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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극에서의 부조리 2

프랑스 문학의 오늘 51화

by 오래된 타자기


“게다가 내 자신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것에게는 삶에 대한 공포와 전율이 가득 차 있다고 – 솔질하기, 문질러 닦기, 빗질하기, 긁어 지우기, 구두닦이, 빨아들이기, 광택 내기, 바닥 문지르기, 세탁하기, 건조하기, 물 주기, 뒤섞기, 헹구기, 갈아 문지르기, 반죽하기, 심한 피로, 집안일에 관한 말, 온통 먼지를 뒤집어쓴 채, 삶과 행복을 깨뜨리고야 말 고함소리를 내지르며 쿵쾅거리면서 뛰어다니는 이웃집 아이들은 어떻고? 한 주가 끝날 때마다 지옥을 향해 간다는 사실을 자네도 알고 있겠지. 그러나 그 한 주가 일하는 날들이어야만 한다는 법은 어디에 있는가? 수요일은? 금요일은 또한 어떻고? 무슨 이유로 금요일에도 일해야만 하는 겐지! 에, 말이지, 막다른 골목길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나만의 조용한 지하실에서 세월이 내 이름을 지워버린 그 널빤지와 함께, 몸을 눕혔던 침대와 함께, 그리고 빌로드 벽지들과 함께 나는 꿈꾸었단 말이지. 에, 또 그게 말이야, 땅속에 묻힌 그 모든 것 가운데 살아남은 것은 고작 열에서 다섯으로 줄어버렸단 말이지. 그것도 손안에 쥐어진 것들은 원기회복 밖엔 없었단 말이지. 아무것도, 나는 내게 말했지 않았던가, 정식으로 인정된 죽음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더군다나 죽음을 대신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부조리극은 탄생 이전의 단계로 우리를 되돌려놓는데, 우리가 직면한 세계는 바로 출생이전의 세계라 할 수 있는 무(無)의 세계이다. 에스트라공은 양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두 팔은 머리 위에 쳐든 채 양말을 벗는 것조차 단념하고는 총을 개와 맞바꾸고자 한 계획마저도 포기해 버린다. 끌로브는 망원경을 갖고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배꼽을 들여다보는 한 주검의 외부를 둘러다 본다. 넬과 나그는 그들 각자의 쓰레기통속에 태아처럼 몸을 굽히고 들어앉아 있다.


이렇듯이 인간에 대한 영아(infans) 상태로의 퇴행은 확실히 까뮈의 작품이 지닌 극적인 신선함과는 다른 무엇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시지프의 기쁨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나는 더 이상 말할 줄을 모른다.”는 어떤 무언가를 가리키는 이름에 관해서가 아니다.


깔리귈라 역시 아무리 자신 앞에서 이야기하는 희생자들의 언어를 가로막고 나서보았자, 오히려 그는 점점 더 거울 앞에 장광설을 늘어놓는 그들과의 긴 대화 속으로 빠져들어 갈 뿐이며, 끝내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까지 한다. 만일 그가 미쳤다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의 광기는 결코 언어의 구조를 변질시키지는 못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베케트와 이오네스코의 극중 인물은 언어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오네스코의 극에서 “등장인물들은 어느 한 사람 할 것없이 벽들로 변모한다.”(『대머리 여가수』에서 자신의 모습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마흐탱 부부는 이에 대한 표본이라 할 수 있다). 프루스트에 관한 에세이에서 베케트가 표명하였듯이, “어떠한 대화도 가능치 않은 곳에서 대화를 시도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럽고, 저속하고, 가증스러운 것도 없다. 한마디로 집안의 물건들과 대화를 나누는 미친 짓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이오네스코의 희곡 작품 제목으로 원용된 ‘두 사람의 헛소리(délire à deux)’는 그에 대한 적절한 예라 할 수 있다.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와 극 중 한 장면.


여러 사람이 한데 어울려 지껄이는 헛소리가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는 『대머리 여가수』 또한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하여 작가가 왜 이와 같은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작가는 동일한 방법(la Méthode Assimil)에 의해 두 쌍의 영국인 부부를 등장시킴으로 해서, 이들이 서로 대화를 이어나가게 함과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본원적인 진실들을 표명하게끔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빠른 속도로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들, 끊어진 이야기들 다시 이어가는 식의 대화 속에 펼쳐놓는 초보적이고도 예지적인 진실들은 적어도 이들 등장인물들이 일그러져 있고 언어가 뒤틀려 있다는 점에서 정신 착란 상태에서 빚어진 헛소리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주인공들을 통하여 쉼 없이 쏟아내고 있는 말들은 내용이 없는 텅 빈 언어 그 자체이며, 말의 부조리라 할 수 있다. 또한 작품 동기를 파악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극중 인물들 간의 언쟁 속에서 대사는 부조리 그 자체가 된다.


