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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극에서의 부조리 1

프랑스 문학의 오늘 50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고도를 기다리며> 한 장면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어는 진부한 표현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하기에 이 시대의 철학가들과 작가들은 일상어가 지닌 진부함을 속속들이 파헤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 한 사람 이오네스코만큼 그렇듯 집요하게 일상어의 진부함을 아주 재미있으면서 통렬하게 귀에 거슬리는 듯한 표현을 동원하여 폭로하고 있지는 않다.


으젠 이오네스코(Eugène Ionesco)


이오네스코는 이를 두고 『통보와 통보에 반하여(Notes et contre–notes)』에서 ‘언어의 비극’이라 일컬었거니와, 언어의 자동 현상에 입각한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위한 말하기’를 제시한 방법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오네스코의 『통보와 통보에 반하여』, 갈리마르.


이 자체가 바로 상투적인 표현에 해당하나,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오네스코의 이 특이한 말하기는 바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아무 불편 없이 사용하고 또한 소모하고 있는 일상적 표현, 즉 ‘순조롭게 표현되는’ 일상어 자체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오네스코가 이러한 일상적 표현이 지닌 동어 반복 현상을 제시하기 위해 그와 같은 표현을 거부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좀 더 분명하게 이야기하자면, 이오네스코의 그 같은 표현만이 동어반복의 특징을 지닌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 생각으로는 그러한 진부한 표현은 말뿐만이 아니라 몸짓 표현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다.


말, 그뿐만 아니라 사무엘 베케트가 연극의 극중 장면으로 채택한 바와 같이 ‘말이 없는 행동’일 수 있는 그것까지도 포함해야 한다. 순환적인 이러한 극중 행동은 광기의 표징으로써, 또한 결국 부조리의 징후로써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이 시작도 끝도 없는 연극의 순환적인 과정은 파국으로 진행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꾸준히 시작의 처음 단계로 관객을 이끌어 갈 뿐이다. 따라서 연극은 관객으로 하여금 더 이상 시작의 끝이 어디쯤인지를 구별하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만든다.


우리는 극에 있어서의 이 같은 순환의 경우를 앙토넹 아르토(Antonin Artaud)의 작품 속에서 무수히 발견하곤 하는데, 1948년 그의 죽음이 불러온 비극을 감안해 본다면 형이상학에 깊이 침윤된(잔인성에 관한 두 번째 편지에서 읽히는 ‘삶의 소용돌이’와도 같은) 작품들이나, 그만의 독특한 무대 장치(관객은 연기자들이 형성한 순환하는 원에 둘러싸이게 된다)에서, 또한 연극적인 몸짓(형차(刑車)에 매달린 베아트리스 첸시의 형벌은 말할 것도 없이 작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심상(l’image)이자 우리들의 운명을 표상하고 있다)을 통하여 순환적 행동이 극 중에서 수없이 되풀이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앙토넹 아르토와 그를 추모하기 위한 연극 한 장면.


그러나 내게는 앙토넹 아르토 역시 작품 속에서 재차 의미를 불러일으키고자 시도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그가 집착하고 있는 의미가 무의미의 상징체계로 나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연극과 연극의 이중성(Théâtre et son double)』(1938)의 서문 말미에서 앙토넹 아르토는 표명하고 있기를, 연극이란 ‘삶의 의미’를 재차 새롭게 해야만 하며, “인간은 두려움을 모르는 채, 그 자신 아직 도달하지 못한 대가(le maître)다운 면모를 갖추어야만 하고, 동시에 그로써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앙토냉 아르토, 『연극과 연극의 이중성』, 1938, 갈리마르.


이처럼 아르토는 순환적인 행동과 세상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는 힘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발견해 간 작가였고, 또한 그 자신이 극에 있어서의 순환하는 원들(cercles)의 창조자이기도 했다.


마틴 에슬린(Martin Esslin)은 싸르트르와 까뮈에게 있어서 부조리극과의 상관관계에 어떤 차이가 내재하고 있음을 실증한 바 있다. 그는 이 두 인물이 부조리극과 관계할 때 상존하는 차이를 다음과 같이 제기하고 있어 흥미롭기까지 하다.


