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학의 오늘 49화
[대문 사진] 사무엘 베케트
오늘날 프랑스 극(劇)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 프랑스 극이 나아가는 방향은 어떤 의미를 띤 것인가? 이러한 의문이 들 때마다 떠오르는 선입견들이나 생각들은 그만큼 다양하고도 서로 다른 의미에 입각한 것들이다. 물론 프랑스 극만 놓고 볼 때, 이와 같은 의문은 다른 장르에 대한 의문보다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띨 뿐만 아니라 개개의 희곡 작품들에 대한 집요한 고찰마저 요구한다.
우리가 첫 번째로 가정해 볼 수 있는 것은 프랑스 현대 연극의 역사가 기존 희곡 작품들에 대한 연출이나 상연들에만 의존하고 있는 이상, 텍스트로서의 연극은 이제 더 이상 현대 연극사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제는 스페인의 황금시대와 같은 상황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이야기해서 꼬스메 로띠(Cosme Lotti)가 깔데롱(Calderón : 중세 스페인의 극시인)보다 우세했던 상황으로 말이다.
1996년 7월 13-19일 자 <텔레라마(Télérama)>는 『우두머리(Cid)』의 역을 맡은 제라르 필리프(Gérard Philipe)의 화려한 사진과 함께 주요 기사 제목을 「아비뇽, 반세기의 전설」이라 뽑았다. 텔레라마가 적절히 표현했듯이, 아비뇽은 1947년 9월 이 도시에서의 연극 축제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장 빌라르(Jean Vilar)의 작품 『하녀(La Servante)』를 ‘처음으로 공연’한 이래 같은 작품을 1995년 올리비에 피(Olivier Py)의 연출로 24시간 논스톱 공연하기 위하여 무대에 올릴 때까지 한 작품에 대한 공연을 계속해 온 도시다.
장 빌라흐의 「하녀」는 교황궁(Palais des Papes) 정원에서 상연되었는데, 물론 교황궁 바깥에서도 연일 연극에 대한 강렬한 삶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한 작품들이 축제 기간 내내 상연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공연 일지를 시대 순으로 살펴보면, 1967년은 모리스 베자르(Maurice Béjart)의 출현으로 떠들썩했던 한 해였고, 1978년은 앙투안느 비테즈(Antoine Vitez)의 해였으며, 1983년은 피나 보슈(Pina Bausch)의 연극-무용 작품이, 1985년은 피터 부룩(Peter Brook)의 『마하브하라타(Mahabharata)』가 무대에 올려졌다. 또한 1991년은 마리아 카자레스(Maria Casarès)가 연극계에 다시 복귀한 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연극의 텍스트들이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1996년 아비뇽의 연극 축제에서 가장 인기를 끈 작품은 역시 자크 니쉐(Jacques Nichet)가 엄정하게 흑인만으로 구성된 극단을 이끌고 연출한 에메 세제흐(Aimé Césaire)의 『크리스토프 왕의 비극(La Tragédie du roi Christophe)』일 것이다.
이 작품이 그와 같이 의미심장했던 것은 비로소 프랑스 연극이 극(le théâtre) 자체로 회귀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여든세 살의 저명한 이 흑인 극시인이 1963년에 발표한 『크리스토프 왕의 비극』은 『콩고에서의 한 철(Une saison au Congo)』(1966)과 셰익스피어의 『폭풍우(The Tempest)』를 개작한 『폭풍우(Une tempête)』(1969)와 함께 그의 삼부작에 속하는 작품에 해당한다.
극작가로서의 명성을 절정에까지 이르게 한 삼부작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인 ‘흑인 연극을 위해’ 크리스토프 1세와 뤼뮘바와 말콤 엑스(X)를 작품속에 ‘도입’하기도 했는데, 이 인물들은 로제흐 툼송(Roger Toumson)의 표현에 따르자면, “식민지 해방을 다룬 서사시를 상징하는 표징들”에 해당한다.
잠시 지난 시절의 아비뇽 연극 축제로 거슬러 올라가면, 1983에는 창조적인 연극 대본(un texte théâtral)이 무대에 올려지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이 놀라운 연극 대본은 다름 아닌 장 크리스토프(Jean–Christophe)의 『변광성(變光星, Les Céphéides)』으로 조르주 라보당(Georges Lavaudant)의 연출과 아리엘 갸르시아–발데스(Ariel Garca–Valdès)라는 뛰어난 연기자와 함께 무대에 올려졌다.