왜냐하면 극중 인물들이 서로의 면전에 던지고 있는 말들은 말대꾸도 아니고, 완전한 절로 된 문장도 아니며, 완성된 단어도 아니면서 오직 서로 아무 관련 없는 음절들에 불과하며 자음들이고 모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머리 여가수』를 통하여 오직 서로 분해된 말들로 이어진 거의 혼란에 가까운 변질된 어휘들의 증식만을 목격할 뿐이다. 다시 말해, 이는 언어가 앓고 있는 일종의 암(癌)과도 같다. 게다가 베케트는 우리로 하여금 건조하고도 메마른 언어를 통해 그가 살해한 언어의 죽음까지도 목격하도록 유도한다.


그처럼 작가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것(Innommable)』에서의 긴 독백을 통하여 완전히 벌거벗겨진 존재의 먹이가 된 채, 허무의 극점에 처한 인간 존재들의 하찮은 객설을 상상해 가고 있다. 더군다나 연극의 대사들은 무용한 말의 되풀이와 수다와 객설로 와해되고 말았다.


두 명의 비평가가 사무엘 베케트의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다룬 저서.


장 오니무스(Jean Onimus)는 이러한 대사를 가리켜 “듣기에 지긋지긋한 웃음소리, 그리고 견딜 수 없는 고함소리만이 난무하는 가운데 극을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완전히 녹초가 되도록 만드는 아주 피곤한 비참함에 대한 표현”이라고 못 박았다.


이러한 표현은 비참한 처지에서 눈물 흘리는 아부, 하찮은 인간 존재의 독백을 구두점도 없이 뒤죽박죽 얽힌 말들로 이어가는 한 방법일 수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의 짤막한 말대꾸들이나 – 신경질적이고도 구조가 완전히 파괴된 말들로 이어지고 있는 럭키의 기다란 ‘주절거림’은 제외하고 – 『오 아름다운 날들』에서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문장을 이루지 못한 말들의 토막들 –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릴 것만 같은 어휘의 낱알들 – 은 아직 그와 같은 파국은 발생하지 않았으나,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것 같은 언어의 파멸이란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와 『오 아름다운 날들』의 극중 한 장면.


여기서 문제는 시간일 따름이다. “빈둥거리지 마!”(『유해(遺骸, Cendres』)에서 앙리는 아다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다. “각 음절은 부차적인 이득일 뿐이야.”『오 아름다운 날들』 2막에서도 위니는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를 객설을 늘어놓고 있는데, 그러나 그녀는 실상 더 이상 이야기할 만한 어떤 이야기도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극은 그럼으로써 천천히 침묵 속으로 가라앉아 간다. 결국 대사가 없는 막을 향해 극은 침몰하고 마는 것이다. 오로지 좌, 우측에서 호각소리만이 들려오고 무언의 인물이 나타나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무대 한가운데 우뚝 멈춰 서면서 연극은 끝난다.


이오네스코가 『통보와 반통보(Notes et contre-notes)』에서 이미 피력한 바와 같이, 부조리극의 경계는 부조리극 자체일 수 있다. 그러나 이오네스코는 스스로가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만일 당신이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동안 음악은 듣지 않고 오직 무용수들만을 바라보고자 귀를 틀어막는다면, 당신에게 그들이 얼마나 우스운 존재들인지, 그들의 동작 또한 거의 미친 짓으로밖에는 이해될 수 없을 것이오. 그렇다면 어떤 한 사람이 난생처음으로 엄숙하게 거행되고 있는 종교 제식을 지켜본다 칩시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 제식은 단지 이해할 수 없으며, 부조리한 것으로밖에 이해되지 않을 것 아니겠소?”


『깔리귈라』는 행동의 양상들을 펼쳐 보이는 전시(展示)와 함께 하는 한 편의 드라마이며, 행동이 얽히는 한 매듭(황제의 명령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이고, 이리저리 뒤얽힌 서로 다른 사건들이 대단원을 향해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 작품에 해당한다.