마틴 에슬린, 『부조리극』


에슬린이 표명한 바에 따르면, 싸르트르와 까뮈는 “냉철하고도 논리적인 추론의 형식을 통해 인간 조건의 비합리성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표현한 경우에 해당하며, 그들의 이러한 생각은 부조리극을 통하여 그와 똑같은 인간 조건의 상황에 대한 의미를 표현할 수 있고, 또한 부조리극이야말로 이성이 불충분한 것임을 제시하기에 적당하다는 인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두 작가의 태도로 볼 때, 이성적인 추론들이나 논리적 추리에 의한 사유를 짐짓 폐기함으로써 부조리한 인식을 불러일으켰다는데 그 변별적 특징이 놓인다. 싸르트르와 까뮈가 과거 프랑스 극의 틀에다 새로운 내용을 주입하고 있는 동안에도 부조리극은 그들이 표현한 작품들 속에서 점점 더 부조리극 자체의 근본적인 가설들과 형식 사이에서 단일성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시도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에슬린의 말을 종합해 볼 때, 싸르트르와 까뮈는 내용 면에서 부조리 극과의 연관성을 맺고 있을 뿐이지, 그 들이 시도한 극의 형식에 있어서는 부조리 극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작품을 다르게 바라보는 구시대의 케케묵은 이분법적 태도에 식상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에서 까뮈가 나열해 간 일상의 권태로운 속박으로부터조차 쉽사리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알베르 까뮈, 『시지프 신화』


“기상, 전차, 사무실 또는 공장에서의 아침 4시간, 점심, 오후 4시간의 노동, 저녁, 취침, 그리고 월 화 수 목 금 토 매일 똑같이 되풀이되는 일과(日課)”로부터, 그리고 흔히 길거리에서 보게 되는 두 남녀,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방과 후에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그들의 아이를 기다리고 있고, 생일을 기다리며, 시골에 집 한 채를 장만하고, 작은 차 한 대를 살 수 있는, 수입의 증대와 삶의 질적 향상을 고대하는 순간을 그린 클로드 모리아크(Claude Mauriac)의 『대화(La Conversation)』(1964)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일반화의 도식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클로드 모리아크의 『대화』, 1964.


혹은 매일 똑같은 행동과 태도를 되풀이하는(구두를 벗는다. 다시 싣는다. 모자를 벗는다. 머리에 모자를 다시 눌러쓴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에서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일상의 기다림은 어떠한가?


노벨상 수상 작가인 사무엘 베케트와 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한 장면.


50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이 기다림은 태초 세상이 시작되던 그때부터 지속되어 온 기다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 기다림은 또한 항상 같은 식의 되풀이와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은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슈베르트와 그의 아내 마들렌느는 또다시 이오네스코의 『의무와 희생자들(Victimes du devoir)』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이오네스코의 『의무와 희생자들』


마들렌느 : (일을 하다 그만둔 채) 신문에 뭐 새로운 것 없어요?

슈베르트 : 아무 일도 없어. 뭐 혜성들이 나타났다가 우주 어디론가로 사라졌다나 뭐 했다나. 아무것도 새로울 게 없군. 이웃집 개들이 사람 다니는 길에다 똥을 쌌다고 벌금 통지서가 교부됐다는 것 말고는.


그러나 어떤 이유로 말미암아 전쟁 이전이 아닌 오로지 전쟁 이후에만 부조리의 아이들이 태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다.


이오네스코는 부조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작품을 드라마틱한 장광설로 채워간 경우에 해당하며, 또한 부조리 극의 전형적인 본보기이기에 충분한 새로운 구성으로 각색해 간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씌어진 이오네스코의 희곡 작품은 사무엘 베케트의 극 자체를 지극히 하찮은 것 때문에 못난이(Job)가 비탄에 젖는 장면들과 결합시킴으로써 새로운 효과를 자아내기도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볼 때는 까뮈의 인물들(못난이와 같은)과 베케트의 극중 인물들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예컨대 그와 같은 차이는 부조리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부조리 속에 살아가지만 그들은 깔리귈라(Caligula : 까뮈의 작품 제목이면서 작중 인물)처럼 부조리 자체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베케트의 극 속에서 유충 상태에 놓인 존재들에게는 『시지프 신화』의 내용을 이루는 부조리가 결여되어 있기까지 하다. 다시 말해, 베케트의 극중 인물에게는 세계의 ‘불합리성’으로부터 “인간의 내면, 그 가장 깊은 곳에서 반향하는 부르짖음이란 불꽃의 열렬한 열망”에 이르기까지 서로 ‘대치’를 이루는 부조리성이 불충분하게 게재되어 있는 것이다.


까뮈의 작중 인물들은 생각한다. 그런데 이 “생각하기를 시작한다는 것은 바로(그 자신이) 황폐화되어 가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케트의 극중 인물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인물들은 생각하는 기계를 작동할 뿐이며(모자를 벗는 장면에서의 럭키가 그러하다), 비논리적인 어휘의 범람 현상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을 따름이다.