두 번째로 우리가 가정해 볼 수 있는 것은 이제 더이상 극 텍스트들이 씌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가정은 지난 반세기 동안 수준 있는 연극 대본이 발표되지 않았다는 판단에 근거한다.
예를 들자면, 로제흐 브리니(Roger Vrigny)의 아름다운 작품들(『아라벨르의 탈취(L’Enlèvement d’Arabelle)』, 1952와 『반사경의 즉흥극(L’Impromptu du réverbère)』, 1954) 이후로는 이렇다 할 작품이 발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러한 가정은 더욱 설득력을 지닌다.
결국 로제르 브리니조차도 『아르방(Arban)』(1954)과 『무쟁의 밤(La Nuit de Mougins)』(1963년 페미나 상 수상작)과 함께 주목받는 소설가로 방향을 선회하고 말았다.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마르크 휘마롤리(Marc Fumaroli ; 확실히 그는 으젠느 이오네스코(Eugène Ionesco)를 계승하고 있다)가 1996년 1월 25일에 행한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에서의 초청 강연을 통해 언급한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1950년은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La Cantatrice chauve)』만이 『시원시원한 영국인(L’Anglais sans peine)』에 필적하는 시기였다는 점이다.
E.. M. 씨오랑(Cioran)을(여기에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다른 작가하고는 달리 『능지처참(Écartèlement)』이란 작품을 통하여 아포리즘(aphorismes)을 다룰 줄 알았던 작가이기도 했던) 친구로 둔 루마니아 태생의 망명 작가가 1950년에 유일하게 발표한 이 작품은 바로 연극 자체를 위해 씌어진 것이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사샤 기트리(Sacha Guitry)와 마르셀 아샤르(Marcel Achard)는 다른 장르로 나아갔으나 이에 비해 장 아누이(Jean Anouilh)와 마르셀 애메(Marcel Aymé)는 자신의 대표작들을 무대에 올렸다.”
여기에 장 꼭도(Jean Cocteau)나 프랑수아 모리아크(François Mauriac), 몽테흘랑(Montherlant)의 작품들을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세느 강의 두 기슭이라 일컬어지는 프랑스 현대 연극에 있어서의 두 경향을, 또한 마르크 휘마놀리가 적절히 예시했듯이, “파리(Paris)라는 뇌(腦) 두 쪽”의 의미를 보다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머리 여가수』는 확실히 연극의 성격을 보다 명확히 특징지은 희곡 작품임에 틀림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이 작품은 텍스트의 연극임을 비롯하여, 텍스트의 해체를 통해 제시되는 연극이고, 스미스 부부와 이들의 이웃이라 여겨지는 마흐탱 부부에 의해 전적으로 행해지는 어휘들의 연극임은 물론, 정신 착란 상태에서 토해지는 어휘들의 연극임과 동시에, 또한 어휘들과 함께 이루어지는 헛소리의 연극에 해당한다.
이오네스코의 또 다른 작품들, 즉 『코뿔소(Rhinocéros)』(1959)나 『죽어가는 왕(Le Roi se meurt)』(1962)은 발 빠르게 고전주의 작품의 특징들을 취한 작품에 속하기도 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코뿔고둥(la rhinocérite)에 저항하던 베랑제는 인도주의의 마지막 옹호자이면서 단발마를 외치며 죽어가는 군주 베랑제 1세가 되는데, 군주인 그가 측근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는 극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나는 죽어가오. 잘 들어보시오. 나는 죽어간다고 말하고 싶소. 나는 그것을 이야기하지는 못할 것이오. 나는 단지 문학만을 했던 것이오.”
예컨대 1950년대의 연극을 우리는 이른바 ‘부조리극’이라 이름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인용한 숨넘어가는 베랑제의 단발마는 말하고자 하는 것과 이야기되는 것사이의 비타당성 위에 위치한 ‘문학’을 보다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마르크 휘마놀리 역시 “일상생활에서 평범하고도 진부한 어휘들과 상황들, 또한 규정들에서 비롯되는 내적인 우주의 충돌”이란 기괴한(grotesque) 부조리에 더욱 근접해 가고 있다.
