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케트 극에 있어서 침묵의 어휘들 1

프랑스 문학의 오늘 53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사무엘 베케트


사무엘 베케트라는 이름은 앵글로 색슨계의 언어적 습관에 따라서 ‘샘’이라 축약되어 불린다. 그러나 문제는 베케트 극의 등장인물들조차 그 이름이 축약되어 불리고 있다는 점이다. 나의 이러한 지적은 사무엘 베케트가 자신의 이름을 축약하여 지칭하고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조에를 말하다(Dis Joe)』에서의 조에(Joe)나 햄릿(Hamlet)과 인간(Homme)임이 분명한 『놀이의 끝(Fin de partie)』에서의 함(Hamm) 등, 이름을 축약하여 부르는 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점이다.


이러한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지니고 있는 어휘의 애매성과 의미의 과적 현상은 아주 섬세한 무엇을 시사해 주기에 충분하다. 이에 더해 연극에서 등장인물들을 지칭하는 방법이 점점 더 경제적인 것으로 변화해 간다는 사실도 암시해 준다.


사무엘 베케트의 <조에를 말하다>(영어판) 및 <놀이의 끝> 연극 포스터.


예를 들어 『희극(Comédie)』에서의 F1(여자 1), F2(여자 2), H1(남자 1) 하는 식이 그렇고, 『왕복(Va-et-vient)』에서의 플로(Flo)나 비(Vi) 또는 루(Ru)가 그러하며(우리는 이 이름들이 미완성 상태임을 짐작할 수 있다), 『걸음(Pas)』에서의 V(voix 목소리)가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점점 더 우리의 호흡을 가쁘게 만드는 이름의 축약 현상은 이미 1953년에 베케트의 명성을 드날린 처녀작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에서 그 전조가 엿보이고 있는데,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하여 질식할 것 같은 호흡 곤란 증상 말고도 아주 낯설고도 특별한 경험에까지 직면한다.


베케트의 <희극(Comédie)> 포스터, <왕복(Va-et-vient)>의 한 장면,『걸음(Pas)』 및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 연극 포스터.


베케트는 말라르메와 같이 침묵의 주제에 사로잡혀 있던 작가였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의미심장하기만 하다. “베케트가 극 속에서 자신이 목적한 바를 아주 훌륭히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휘라는 경탄할 만한 도구를 통해서였다.” “어휘야말로 베케트로 하여금 언어에 있어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게 한 요인이었다.” 작가이기를 거부한 이 반(反) 작가는 그러나 1969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카프카나 셀랑과 같이 글쓰기 자체를 비트는 요소가 바로 어휘들임은 분명하다. 어휘들을 경멸하고 조롱하는 상태에서의 조어 역시 어휘들에 해당한다. 베케트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것(L’Innommable)』에서 “난 어휘 자체이며, 다른 그 무엇들의 어휘들, 바로 그와 같은 어휘들을 만드는 자”라고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베케트의 연극에서 등장인물이 어휘 자체로 불리고 있다는 점이다.


달리 이야기하자면, 『가사(歌詞)와 음악(Paroles et musique)』에서 무기력과 사랑 그리고 노쇠라는 서로 같은 용어들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주책없고 가련한 워드(Words)가 이에 해당한다. 이는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는 기계와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에 질질 끌려가고 있지만, 결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등장인물에 대해, 또한 언어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물론이고 『대사 없는 막(Actes sans paroles)』에 이르기까지 빈사상태의 존재를 끝까지 이용한다는 것 또한 상당히 주저할 만한 일이다.


사무엘 베케트, 『가사(歌詞)와 음악(Paroles et musique)』과 『대사 없는 막(Actes sans paroles)』.


베케트 극에 있어서 부조리를 주제로 한 테마 연구는 끝이 없어 보인다. 베케트의 극을 부조리란 주제를 갖고 분석하는 것 또한 대단히 쉬운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사항은 극이라는 총체적 관점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적 양상이다. 알프레드 시몽(Alfred Simon)은 이러한 점을 말라르메와의 비교를 통해 한층 선명하게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앙토넹 아르토(Antonin Artaud)와의 비교를 통하여 부조리극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밝혀낸 바 있다. 그는 기술하고 있기를,


