허의 신비를 추구한다는 데 있다. 또한 타자의 현존을 기호들로써 탐색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텅 빈 가운데 유령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미로 속에서 시의 한 구절을 채택하는 데 있다.”
마리-클레르 방꺄르(Marie-Claire Bancquart)가 1995년에 발표한 『수수께끼 같은 것들(Énigmatiques)』은 일련의 시작 활동을 통해 그녀가 보여준 프랑스 시에서의 새로운 면모를 한데 응축하고 있는 것으로 비치기에 충분했다.
소르본느에서 불문학을 지도하는 교수의 한 사람으로서, 또한 이 시대의 가장 독창적이고도 독보적인 음악 세계를 펼쳐가고 있는 작곡가의 아내로서 그녀는 감성적일 것을 요구하는 모든 요구에 적절히 들어맞는 일련의 시작 활동을 계속해 왔다.
그녀가 이제까지 발표한 시집들을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먼저 『폐기된 기억과 목소리(Mémoire d’abolie et Voix)』(1979)를 비롯하여 『악보(Partition)』(1981), 『뼛속까지 깃든 당신의 얼굴(Votre visage jusqu’à l’os)』(1983), 『새들의 호기(Opportunité des oiseaux)』(1986), 『한계의 오페라(Opéra des limites)』(1988), 『유동하는 것들(Mouvantes)』(1991), 『지상을 들춰내면(Dans le feuilletage de la terre)』(1994) 등 최근에 펴낸 시집을 포함하여 모두 여덟 권에 이른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 일련의 시작은 처음에 우연히 제기되었던 의문의 글쓰기(‘물결들(Vagues)!’)로부터 출발한다. 그녀의 글쓰기는 이처럼 불쑥 내던져진 말들의 물살 속에 있으며, 이해될 수 있는 범주를 포함한 표현 속에 자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동물성에 대한 비의적 표현이라든가(‘울부짖는 닫힌 바다’), 음악의 비의를 담고 있는 표현(‘수수께끼 같은 대응 선율’)을 비롯하여 그 무엇도 지시하고 있지 않은 기호들에 대한 신비(‘그들의 규칙적이지 않은 글쓰기’)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녀의 이러한 독특한 어법은 장-클로드 르나르의 어법과는 대조적인 ‘부재’하는 ‘속된 하느님(dieu)’(대문자가 아닌)을 이야기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모든 표현, 즉 비라든가 바람, 밤, 육체에 이르는 이 모든 말들은 수수께끼 자체라 할 수 있다.
이를 ‘살아 움직이는 점자(點字)’로 하나하나 각인해 가는 말들이 바로 그녀의 시에 해당한다. 미셸 드귀이 역시 이와 똑같은 비유를 사용했지만(“내가 읽을 수 있는 말들의 점자를 제시하는 것은 시의 난청 때문이다.” 『묘와상(Gisants)』, 1985). 그러나 그가 사용했던 점자는 언어의 유희 속에서였으며, 폭넓게 산재해 있는 문학에 입각한 문화 요소들을 한꺼번에 다루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이와는 달리 마리-클레르 방꺄르는 살아있는 점자 그 자체를 탐색하고자 한 이유에서, 또한 보다 분명한 말의 투명성을 찾기 위한 의도에서 이를 제시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시에 사용된 이동하는 철새들을 가리키는 브(V) 자를 단지 고립된 문자만으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이 머리글자는 첫 시구에서 물살로 일렁이다가 마침내 마지막 시구에서 구원되고 있는 ‘난폭한 삶(violente vie)’에 대한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이중의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프랑스 문학의 의미에 초점을 맞춘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셀랑이 자신의 시에 적용했던 바를 그대로 인용하면 프랑스 문학은 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마르틴느 브로다 역시 이와 비슷한 언급을 하고 있는데, 『브레멘에서의 담화(Discours de Bréme)』에서 그녀는 셀랑의 시를 분석하는 가운데 “셀랑의 시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움직임이라 할 수 있는 시적인 힘은 그 무엇을 전파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 있다. – 다시 말해, 시를 향해 나아가는 그 무엇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라고 표명하고 있다.