우리는 마르크 휘마놀리의 연극을 통해 규칙의 연극 저 반대편에 불규칙의 연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이 불규칙의 연극은 변형된 주제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간이나 어휘를 변형시킨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연극 작품들 속에서 인간은 일그러진 채로 등장하며, 어휘는 어휘 기계에 의해 쏟아지는 온갖 말들로 제시된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그러나 극작가가 마구잡이로 뒤틀림이란 불규칙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불규칙의 연극에 있어서의 대부분의 극작가는 너무도 섬세할 정도로 어휘와 그 밖의 연극적 요소에 대한 순수한 뒤틀림을 보여준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이는 어느 모로 보나 ‘논리적인 불규칙’이란 랭보적인 방법론에 의거해 있다고 보이는데, 이로 말미암아 부조리 그 자체에 대한 의미를 선취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오로지 그와 같은 개념에 의거한 희곡 작품들을 일별하는 것으로 국한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1988년의 탁월한 에세이를 통해 아르노 리크네흐(Arnaud Rykner)가 제시했던 ‘누보로망 극(Théâtre du Nouveau Roman)’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르노 리크네흐의 에세이집은 쉬라스와 뺑제, 샤롯트 등을 다룬 저술이다.
마찬가지로 1971년에 코메디 프랑세즈(Comédie–Française)에 새로 부임한 피에르 뒤(Pierre Dux) 극장장이 처음으로 ‘신예 작가들을 위해’ 국립 극장 무대를 개방하기로 결정한 뒤로, 처음 공연된 신예 작가들의 작품들 또한 예외로 취급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세 작품을 연속적으로 되풀이하여 공연하는 새로운 시도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로맹 바인가르텐(Romain Weingarten), 롤랑 뒤비야르(Roland Dubillard), 프랑수아 비에두(François Billetdoux), 『흥행사(Le Montreur)』의 앙드레 쉐디드(Andrée Chedid), 기 후아씨(Guy Foissy), 『완전한 속임수(Architruc)』의 로베르 뺑제(Robert Pinget), 가브리엘 꾸쟁(Gabriel Cousin), 장-클로드 그륌베르(Jean–Claude Grumberg), 르네 드 오발디아(René de Obaldia)의 작품들이 이때 새롭게 공연되었다.
“월요일마다 찾아오는 늙수그레한 단골 노인네들, 아방가르드에 사로잡힌 나의 여인네들 르 투루아데크(Le Trouhadec)를 나는 되찾았다.”
같은 해 3월 10일, <투쟁(Combat)>지는 세 번째 공연 작품의 주제에 대해 그와 같이 마튜 갈레(Mathieu Galley)의 평론을 싣고 있다.
또한 우리는 프랑스 연극에 지대한 공헌을 한 미셸 비나베흐(Michel Vinaver)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질레트 극장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드라마 작가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Coréens)』(1956)을 비롯하여 『이피게니아 호텔(Iphigénie Hôtel)』(1960-1963)에 이르는 본원적이고도 풍부한 주제를 다룬 다작가이기도 하다.
1980년 11월 25일, 야니 코코스의 연출로 샤이오 국립 극장에서 초연된 미셸 비나베흐의 『반전(反轉, À la renverse)』을 보면,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작품 속에서 우리가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도 극적인 요소가 함축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989년에 발표한 그의 새로운 ‘즉흥곡’ 『마지막 분발(Le Dernier Sursaut)』은 기존의 작품들과는 달리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 모험작에 가까웠다. 이 작품은 몰리에르의 죽음을 바탕으로한 예술에 대한 실험작으로 몰리에르 기념관(la maison de Molière)에서 초연되기도 했다.
누벨 소르본느(파리 제3대학) 연극학 소장이기도 한 비나베흐 교수는 연극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성찰을 지속적으로 작품화하는 데 성공한 극작가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연극이 텍스트를 통하여 마침내 연극을 구원하기 위한 언어에 집착하고 있는 이상, 이를 여실히 증명해 줄 수 있는 극에서의 역설에 대한 분석을 시도해 보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이오네스코를 계승한 수사학상의 한 탁월한 전문작가가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 탁월한 전문 극작가가 ‘대사(Words)’ 속에서 자신의 극중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을 콜테스(Koltès)라 이름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극에 있어서의 글쓰기가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이 젊고도 재능에 넘치는 작가는 그러나 1989년 너무도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너무나도 빨리 무대에서 사라진 그의 작품들이 199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대중에게 선보이게 되었다는 점 또한 콜테스란 한 작가의 비극적 생애를 함축해 주는 한 요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