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니를 지나 유타 비치로

몽생미셸 가는 길 240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유타 비치


이지니(Isigny sur Mer)로 차를 몬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최대 피해 지역인 오마하 비치는 점점 아스라이 멀어져만 간다. 이 해안에서 죽은 미군의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지형적으로 가장 험난한 해안에 미군이 상륙을 감행한 탓이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지역 가운데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오마하 비치(Omaha Beach).


미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프랑스를 돕고자 했는지, 히틀러에 신음하는 유럽이란 대륙을 미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오마하 비치에서 깨달을 수가 있다. 누가 죽음에 이른 나라들을 그렇듯 발 벗고 구해줄 것인가?


2024년 한 해가 다해가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 싸움은 논쟁을 넘어서서 계엄이 선포되는 ‘난장’과도 같이 되어버렸다. ‘배가 부르니 뭔 짓을 못하랴’라는 식으로 치닫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참담g할뿐인 대한민국의 정치판을 지켜보고 있는 내 자신마저 한심할 지경이다. 계엄 선포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했다는 점에서 심판받아 마땅하다.


총선 이후에 프랑스 식으로 우리 역시 동거 정부를 출발시켰다면, 이 지경에 이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보수 정권에 진보 정당의 총리가 함께 대한민국의 국정을 이끌어나갔다면, 이 처참한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프랑스는 좌파 정부에 우파 총리가 국정을 이끈 경험이 있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때 총선에서 패배한 좌파 정부는 결국 우파 다수당 출신의 자크 시라크 총리를 받아들였다. 이후로도 또 한 차례 이번에는 우파 정권이 좌파 정당 출신의 인물을 총리로 임명했다. 현재 프랑스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엠마뉴엘 마크롱 정부는 가브리엘 아딸(Gabriel Attal)이라는 30대의 젊은 좌파 진보적 인물을 수상으로 앉혔다.


중도 우파 마크롱 정부에 수상으로 오른 30대의 진보적 좌파 출신의 가브리엘 아딸(Gabriel Attal). © 베에프엠(BFM).


이런 상황에서 헌법이 제정한 대통령의 임기도 7년에서 국회의원 임기와 같은 5년으로 조정하는 헌법을 개정함으로써 정국의 혼란을 미연에 차단했다.


만일 우리도 이런 식으로 정국을 진행시켰다면, 이렇게 비참한 파국은 막았을 것이다. 아쉽다! 남의 나라의 정국 운영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한심한 정치판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렇듯 아쉬움만 남는다.


다시 1944년 6월 6일 시작된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야기로 돌아가면,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만일 미국이 우리의 안보를 지켜주지 않으면 동북아시아의 이 험난한 전쟁 상황의 위기를 과연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극복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물음에 자연 봉착하고 만다.


어느 정치인의 말처럼 주변 국가들에게 “셰셰! 셰셰!”만을 읊조리며 머리를 조아려서 될 일은 아닌 것 같다. 냉철하게 동북아시아의 상황을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국회에서 조폭 정치를 일삼는 한 정치인의 아수라를 마냥 지켜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오마하 비치에서의 상황을 떠올려 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미군이 상륙한 지역인 오마하 비치(Omaha Beach).


나는 미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을 가본 적도 없다. 가보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하지만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을 문제가 아니다. 전쟁의 위기와도 같은 국난에 처했을 때, 힘없는 나라들을 ‘자유 민주주의의 수호’란 명목으로 도와준 나라가 미국이요, 미국 시민들이었다.


그들이라 해서 소중한 아들의 귀한 목숨을 헛되이 생각했겠는가? 자유 민주주의의 수호란 소중한 가치 하나만으로 세계 각지에 파견되어 활약하고 있는 대한민국 장병들은 대체 어떤 이념에 사로잡힌 집단이라 정의해야 옳은가? 확실히 미국은 성조기만으로 남을 나라는 아니다.