이오네스코의 경우에는 오히려 까뮈와의 유사성에 그 자신이 애써 스스로 거리를 취하려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렇듯 이오네스코는 부조리(absurde)와 부조리한 성향(absurdité)이라는 두 어휘를 사용함에 있어서 상당히 주저한 듯하다. 왜냐하면 “부조리나 부조리한 성향이란 단어는 이미 한물간 어휘에 불과하다”고 이오네스코 자신이 에디트 모라(Edith Mora)라 불리는 한 인물과의 대담에서 밝히고 있거니와 자신의 극을 설명하기 위해 쓴 「극에 관한 노트(Notes sur le théâtre)」에서 다음과 같이 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가 부조리 작가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길거리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구시대의 유물이라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어쨌든 부조리란 말은 오늘날 매우 모호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이 말은 더 이상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기를 원하는 경우나, 아니면 모든 것을 너무도 쉽게 정의해 버리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말일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오네스코의 이러한 점 때문에라도 그가 본질적으로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개념을 떠올림에있어서 까뮈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했는지의 여부를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에디트 모라는 덧붙이기를, “부조리란 바로 인간이 그것을 설정한 존재의 내면에 자리 잡은 어떤 종류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존재의 내면에는 모든 것이 논리정연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부조리는 없다고 생각될 따름이다. 그렇기에 부조리란 바로 실존의 행위이자 놀랍게도 실존하고자 하는 행위 자체라 할 수 있다.”


에디트 모라는 이에 더해 다음과 같이 표명하고 있다.


“실상 세계에 존재하는 것 자체는 내게 부조리하게 여겨지지 않으며, 단지 놀라운 일일 뿐이고 존재와 세계의 내부에서 우리는 명확한 인식을 갖출 뿐만 아니라 또한 ‘이성적인’ 것에 기초한 법률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동시에 ‘논리적인’ 것에 기초한 규칙들을 설정해 나갈 수가 있다. 그러하기에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존재의 원천들을 향해 거슬러 올라갈 때 발생하는 문제이며, 존재가 존재 주변에 위치할 때, 또한 그 주변에 위치한 존재가 존재의 총체 속에서 자신의 실체를 바라보게 될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실상 이오네스코는 그가 생각했던 바와는 달리, 더해 그가 이야기한 것과는 다르게 까뮈로부터 그렇게 먼 곳에 위치해 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세계에 의해 일그러진 존재였다고 느낀 감정을 『통보와 통보에 반하여(Notes et contre–notes)』를 통하여 이미 직접적으로 표명했듯이, “단지 (그 자신이) 열세에 놓일 뿐인 부조리에 대한 논쟁을 (그 스스로) 이끌어 가는 것과는 달리 육중한 무게에 짓눌린” 존재를 자신의 작품 속에 다루는 것만으로 만족한 듯하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다른 작품 속에서도 똑같이 찾아지는데, 예를 들면 『시지프 신화』에서 까뮈가 묘사한 것에 대한 연장이라 할 수 있는 무더기의 축적을 보여주는 『의무의 희생자들(Victimes du devoir)』에서의 장면이나, 가구들에 의해 질식당하는 『새 입주자(Le Nouveau Locataire)』의 장면들을 매개로 하여 이오네스코는 세계에 의해 짓눌린 존재의 참담한 실상을 그려나가고 있다. 『코뿔소(Rhinocéros)』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목석같은 인간 형태에 대한 우의적인 묘사에 해당한다.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 신화』
이오네스코의 『새 입주자』, 『의무의 희생자들』 그리고 『코뿔소』.


확실히 이오네스코의 연극의 출발점은 존재 혹은 실존에 대한 본원적인 시각에서 찾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어린 아이였을 때, 이오네스코는 인도를 걸어가고 있는 행인들에게서 ‘유령의 그림자들, 혹은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음영들’ 또는 ‘빈사상태의 그림자들’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죽음이 지닌 전능함과 죽음 자체가 수반하는 허무한 허망함(vanitas vanitatum)은 부조리극에서 첨예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 베케트의 『오 아름다운 날들(Oh les beaux jours)』에서 윌리와 위니가 서서히 매몰되어 가는 과정이라든가, 이오네스코의 『공으로 인형 맞히기(Jeux de massacre)』에서의 끔찍한 장면들, 더군다나 마지막 포옹에 이르기까지 이들 작품 속에서는 죽음에 대한 부조리가 극 전체에 걸쳐 깊게 깔려있다.


