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미셸 가는 길 238화
[대문 사진] 베 만(Baie des Veys)
이지니(Isigny)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구릉길을 달리기는 하지만, 이곳저곳 작은 마을들을 지나야 만 이지니에 이른다. 가끔은 방향마저 헷갈려 허둥대기도 하는 미로 같은 곳이다. 포엥트 뒤 오크를 벗어나자마자 들어선 이지니를 향한 도로는 베 만(Baie des Veys)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습지대는 천 년 전 기욤이 어린 시절 암살자들을 피해 달아나던 길이다. 어린 공작은 암살자들로 말미암아 궁정을 겨우 탈출하여 이 늪지대를 말을 타고 달려 디브 만으로 흘러드는 강줄기가 활래즈와 맞닿는 지점에 겨우 몸을 숨기고 자신의 측근들을 불러 모아 군신관계를 통해 자신을 보호해 줄 프랑크 국왕 앙리 1세에게 겨우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결국 이 베 만을 통과하여 도망친 기욤은 활래즈에서 군사활동을 익힌 끝에 암살자들을 모두 처단하고 노르망디 공국의 일인자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때가 1047년의 일이니 역사가들은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쫓고 쫓기는 기마행렬
추격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기욤은 밤새도록 7개나 되는 물웅덩이 못을 건너뛰어 커다란 베 만(Grand Veys)을 8킬로미터나 말을 타고 달렸다. 중세 사가들인 바스와 브누아의 증언에 따르면, 1047년의 음모에 따른 어린 공작이 말을 타고 도망친 도망자의 탈주로는 베(Veys) 만(灣)을 가로지르는 늪으로 난 길이었다. [1]
1046년 겨울, 어린 기욤은 발로뉴 성에서 아무 걱정 없는 나날을 보내면서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이 성은 셰르부르까지 이어진 거대한 브릭스 숲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1047년 1월 14일, 기욤 공작은 잠든 상태였다. 자정 무렵, 공작의 ‘어릿광대’인 골레가 공작에 대항하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기욤이 자고 있는 방으로 달려왔다. 어릿광대는 역도들이 한데 모여 못된 사생아를 “처단하자”는 소리에 놀라 한 걸음에 달려온 것이었다. “두려움에 사지를 떠는 사람처럼 공포에 사로잡힌” 기욤은 “신발이나 단화를 챙길 틈도 없이 말을 타기 편하게 소매 없는 짧은 망토만을 걸치고” 말에 올라탄 채 도망치기 시작했다.
역모를 꾸민 무리들이 도착했을 때는 골레가 이들이 기욤을 뒤좇는 것을 지연시키기까지 했다. 골레는 외치기를 “말을 타고 그를 쫓아가 그를 산 채로 잡아서 우리에게 데리고 올 용맹스러운 자 누가 있느냐?”라고 무리들을 향하여 외치는 속임수로 역모자들의 신임을 샀다.
노르망디 공작은 말을 타고 있는 힘을 다해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밤은 아름답고 바람 한 점 없었으며 달빛으로 환했다. 또한 별들이 그를 인도했다. 먼 훗날 기욤은 이곳 몽트부르에 수도원을 건설하는데, 1080년경에 세워진 별빛 노트르담 수도원(L'abbaye Notre-Dame de l'Étoile)이 바로 그곳이다.
어린 공작 기욤은 옛날 옛적에 난 로마인들의 길을 따라 말을 타고 달려갔다. 퐁 페르세 드 후레빌에서는 왼편으로 난 브뤼슈빌로 이어진 갈래길로 접어들었다. 베 만을 가로지를 때 위험스러운 상황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천만다행으로 썰물이 져 물웅덩이 못은 충분히 건널 수 있었다. 이 시간에는 어느 정도 물이 빠져 통행이 가능했다.
흉악무도한 추격자들
“배고픔과 분노로” 비르(Vire) 마을을 지나쳤다. “못을 이룬 물웅덩이 진창을 달리다 불안감이 뇌리를 스치자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 동행인이나 앞서 길을 안내해 주는 사람 한 명 없이 스스로 길을 찾아가야만 하는 절박한 순간이었다.”