오마하 해변 백사장에 꽂혀 있는 성조기.


나는 그래서 그 알량하고도 미천한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대체 대한민국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들이 있는 지를 묻고 싶은 것이다. 구역질이 난다. 구토가 나 참을 수가 없다. 국정을 이 지경으로 파행시키고 있는 이들을 아예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하든지, 아니면 병상에 누워 신물이 넘어오는 이 증상을 어떻게 든 내 나름대로 해결하든지 하지 않으면, 화마저 치밀어 화병으로 숨이 넘어갈 판이다.


유튜브 뉴스 채널을 끈다. 더 이상 대한민국 정치의 저 날라리 판을 지켜볼 수만은 없다. 연예인 행세를 하다 못해 무당들에게까지 나라의 운명을 맡긴 저 ‘추한’ 레이디의 꼬락서니도 영 마땅찮은 건 마찬가지다. 그들이 대체 뭐 길래 대한민국의 운명을 쥐락펴락 하는가 말이다.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핏빛으로 물든 정치판을 패러디화한 삽화.


2019년의 6월의 상황이라 해서 대한민국의 정치판이 다르지는 않았다. 몇 달 있으면 코로나가 온 지구상을 뒤덮어 갈 상황에서 ‘삶은 소대가리’ 문(文)가 놈은 아무 대책 없이 코로나의 진원지 중국이나 드나들면서 혼밥을 처먹고 있었다. 나는 그 꼴이 보기 싫어 노르망디를 떠돌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대한민국은 코로나로 국경이 폐쇄되어 돌아갈 수 없는 땅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이후로 오랜 시간을 폐쇄된 국경이 다시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코로나로 인한 그 길고도 참담한 강제 이동 금지의 나날 속에서 참혹하기만 했던 일상의 매 순간들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내 모든 것이 소진되고 잿더미로 변해버린, 매일 ‘임종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과도 같은 그 암담하고 비참한 나날들을 결코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6월, 꽃피는 계절, 거센 바닷바람에도 몸을 일으키는 풀들의 세상, 소금기 어린 바닷바람을 쐬며 아내의 손을 잡은 나는 정처 없이 노르망디의 해안길을 마냥 걸어가고만 있었다. 내 운명의 길이든, 누군가의 인생의 길이든 상관없었다. 아내와 함께 걸어가는 이 길 위에서 이전에 내가 걸어갔던 길을 내 유일한 가족이자 사랑하는 동반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마치도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가하여 치열한 전투를 치른 미군 노병 출신의 할아버지가 아내에게 자신이 활약했던 전쟁터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 마음처럼.


유타 비치(Utah Beach)


나는 이곳 노르망디 해안가를 직업상의 이유로 수년간을 떠돌았다. 떠돌면서 노르망디가 어떤 지역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인생은 자꾸만 되돌아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걸어간 길을 다시 돌아보고 싶은 것이 인생이다. 내가 이곳에서 밤을 맞이하고 식사를 하고 두 눈을 부릅뜨고 걸어갔던 길을 내 하나뿐인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었던 것은 온전히 내가 나이가 든 탓이었으리라. 젊어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젊은 나는 그렇듯 그저 생각밖을 겉돌고만 있었다.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유타 비치(Utah Beach)


13번 국도로 들어서니 이지니 마을이 가까워온다. 이지니의 정식 행정 구역 명칭은 이지니 쉬흐 메흐(Isigny sur Mer)이다. ‘바닷가의 이지니’란 뜻이다. 이지니란 지명은 월트 디즈니란 성을 낳은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어 이지니란 지명이 영어로 디즈니가 되었다는 설이 설득력을 지닌 이유는 미국인들 가운데 태생이 프랑스인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미국 독립전쟁 이전에는 미국의 일부가 프랑스 식민지였다. 이때 미국으로 건너간 프랑스인들이 상당수다. 캐나다는 말할 것도 없다. 아직도 미국 땅에서 프랑스어가 쓰이고 있다는 건 이를 반증하는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월트 디즈니와 이지니 그뿐만이 아니다. 이지니는 인구 4천에 못 미칠 정도로 자그마한 소도시이지만, 여기서 생산되는 버터만큼은 세계 제일의 품질을 자랑한다고 알려져 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아내가 상큼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늘 아침 호텔 조식식당에서 맛본 버터가 바로 이지니에서 생산된 버터예요.” 나는 아내의 달콤한 귀띔에 눈을 번쩍 뜬다. “아! 어쩐지 버터가 맛있다 했더라.”