예술진실이라는 엄청난 주제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이를 작품속에 구현하고자 했던 ‘순수’ 극만을 놓고 볼 때, 말라르메와 아르토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멀리로 나아갔던 작가들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무(無)의 신학 자체로 귀의하려 했던 극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신의 죽음은 그들의 뇌리 속에서 떠나지 않던 대명제였으며, 존재하기 위해서는 신도 필요치 않았고, 극도 필요치 않았고, 오직 생존하기 위해 목숨을 부지하는 것으로부터 조차 자신을 해방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들에게 차이점이 있다면, 아르토는 광기로부터 출발한 여러 갈래의 극을 다루었던 데 반해, 말라르메는 아르토보다 앞서 백지라는 텅 빈 공간에의 연극을 추구하고자 애썼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베케트는 어떠한 극을 목표로 한 것일까? 만일 우리가 그의 극을 보면서 신의 강림을 기대한다면, 그리고 헛되게도 그의 연극이 극적일 수 있는 어떤 요소를 발견하고자 한다면, 그 즉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단지 극 자체인가? 아니면 그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면서 동시에 그의 극이 추구하는 내용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제시하기까지 하는 현존에 관한 문제인가? 그렇기에 그의 극을 대하면서 우리는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극은 부재하는 신에 대한 그 대가라고 말이다.


이오네스코는 『통보와 통보에 반하여(Notes et contre-notes)』에서 부조리한 공기야말로 “종교적으로나 형이상학적으로 근본이 다른” 인간을 짓누르기에 적당하며, 이 ‘뿌리 뽑힌’ 인간이야말로 “정처 없이, 무용지물의, 질식할 것 같은” 삶을 사는 자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이러한 유형의 인간이 카뮈가 표현한 바와 같이 신앙에 등을 돌린 무신론자라고만 볼 수는 없다.


이오네스코, 『통보와 통보에 반하여(Notes et contre-notes)』,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


신은 죽었다. 베케트가 이야기한 것처럼 신은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노쇠한 끝에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경건하고도 고매한 신앙을 토대로 한 이 근본주의자인 개신교도는 그가 전혀 회피한 적이 없는 신을 살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신은 그야말로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럭키가 알아듣기 힘들 만큼 빠른 속도로 이야기해 가는 가운데 언뜻언뜻 드러나는 “흰 수염 달린 개인화된 신인 까까까까”인 것이다. 베케트는 그렇듯 “표정 없고 감정조차 메마른” 또한 “실어증에 빠지기까지 한 신의 형상”을 통해 신의 부재를 늘려 잡아가고 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관한 기자회견문 및 연극의 한 장면.


만일 신이 신의 외양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면, 신은 베케트가 만들어낸 인물들과 같이 흰 수염 달린 노인네일 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럭키는 하얀 수염을 달고 있다면, 뽀조는 완전히 대머리를 하고 있고(『고도를 기다리며』), 함 역시 그의 양친인 넬과 나그처럼 늙은 모습이다(『놀이의 끝)』. 윌리는 기다란 콧수염을 하고 있으며(『오! 아름다운 날들(Oh les beaux jours)』), 메이의 모친은 여든아홉이나 아흔이 된 노인네다(『걸음』). 이들 등장인물들의 노쇠는 결코 죽지 않는 존재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떨어지는 모든 사람들(Tous ceux qui tombent)』에서 엠(M). 루네는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실명이 내게 안겨준 것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만일에 내가 귀머거리였거나 벙어리였다면, 100살이 되도록 이어온 나의 삶은 어느 한순간 끝장나고 말았을 것이다.”


무표정한 인간, 그와 같은 인간은 “자 갑시다”라고 외치지만 결코 자리에서 일어설 줄을 모르는 두 인물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가리킨다. 무감정 상태의 인간, 휴지통속에 갇혀 있는 앉은뱅이 즉, 전혀 미동조차 없는 넬과 나그를 가리키거나, 『희극』에서 엿볼 수 있듯이, 항아리 속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3명의 인물을 가리킨다. 실어증에 빠진 인간, 그는 조에와 같은 인물이다. 조에는 정확히 이야기해서 신앙이 독실한 인물이다. 그를 귀찮게 따라다니는 것은 다름 아닌 그를 힐난하는 목소리다.


“이 시대에 너희 주님은 어떻게 강림하더냐? …항상 유리하다고? …항상 터진 옆구리라고? …성부 조에를 위해…”(『조에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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