까뮈, 『깔리귈라』


부조리극조차 전통적인 형식을 매번 폐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이오네스코는 이러한 형식을 자신의 극에서 철저하게 배제해 왔다. 그의 연극은 한마디로 극중 인물 베랑제의 순환(le cycle)이라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예를 들면, 『코뿔소』 같은 작품은 한 편의 드라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질 없는 살인자』의 결말 부분에서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베랑제는 『코뿔소』를 비롯하여, 『대기의 보행자(Piéton de l’air)』에 등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왕』에서는 새로운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이처럼 극중 인물을 통한 삶과 죽음은 이오네스코의 연극 속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이오네스코의 『죽어가는 왕』, 『인질 없는 살인자』 그리고 『코뿔소』, folio 판.


그러나 이오네스코의 첫 작품에 해당하는 『대머리 여가수』는 이러한 되풀이를 적절히 예시한 바 있다. 작품의 첫머리에서부터 스미스 부부는 극이 지닌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 할 수 있는, 일상적이며 위장의 강박관념으로 뒤범벅된 대화를 천천히 시작하고 있다. 게다가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는 언쟁 속에는 이미 앞에서 예시한 바 있는 침묵이 자리하고 있다.


불빛은 꺼졌다가 다시 켜진다. “마흐탱 부부는 극의 첫머리에서 스미스 부부처럼 앉아있다. 극은 마흐탱 부부와 함께 다시 시작된다. 그들은 첫 장면에서 스미스 부부가 서로 주고받은 말들을 그대로 따라 한다. 다시 커튼이 천천히 막 위에 드리워진다.”


이오네스코는 이 몽유병자들의 연극의 첫 장면들을 항상 스미스 부부로 시작할 것을 의도적으로 계산한 듯하지만, 이들의 대리자라 할 수 있는 마흐탱 부부로 할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듯하다.


앙토냉 아르토의 『첸시(Cenci)』의 마지막 장면은 이중의 모순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우주의 구조를 해명하고자 했음은 물론, 극중 유희에 있어서 대가다운 면모를 지닌 극작가이면서 동시에 연출가이기도 한 작가 자신의 자유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부조리극’의 전형에 속한다. 극의 장면은 요컨대 무정부주의적인 표현들로 가득 차 있다.


앙토냉 아르토의 『첸시(Les Cenci)』, 미셸 꼬흐뱅 출판사.


마틴 에슬린의 『부조리극(Le Théâtre de l’absurde)』의 초판본은 영어판으로 1961년에 간행되었는데, 실상 이 책은 1956년에 피이(P). 반덴 보슈 출판사에서 간행된 『부조리의 아이들(Les Enfants de l’absurde)』의 재판에 속한다.


마틴 에슬린의 『부조리극』, 영어 판.


에슬린은 이 책을 통하여 부조리극의 출발점을 전쟁 바로 직전에 씌어진 알베르 까뮈의 기술체들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조리극이 까뮈의 작품들과 함께, 혹은 실존주의와 함께 출발하고 있다는 이야기인가? 『시지프의 신화』(1942)에서 『고도를 기다리며』(1950)까지는 10년이란 긴 세월이 가로 놓여 있다. 비록 이 시기 가운데 『대머리 여가수』(1950)와 1948년부터 49년까지 베케트가 창작한 작품이 놓인다 할지라도 이 10년이란 기간은 극에서의 세대교체를 가리키는 것인가? 그리고 만일 이 기간 중에 세대교체가 발생한 것이라면, 자식들은 아버지를 배반했다는 것인가?


이오네스코는 자신을 실존주의 극작가나 또는 후기 실존주의 극작가로 불리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부조리극’의 작가로 불리는 사실조차도 부인했다. ‘부조리극’이란 용어는 사실 평론가들이나 이러한 유형의 극을 답습하고자 했던 이들이 임의로 사용한 용어였다. 또한 이 말은 브르통이 초현실주의에 있어서 진정한 극작가가 드물다는 판단 하에 이와 같은 용어로써만이 진정한 극작가를 알아볼 수 있다고 믿었던 임의적인 판단에 따른 용어이기도 했다.


베케트는 까뮈보다는 초현실주의자에 가까운 프루스트나 조이스에 더욱 가깝게 근접해 가고 있다. 꽃봉오리가 꽃가루주머니를 터뜨리듯, 예기치 못한 가운데 발생한 부조리극에 대한 논란은 까뮈(1944년에 발표한 『깔리귈라』를 중심으로)와 같은 부조리에 관한 심오한 철학적 바탕 위에서 평생 글을 쓴 작가에 의한 극과 이른바 우리가 ‘부조리극’이라 부르는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비교해 볼 때 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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