호텔 조식 식당에 나온 이지니 버터는 이렇게 동그렇게 말려 있는 모습이었다.


프랑스 지인은 에어 프랑스를 타고 서울서 파리로 올 때 기내식으로 제공되는 버터를 맛보는 순간 “아! 고향땅이 가까워오는구나.”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우리는 김치를 먹어야만이 고향을 느낀다는데, 프랑스인들은 버터를 맛봐야 고향을 느끼는구나 생각했다. 버터들 가운데에서도 이지니 산(産) 버터가 제일이라니 왜 중국인들이 기를 쓰고 공장용 버터를 대거 수입해 가는 지를 이해할 것도 같았다. 맛있는 건 알아서!


길 가다 눈에 띈 이지니 버터 공장과 캐러멜 공장.


구불구불한 길을 돌고 돌아 드디어 코탕탱(Cotentin) 지역으로 들어선다. 코탕탱은 노르망디에서도 아주 특이한 지역이다. 망슈 해협을 향해 불쑥 돌출되어 있는 이 땅은 저 바닷가에 셰르부르(Cherbourg)라는 군사기지 항만을 두고 있을 만큼 대서양가에서 아주 중요한 곳이다. 바흐흘뢰흐(Barfleur) 항구는 천 년 전 기욤과 마틸드가 영국을 오가던 항구다.


1 꺄항땅, 2 이지니, 3 생 마흐쿠프 섬, 4 타티우 섬, 5 생 바스트 라 우그, 6 셰르부르, 7 포엥트 뒤 오크, 8 바흐흘뢰흐.


영국과 가까운 이곳은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일 뿐만 아니라 어업 활동에 있어서도 아주 요긴한 지역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구가 적고 바람이 많이 불어 기후가 그리 좋지 않은 관계로 대부분 지역이 사구(沙丘)로 말미암아 황무지처럼 버려지고 풀이 자라는 땅이라 목초지가 대부분이다.


저 아득한 9세기 바이킹들이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 프랑크 왕국에서조차 어느 누구 한 사람 이곳에 주목하지 않은 역사적 패착이 가능했던 땅, 코탕탱으로 들어서면서 목적지를 유타 비치(Utah Beach)로 수정한다.


미군이 상륙한 유타 비치.


유타 비치는 군 지휘관 오마르 브래들리(Omar Bradley)가 해변의 이름을 선택할 때 현장에 있던 노르망디 상륙 작전 디데이(D-Day) 예비훈련에 참여한 2명의 미국 부사관의 고향(유타)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알려졌다. 유타 비치는 그 이전까지만 해도 매들린 비치라 불렸다.


코탕탱(Cotentin)의 동쪽 지역은 대부분 저지대와 습한 땅으로 매년 겨울마다 홍수로 뒤덮일 만큼 척박한 땅이다. 해안에는 모래 언덕 장벽으로 둘러싸인 넓은 모래 해변이 있으며, 높은 지대에 기다랗게 나 있는 길인 ‘쇼세(chaussées : ‘양말’이란 뜻)’를 타고 어렵사리 건너갈 수 있는 습지대와 분리되어 있다.