마들랜느 위베르에 따르면, 공작이 르 그랑 배 만에 도달한 시각이 새벽 1시 30분경이었고, 생 클레망으로 빠져나간 시각이 4시경이었다. 그는 단 2시간 반 만에 8킬로미터를 주파한 것이다.
기욤은 몸을 숨겼다. 왜냐면 한 떼의 무장한 무리들이 물웅덩이 못을 향하여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아몽 오당의 영지에 속한 매시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이지니(Isigny)가 가까워지자 바이외의 주교를 떠올렸다.
“생클레망 교회에서 어린 공작은 묵상했다. 그러고 난 뒤, 마음 깊은 곳에서 그를 인도하고 있는 하느님께 기도를 바쳤다. 만일 이 도주가 하느님 당신께서 원하신 것이라면, 탈출 또한 무사히 도우시리라.”
교회를 나온 공작은 북쪽 바닷가 길을 따라 말을 달렸다. 그리고 다시 동쪽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려 “바이외와 바다 중간쯤 거리에” 난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포르미니부터 기욤이 달려간 이 길을 오늘날 “기욤 공작이 지나간 로마인의 가도”라 부른다. 기욤은 빌리에르 쉬르 포르를 지나, 북쪽에 위치한 마을 드롬과 오르도 잊은 채, 수시 해구도 지나쳐 오늘날 여전히 유적으로 남아있는 1168년에 세워진 성모 마리아 수도원이 자리한 롱그 쉬르 메르에 이르렀다.
충실한 신하 위베르 드 리
아침 8시경 아침이 되어서야 기욤은 리(Ryes) 마을 언저리에 당도했다. 발로뉴를 출발한 지 꼭 75킬로미터 달하는 거리를 무작정 달려온 셈이다. 그것도 시속 12킬로의 속력으로!
공작은 교회와 봉토 위에 쌓아 올린 흙무더기 둔덕을 발견했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와 줄곧 함께 달려온 말도 “땀으로 뒤범벅이 된 채, 옆구리에선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문 쪽으로 발걸음을 떼자 음모자의 한 사람인 흐누프의 가신 위베르 노인네가 어린 남자가 타고 온 군마의 상태를 눈 여겨 관찰했다.
기욤은 소매가 없는 짧은 망토를 걸친 채, 예전 갈리아(프랑스의 옛 명칭)인들이 입던 바지를 입고 그 위에 슈미즈를 걸치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는 기욤을 농가로 안내했다. 그리고 건강해 보이는 말 한 필을 주면서 세 아들들을 불렀다.
“내 사랑하는 아들들아! 어서 말에 올라타려무나. 어서! 그리고 이 나리를 안내하거라. 이 분이 원하는 활래즈까지 이 분을 모셔다 드려라.”
말을 탄 네 사람이 사라지고 이어 추격자들이 들이닥치자 위베르는 기욤이 말을 타고 떠난 쪽과는 정반대 쪽을 가리켰다. 리(Ryes) 마을의 공동묘지 입구에 설치된 표지판은 이때의 사건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후일 기욤이 신임하는 인물들 중 한 사람이 된 위베르는 영국을 정벌하는 동안 고백왕 에드워드 국왕의 밀사로 활약했고 맨느 지역을 관할하게 된다. 그의 아들들이 기욤 왕국의 주요한 인물들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기욤과 그를 수행하던 세 형제는 바이외에서 비외로 이어지는 옛날 옛적의 로마 길로 접어들었다. 이른바 ‘높이 솟은 길(Chemin Haussé)’[2]이라 부르는 길이었다. 그들은 바이외를 지나 아레제누아(Aregenua)라 불리는 고대 로마시대 때 유적을 따라갔다. 이곳은 예전에 비뒤카스 지역의 수도였다. 뷜리 교회와 지척에 둔 이곳부터는 오흔느 강이 합류하는 지점까지 기뉴의 골짜기를 힘차게 내려가야만 했다.
