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학의 오늘 52화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면 특이하게도 극에서의 순환적인 구조가 각 장에 걸쳐 평등하게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작품의 2막은 1막의 구조를 되풀이하고 있다. 예를 들어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대화를 비롯하여, 포조와 럭키의 등장과 퇴장 / 대화 / 웨이터(garçon)의 출현과 퇴장,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대화의 순환 구조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마지막 두 번 되풀이되는 대화, 즉 서로 주고받는 식의 말대꾸로 이루어진 대사는 서로 동일하며, 또한 고정된 운동 자체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에스트라공 : 그래. 갑시다.
블라디미르 : 갑시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블라디미르가 반복하는 판에 박힌 말투는 무한을 향한(ad infinitum) 되풀이를 환기하고 있듯이, 순환적인 구조를 지닌 극의 되풀이에 대한 적절한 예로 자리 잡고 있다. 극은 전혀 다른 장면으로 바뀌지 않으며, 오로지 같은 장면을 되풀이하거나, 적어도 같은 장면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극 중에서 이뤄지는 끝없는 기다림을 비롯하여 등장인물과의 교체나 충돌은 극과 더불어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까뮈가 시지프의 무한히 되풀이되는 행동에 가치를 부여한 것과는 달리,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모든 것이 무효화되어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이오네스코의 연극에 있어서도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작품 자체나 그만의 독특한 연극적 구성 역시 무용한 것일 따름이다.
1975년에 이오네스코는 다음과 같은 표명을 남긴 바 있다.
“이해할 수 있습니까? 사무엘 베케트 씨가 표현한 것들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예. 그런데 나 역시 사무엘 베케트 씨가 표현한 것과 같은 무가치한 것들을 표현하였지요. 그것은 단지 먼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듯 보이지 않습니까? 먼지이면서 또한 먼지와는 다른 무언가 말입니다.”
이오네스코의 이 같은 표명은 프랑스 연극에 관한 장을 처음 시작할 때 제기했던 물음, 즉 “원을 그리며 되돌아온다.”는 명제를 다시 떠올리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와 같은 표명은 내가 처음에 제기했던 되풀이하기의 도식과는 다른 그 무엇에 해당했다. 그렇기에 이 되풀이하기란 용어가 하나의 도식으로 굳어져 있음으로 해서, 이에 대한 적절한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 되풀이하기란 용어는 모래시계 속의 모래의 고갈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잠정적인 결론에 해당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음 네 개 항의 요지는 부조리극에 대한 잠정적인 결론이라 할 것이다.
1. 알프레드 시몽(Alfred Simon)이 1976년에 펴낸 『기호와 꿈 – 극과 축제에 관한 에세이(Les Signes et les Songes – Essai sur le théâtre et la fête)』에서 표명한 바와 같이 우리는 프랑스 극이 어떠한 바탕 위에 전개되어 왔는지를 살펴볼 수가 있다. 즉, “『의자들(Les Chaises)』이나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 『흑인들(Les Négres)』과 같은 작품들은 1930년에서 40년에 이르는 시기 동안 씌어진 앙드레 말로나 베르나노스, 생 떽쥐베리의 소설과 같은 전쟁 이전의 작품들과 동궤에 놓이는 전쟁 이후의 작품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10년이란 시기동안 비록 앙토넹 아르토의 극이 그만의 독특한 좌절을 겪었다 할지라도 이 시기는 프랑스 극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연극적인 실험 무대였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오네스코와 베케트의 극 속에 짙게 배어있는 흔적들을 통하여 아르토가 극에서의 행동들과 사물들을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그 만의 독특한 언어와 성과 등을 엿볼 수가 있다.
2. 그러나 이 시기는 또한 까뮈가 사상적으로 부조리에다 자신의 문학적 고상함을 부여한 시기에 해당한다. 까뮈가 프랑스 극이란 테두리 안에서 부조리극을 시작할 수 있었던 요인은 바로 그의 사상이 지닌 부조리한 인식 때문이라 보인다. 이에 대한 적절한 예로 『깔리귈라』를 들 수 있다. 극은 그럼으로써 새로운 극적인 형태를 제시함 없이, 극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이전의 극보다는 훨씬 더 치밀하고도 신중한 형태로 자리 잡아갔다.
3. 부조리극은 언뜻 보기에 대단히 참신한 어떤 형태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예를 들어 극의 진행은 무질서하며 혼란스러운 장면이 겹치는 과정 – 등장인물을 비롯하여 행동, 어휘에 이르기까지 – 으로 대체되었으며, 언어의 고갈로 빚어진 극의 정체 현상을 겪기도 했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아르토나 까뮈보다는 『피네간 평야』의 제임스 조이스를 먼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아르토는 순환적인 구조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이를 신성시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까뮈는 운명에 대한 순응과 타자에 입각한 의무를 발견함으로써 순환적인 질서를 깨뜨려버렸다. 『대머리 여가수』나 또는 『고도를 기다리며』에서의 순환적인 구조는 여전히 절망적으로 닫힌 상태에 놓여있을 뿐이다.
4. 만일 이 같이 부조리극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위에 언급한 두 작품, 즉 『대머리 여가수』나 『고도를 기다리며』의 침윤(浸潤) 속에서 부조리극을 오직 하나의 형태를 지닌 것으로 파악하기에는 부조리극은 너무도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러한 나의 견해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취해진 것이다. 예를 들면, 베랑제의 순환이 부조리극에다 까뮈의 극이 지닌 요소들을 무한히 배태시키고 있다는 점 – 비록 그것이 의도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 을 염두에 둔 것이다. 『공으로 인형 맞히기』에 등장하는 검은 옷을 걸친 수사(修士)는 위협적인 그림자로 나타나며, 극의 장면이 전체적으로 초월의 양상을 제시함으로써 극의 모든 요소들을 제거하고 있다는 추측마저 불러일으킨다. 내게 있어서 베케트와 그의 극은 이처럼 풀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하는 한 요인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