이 지역은 특히 상륙 작전에 유리했다. 독일 대 전차 군단을 이끌고 있는 롬멜 원수는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으며,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현장 방문을 몇 배로 늘렸을 정도다. 따라서 베 만(Baie des Veys)과 생 바스트 라 우그(Saint Vaast la Hougue) 사이에 자리 잡은 모래 언덕은 약 30개의 대공포화가 설치된 이른바 ‘저항의 독수리 둥지’인 빈데르스탄트네스텐(Widerstandnesten)이 들어서 있었다. 내륙 지방의 고지대에는 특히 아제빌(Azeville), 크리베크(Crisbecq), 모흐살린느(Morsalines), 라 페흐넬르(La Pernelle)에는 몇 개의 중 포대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초기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연합군은 코탕탱 해안에 상륙할 계획이 없었다. 1943년 12월이 되어서야 아이젠하워와 몽고메리는 셰르부르 항구를 보다 빨리 점령할 수 있도록 베 만(Baie des Veys) 서쪽의 칼바도스(Calvados) 해안에서 이미 상륙을 결정한 해변에 다시 해변 하나를 추가하기로 결정했다. 새롭게 선택한 상륙 지점은 군사 코드명으로 유타 비치였다.


생트 마리 뒤 몽(Sainte Marie du Mont)에서 끼네빌(Quinéville)까지 뻗어 있으며 바흐빌(Vareville)에서 약 2킬로미터의 공격 지역이 이 유타 비치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 무사히 상륙 작전을 감행하기 위해서는 연합군 참모부는 상륙 전날 밤 2개의 낙하산 사단을 투하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들의 임무는 해변 방향으로 독일군의 반격을 막는 것이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라이언 일병이 공수부대 대원으로 낙하한 지점도 바로 이 지역에 해당한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코탕탱 지역에 낙하한 공수여단 낙하산 부대.


미군이 유타 해변에 상륙한 것은 인명 피해가 가장 적었던 것은 물론이고 6월 6일 상륙 작전 개시일이 채 끝나기 전까지 연합군의 초기 목표에 가장 근접한 결과를 거둔 것으로 판명 났다. 미 제4보병사단은 미군이 상륙한 지역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오마하 해변과 대조적으로 적의 저항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덕분이다.


1944년 6월 6일 유타 비치에 상륙 작전을 펼치는 미군 병사들.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 기록 사진.


독일군의 중무장화된 요새는 독일군이 생각할 때 연합군의 상륙이 이 지역에서만큼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판단한 탓에 생각보다 인명 피해가 적었다. 실제로 해변은 늪지로 뒤덮인 장벽 해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군이 유타에 상륙하기 전에 해변으로 나갈 수 있는 습지를 통과하는 몇 안 되는 도로를 통제하기 위하여 생트 메흐 에글리즈(Sainte Mère Eglise)와 셰프 뒤 퐁(Chef du Pont)에서 수많은 공수부대원들의 야간 공중 낙하 작전이 펼쳐져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오마하 해변과 비교했을 때, 유타 해변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인으로 인해 성공적일 수 있었다. [1]


유타 해변은 다른 해변에 비해 독일의 요새화가 적었다. 방어는 주로 홍수 지역에 의해 프랑스 땅 연안으로부터 장벽 해변을 격리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효과적인 사전 공격 폭격 : 생 마흐탱 드 바흐빌(Saint Martin de Varreville) 근처의 해안 포대와 같이 확인된 많은 대형 블록 하우스는 26피트(5,000m) 미만으로 비행하고 강습 부대에 근접 항공 지원을 제공하는 미 공군의 9 중형 폭격기인 B-1,600 매러더스(Marauders)에 의해 파괴되었다.


유타 해안에 설치된 독일군 대공포화를 향해 불을 품는 미군 전함.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 기록 사진.