네 명의 도망자들은 ‘너도밤나무 휘어진’ 후빵당이라 불리는, 지금으로서는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가 어려운 물웅덩이 못으로 이어진 오흔느 강을 지났다. 그 많은 물웅덩이 진창은 건널 수 있는 곳이기는 하지만, ‘높이 솟은 길’에 자리한 뷜리로 가는 길에 로마시대 때 건설된 길이 변함없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이 길은 그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간 길이었을 것이 틀림없고, 북쪽 끝까지 테쏭과 아몽 같은 음모자들의 봉토가 이어져 있었다. 한편으로 보면 이 길이 활래즈에 가장 빠르게 다다를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물웅덩이는 차가웠고 도망자들은 매(May) 골짜기로 숨어 들어가 드디어 산 정상 평탄면에 접어들었다. 라이즈 강이 오른편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먼발치에 퐁트네 르마흐미옹 봉토의 흙무더기를 쌓아 올려 구축한 둔덕이 보이기 시작했다.
후브르 근처의 라이즈 강에서 4명의 도망자들은 목을 축였다. 이어 조르 다리들이 보였다. 디브와 활래즈가 만나는 곳, 바로 이곳이 기욤이 적들로부터 몸을 숨길 마지막 은신처였다. 마침내 공작은 그의 충신들을 이곳으로 집결시키고 몇 달을 버텼다. 그리고 그의 군주이기도 한 앙리 1세 프랑스 국왕을 불러 노르망디 공작의 정통성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왕은 그를 돕고 보호할 의무를 띠고 있었다. 1047년 여름이 막 시작되던 시기 마침내 프랑스 국왕과 공작은 평원 한 복판에서 조우할 수 있었다.
베 만(Baie des Veys)
이지니 쉬흐 메흐(Isigny sur Mer)와 꺄항탕(Carentan) 사이에 움푹 들어간 구부러진 해안을 이루고 있는 베 만(노르만 어로 ‘물웅덩이 못(gués)’이라 불리는)은 브쌩 뒤 코탕탱을 둘로 나누고 있다.
해안선은 8킬로미터에 이르고 면적은 4천 헥타르(1헥타르에 3천 평)에 달한다. 작은 베(Petit Veys) 만에 형성된 물웅덩이 못은 이지니 가까이에 위치한 비르 지역을 가로지른다.
커다란 베(Grand Veys) 만(灣)을 오가는 행인들은 오흐(Aure), 또뜨(Taute), 두브(Douve) 강을 포함해 6개의 하천을 건너뛰어야만 한다. 도보 순례객들은 생트 마리 뒤몽과 생 클레망을 연결하는 상상의 라인을 따라간다. 아래쪽 펄밭까지는 지름길로 가도 13리이외(1리이외에 4킬로미터)에 달한다.
발로뉴에서 바이외까지 여정은 배후지의 늪지대를 가로질러 가는 것을 피해 간다 할지라도 참으로 고된 길이다. 옛적에 이곳은 코탕탱을 향해 가는 여행자들이 반드시 거쳐 가야만 했던 주요한 곳이었다. 수많은 물줄기들이 얼기설기 중첩되어 있고 곳곳에 물웅덩이가 자리하고 있어서 아주 위험한 지역이기도 하다.
기욤은 이처럼 엄청나게 위험한 지역을 그것도 한 밤중에 건너간 것이다! 지금의 활처럼 구부러진 기다란 만은 기욤 시대와 같은 형태는 아니다. 13세기에는 물 흐름에 의한 충적토의 이동은 지형을 바꿔놓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세기에 와서 강가에 제방을 쌓고 바다에 매립지가 생기면서 눈에 띄게 해안선이 줄어들었다. [3]
[1] 여기서부터는 미셀 우흐께, 질르 피바흐, 장-프랑수아 세이에흐, 프랑스 인 세 사람이 써 내려간 역사 기행서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정복왕 기욤』, 오렢 출판사, 파리에서 참조하였음을 밝힌다.
[2] ‘높이 솟은 길’이란 뜻의 슈맹 오세(Chemin Haussé)는 캉(Caen) 평야를 가로지르는 로마 시대 때 만들어진 도로다. 이 길은 아직까지도 비포장도로로 남아있지만, 노르망디 지방에서는 최초로 건설된 도로임과 동시에 이 길을 통하여 북서쪽으로 기독교 문명이 전래되었음을 상기시켜 준다. 이 길은 중세 시대에도 요긴하게 사용되던 길이었기에 프랑스 일부 지적도에서는 ‘기욤 공작의 길(Chemin du Duc Guillaume)’이란 이름이 붙어있다.
[3] 위의 책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