베케트의 『오 아름다운 날들』(왼쪽)과 이오네스코의 『공으로 인형 맞히기』(오른쪽) 한 장면.


베케트나 이오네스코가 그들의 극에서 제시한 상황이 까뮈의 극에서 발생하는 상황과 다른 점은 극중 인물에서 비롯하고 있다. 다시 말해, 베케트나 이오네스코의 주인공들은 무의식 속에 허둥대고 있으며, 단지 유희를 즐기고 있을 뿐이다.


『공으로 인형 맞히기』에서의 생존자들은 그들이 구출되리라 믿은 순간에조차 불길에 포위당한 채, “마치 덫에 걸린 쥐들 모양” 바들바들 떨고 있을 따름이다. 위니는 “가엾은 윌리”가 “더 이상 오랫동안” 견디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과 관련한 일들을 떠올릴만한 물건들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 놓으면서 그녀의 가방 속에 들어있는 물건들과 그에 대한 추억들을 갖고 유희를 즐기고 있다.


의식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부조리야말로 작가의 전유물이며, 극중 인물에 있어서조차 서로 간의 대화를 거부하는 것 역시 작가의 특권처럼 생각될 정도로, 이들의 작품은 온통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 여기에서 예외적이게도 유일한 인물은 베랑제다. 극 중에서 차츰차츰 변모해 가는 베랑제는 『인질 없는 살해자(Tueur sans gages)』의 말미에서 자신이 살해할 수 있는 자를 스스로에게 반문하지만, 이 살인자야말로 죽음자체의 다른 형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살인자의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이오네스코, 『인질 없는 살해자』


『죽어가는 왕(Le Roi se meurt)』의 끝부분에서 그는 이와는 반대로 의식을 되찾아 가고 있다. 이처럼 베랑제가 코뿔고둥이란 말에 포위당한 채, 모든 것을 배척하는 인간의 고정관념을 획득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오네스코의 연극은 까뮈의 윤리의식과는 또 다른 무엇이라 할 수 있다.


파스칼 알렉상드르 베르그가 쓴 으젠 이오네스코의 『죽어가는 왕』(folio판)과 극 중 한 장면.


『시지프 신화』가 내포하고 있는 근본적인 물음은 – 부조리함에도 불구하고 생존해야만 한다는 논리에 입각한 – 작중 인물의 입에서 쏟아지는 전혀 의미가 없는 판에 박힌 말투에서 비롯하고 있다. 그들의 입술은 그들의 정신이 제기하지 못한 물음을 제기한다. 예를 들면, 『공으로 인형 맞히기』에서


여섯 번째 남자 : 간혹 무슨 방법으로 살아갈지를 묻곤 하지요. 내 친구 가스통이 말했듯이 삶이란 늘 실패하란 법만은 없으니까, 그렇지 않소?

다섯 번째 남자 : 아마도 죽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여섯 번째 남자 : 그렇게 말하지는 마시오. 재수 없으니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곤은 처음에 기도했던 자살에의 유혹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한 채, 오히려 그것에 질질 끌려가게 된다(“튼튼한 밧줄을 장만하자.”, “그리고 내일 목을 매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인공의 지리멸렬한 행동의 되풀이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처럼, 스스로 목매 달 순간을 기다리는 지루함과 동궤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깔리귈라는 요컨대 ‘최상의 자멸’(까뮈 자신이 영어 판 서문에서 표명했던 바와 같이)을 꿈꾸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그 자신을 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깔리귈라가 자신이 살해됨으로써 모든 것이 끝장나게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무장할 이유가 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주의를 에워싸고 있는 세계를 붕괴시키고 자신의 논리에 따르고 있는 무리들을 점멸시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깔리귈라는 최상의 자멸에 대한 역사인 것이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부조리 극에 더 적절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최상의 자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저급한 자멸이라 생각될 뿐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파멸하는 모든 것(Tous ceux qui tombent)』에서 루네 씨(氏)는 적어도 자신의 갈망과 동경을 통하여 일상의 부조리를 벗어나고 있다. 물론 이는 그 자신의 이상과 죽음을 동경한 나머지 그 자신 스스로 운명에 앞서 죽음을 선택한 수단, 다시 이야기해서 스스로에 대한 조급한 매몰이라 해야 할 것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파멸하는 모든 것』(왼쪽)과 베케트의 극을 연상시키는 현대 연극 <추락하는 그(He who falls)> 극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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