공평한 의미에서 모든 시들은 똑같이 나아가고 있다. 시들은 그 무엇을 향한 도상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는 무엇을 향해 있는 것인가? 시는 닫힌 곳의 열린 어떤 공간을 향해 있으며, 그대라 말할 수 있는 것을 향해 나아가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가 희구하고 있는 실체를 향해 가고 있다.
모든 작품은 도정에 놓인 하나의 과정일 수 있다. 모든 작가 역시 어느 한 지점으로 나아간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셀랑을 발견하고자 노력하는 길은 “나아가는 도정에서 들리는 ‘너’를 향한 목소리의 길”인 것이다. 왜냐하면 시는 타자를 향해 나아가기를 원하며, 또한 타자가 필요한 것이 시이고, 그 정면에서 또 다른 타자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사물과 인간은 “이 타자의 형상을 한, 타자 그 자체를 향한 갑(岬)을 수반하는 시를 위해” 존재한다(『자오선(Le Méridien)』). 바로 이러한 점이 나로 하여금 오늘날 씌어지고 있는 시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문학 전반에 관한 예지적이고도 최선의, 그리고 투명성에 기초한 물음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타자는 셀랑이 이야기했듯이 익명의 누구(personne)에 해당하는 것인가? 아니면 맨델스텀(Mandelstam)이 셀랑으로 하여금 몸서리치도록 만들었던 작품 속에서 이를 특화시켰던 바로 그 익명의 누구(personne)란 말인가? 맨델스텀은 personne에 해당하는 러시아 어 nikto란 단어 대신에 niekto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맨델스텀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의미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그는 이 단어가 지닌 유일한 표기 방식에 변화를 가함으로써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어휘로서의 뒤틀린 표현을 획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이와 같이 해체된 말을 통하여, 혹은 광기의 문자들을 통하여 분명컨대 고통의 확인을 실감케 하는 이미지와 마주칠 것이며, 인간의 비의까지도 함께 경험하게 될 것이다. 또한 전쟁 이후의 프랑스 시가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점잖게 일소에 부치는 역겨움을 통하여서는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에 대한 수치스러운 기억 또한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점 때문에, 우리 문학의 역겨움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셀랑과 같은 시인이 없다는 사실이 더욱 수치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에게는 페렉(Perec)이 있고(시에서 아주 드문 경우에 속하는), 드니 로슈(Denis Roche)가 있지만(그가 이전에 사용했던 시적 도구들을 오히려 되던져 버린), 전달될 수 있는 전달 불능의 역설과 데리다적인 논리적 난점(l’aporie)은 쉬볼렛(schibboleth)의 편력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그와 같이 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오늘의 프랑스 시는 이와는 다르게 말의 투명성을 확립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신성함에 대한 가장 고상한 야망 속에 말의 투명성을 확립하려는 시도(장-클로드 르나르(Jean-Claude Renard)의 『신성한 대지(La Terre du sacre)』),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속된 것으로 남을 수 있는 시도(조르주 엠마뉴엘 끌랑시에(Georges Emmanuel Clancier)의 『천상의 농부(Paysan céleste)』(1943)로부터 『시간의 보행자들(Passagers du temps)』(1991)에 이르는 일련의 시도)로 나타나는 역설이 바로 그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시에 생기를 주었던 것은 주로 시에서의 단순을 목표로 한 시 운동이었다. 다시 말해 기유빅(Guillevic)이 찾아 나섰던 단순 명료함에로 프랑스 시는 나아갔던 것이다. 이는 마치 장-피에르 르메르(Jean-Pierre Lemaire)가 모든 투옥들에 대해 희망의 언어로 표현했던 ‘석방’이란 말과도 같은 것이었으며, 적어도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통하여 의미를 더욱 애매하게 만드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시는 어는 순간 랭보가 확신했던 영원성을 되찾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시어만큼은 장-피에르 르나르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어느 정도 이와 유사한 동질성과 투명성을 획득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마음으로 돌들을 빚어내기 위해
돌들의 살갗을 제거한다
돌들이 제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것들은 이미 오래도록 뜨거움 속에 담금질된
이삭과 화관과
거북이와 비둘기의 형상을 한
빵에 가깝다.
Il ôte la peau des pierres
pour les pétrir avec son cœur
et quand il les ressort
c’est déjà presque du pain
en forme d’épis, de couronnes
de tortues, de colombes
qui restent longtemps chaudes.
- 『갑(岬)의 길(Le Chemin du cap)』, 199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