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학의 오늘 54화
[대문 사진] 사무엘 베케트
행위는 중요하다. 베케트의 작품은 역설적으로 선(善)의 논리를 띤 기독교에 근거를 둠으로써 공허를 피해 가고 있다. 포조는 성 구세주라는 이름이 붙은 장터로 럭키를 데리고 가나(『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 결코 그곳에 이르는 일은 없다. 에스트라공은 예수 그리스도와 닮기를 원한다. “내 삶의 모두를 통하여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나를 비교했었다”라고 에스트라공은 블라디미르에게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에스트라공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맨발로 걸어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스스로의 모습을 그려보기까지 한 것이다. 『놀이의 끝(Fin de partie)』에서 함(Hamm)은 성자 그리스도와 희생자의 모습으로 특징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그는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피와 땀에 전 붉은 옷을 걸치고 등장한다.
이 피와 땀에 흠씬 절은 붉은 옷은 그리스도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예수의 얼굴 즉, 성면상(聖面像)인 수다리움(sudarium)을 가린 수의(壽衣)였던 셈이다. 그렇듯 사무엘 베케트의 『떨어지는 모든 사람들(Tous ceux qui tombent)』이란 희곡 작품 제목은 성서의 시편 145에서 비롯한 것이다. 작품 속에서 루네 부인이 토한 아래 인용한 대사는 아득하고 긴 어떤 순간에 목 매일 이유가 충분히 있음을 입증해 준다.
영원은 사라지는 모든 것을 지탱해 주며,
또한 고개를 수그린 모든 것을 바로 세워준다.
위 인용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두 노인네의 거친 웃음소리는 이 인용문이 신을 조롱하고자 하는 의도로 계산된 것임을 입증해 주기에 충분하다. 인류의 고통을 상기해 볼 때, 이러한 고통을 안겨준 신을 변태성욕자로 볼 수 있는 것이며(『말도로르의 노래(Les Chants de Maldoror)』에서 로트레아몽이 직시한 것은 이러한 유형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2개의 『대사 없는 막(Actes sans paroles)』(비아냥거리듯 휘파람 소리 내기, 부대자루 속의 바늘)에서 등장인물들을 학대하는 신 또한 그런 유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부조리한 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베케트의 작품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을 관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주제는 베케트의 작품들을 오랫동안 관류해 온 주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와트(Watt)』라는 제목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크노트라는 한 인물의 집에서 일하고 있는데,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집주인을 위하여 주인공은 매주 한 항아리 분량의 먹을 것을 준비하고 있다. 크노트의 집에서 쫓겨난 주인공은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구원받지 못하는 도둑들이었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과도 같이 가련한 거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 살아 있는 인물은 비록 다른 이들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고독하고 소외당한 인물에 해당한다. 또한 고도(Godot) 역시 만일 그가 존재한다면, 그는 고독한 신일 것이다. 많은 베케트의 비평가들은 이를 두고 데카르트주의자들의 영향 관계로 풀이하거나(주로 귈랭크스(Geulincx ; 플랑드르의 철학자, 1624-1669), 신학적 염세주의로 풀어 설명하였는데, 특히 후자는 그 자체로 어떤 틀 속에 갇혔거나 무의식을 환기하는(죽음, 노망, 비출생 따위) 의식의 전망을 불러일으킨 한 경향으로 본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베케트의 작품들에 미친 다른 많은 종교적인 특성에 의거한 영향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이 끊임없이 환기하고 있는 지옥의 분위기가 그러하다. 예를 들면, 윌리와 위니를 가둬놓고 있는 ‘이성의 지독한 도가니’는 그와 같은 경우로써 가장 찬란한 이미지에 속한다(『오 아름다운 날들(Oh Les Beaux Jours)』).
그렇기는 하지만 3개의 구덩이 속에 죽은 듯이 꼼짝 않고 있는 가련한 세 인물 F1, F2, H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단지 무슨 말인가를 쉬지 않고 지껄이는 것만이 되풀이되고 있는 『희극(Comédie)』의 닫힌 문은 가장 황량한 이미지에 해당한다.
『성회(聖灰, Cendres)』에서의 앙리의 행동을 두고 우리는 미래 속의 지옥을 떠올릴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승의 삶을 기억하고자 한 행위를 두고 이야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그것은 인간 스스로 죽고자 하는 바에 의해 죽을 수 있었던 지난 아름다운 세월에 관한 레떼의 중얼거림에의 객설, 다시 말해 지옥의 풍경에 해당한다.”
함(Hamm)의 다음과 같은 단발마는 이에 대한 가장 극명한 예일 것이다. “저 세상은...또 다른 지옥에 불과하다(『놀이의 끝(Fin de partie)』).” 함의 이 같은 토로는 이 세상이 이미 지옥임을 함축하고 있다. 단테에서와 마찬가지로 베케트의 작품 가운데에서도 지옥의 순환하는 원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 또한 이러한 삶 또한 지옥의 원들 가운데 하나를 이루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영원을 살고 있으며, 더해 쥘 라포르그가 이야기한 바와 같이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공허감(éternullité)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매 순간은 그처럼 이미 지나간 시간들과 다르지 않다. 달리 이야기해도 매 순간은 미미 흘러간 시간들과 뒤섞여 있는 것이다. 『오 아름다운 날들』에서 “오늘은 어제보다 더 덥지 않다"라고 단언하는 위니는 “내일이라고 해서 오늘보다 더 더운 것은 아니다. 단지 불가능, 또한 계속되는 삶의 상실, 과거와 미래의 상실”이라고 토로해 가고 있다. 시간의 범주들은 벌써 폐기된 지 오래다. “옛날…지금…얼마나 정신을 지치게 만드는지.” 시간에 대한 의식을 되돌리려고 애쓰는 포조는 미친 듯 다음과 같이 써 내려간다.
“당신은 시간에 대한 당신의 이야기로 나를 타락시키기를 멈추지 않았소. 그건 무모한 것일 따름이오! 언제! 어느 시기! 어느 하루, 그것은 당신께 충분치 않소. 또 다른 날들 가운데 되풀이되는 하루도 충분치 않소. 그 하루는 무언의 날일 뿐이고, 나 역시 어느 날 장님이 되었던 것이며, 어느 날 우리는 귀머거리가 될 것이고, 어느 날 우리는 태어났으며, 어느 날 우리는 죽을 것이고, 같은 날, 같은 순간, 그것만이 당신께 충분한 것이 아니었잖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