디디(DD) 탱크 : 32대의 수륙 양용 탱크 중 28대가 오마하 비치보다 유타 해변에 두 배 더 가깝게 상륙하여 망슈 해협으로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에 해안에 쉽게 도달할 수 있었던 요인을 들 수 있다. 탱크를 모는 병사들은 너울을 피하기 위하여 조류에서 더 효율적으로 조종할 수 있었다. 예상보다 더 남쪽 지역에 착륙한 착륙 지역에 대한 오판이야말로 오히려 독일군의 중무장화된 요새가 오히려 적은 해변에 아군을 침투하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다.


1944년 6월 6일 유타 해변에 상륙한 수륙 양용 탱크.


낙하산 부대 : 가장 큰 차이점은 상륙이 시작되었을 때 이미 내륙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던 101 및 82 공수 사단의 13,000명이 있었다. 첫 번째 공격이 시작되기 5시간 전, 낙하산을 타거나 글라이더를 타고 도착한 병력은 해변 너머에서 전투를 벌여 해변을 따라 이동하면서 적을 제거하고 독일군 사이에 혼란을 일으켜 상륙 지역을 향한 적의 조직적인 반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2019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 75주년 기념행사에서 선보인 공수 낙하 훈련.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미군 공수부대가 입은 막대한 손실을 감안했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101 연대는 디데이(D-Day) 하루 만에 병력의 40%를 잃었는데, 이는 낙하산으로의 분산(몇몇은 습지에 빠졌다)과 지상에서의 격렬한 전투로 인한 것이었다.


이로써 상륙 작전 개시 첫날에만 12시간 동안 23,250명의 병력과 1,700대의 전투 차량 및 1,695톤의 보급품 군수 물자가 유타 해변에 상륙할 수 있었다. 그 후 19,500명으로 구성된 미국 특수 공병 여단이 유타 비치에 실제 보급 물자를 구축했으며, 이 여단은 앞으로 몇 주 동안 거의 70,000명으로 증원되었다. 으젠 머더 케이페이(Eugene Meode Caffey) 소장이 지휘하는 부대는 1944년 6월부터 11월까지 836,000명의 병력, 지프에서 기관차에 이르기까지 220,000대의 차량, 775,000톤의 보급품을 해변에 상륙하고 전선으로 수송할 수 있었다.


1944년 6월 6일 개시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모습.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 기록 사진.


실제로 6월 19일의 폭풍에 의해 파괴된 생 로랑 쉬흐 메흐(Saint Laurent sur Mer : Mulberry A라고 함)의 인공 항구를 손실당한 미군들은 이를 해결할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기에 해변은 바지선뿐만 아니라 더 큰 무게의 군함이 순조롭게 접안할 수 있는 인공 부두를 건설해야 했으며, 그 후 상승 조류에 의해 상륙이 가능할 수 있었다.


이 공병 부대의 사령부는 유타 해변에 있는 독일군으로부터 빼앗은 첫 번째 막사에 세워진 첫 몇 주 동안 그 기능을 다할 수 있었다. 미 공병 부대 사령부가 있었던 이곳에는 오늘날 제1 공병 여단 병사들을 추모하는 전쟁 기념비가 서 있다.


유타 비치에 서있는 미국 기념비.


2019년 6월 유타 해변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아내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거닐던 해안이 눈에서 멀어질 때쯤 나는 생각에 잠겼다.


유타 비치에 바람이 분다.


처음 군에 입대하여 조치원 훈련소에서 유격 훈련을 받던 그날 밤 찬물로 머리를 감은 것이 화근이 되어 4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려 결국 조치원에 소재한 국군병원으로 이송되어 중환자실에 누워있을 때, 내 몸 상태는 약 49킬로에 달하는 몸무게였다. 대학원을 휴학하고 군에 입대했으니, 몸 상태가 신병 훈련조차 받을 상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입원 다음날 아침 병상에 누워있는 내 앞에 환한 모습을 나타낸 이는 국방부 소속 간호장교 이혜숙 중위였다. 그녀는 친구의 아내였다.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내 이럴 줄 알았어. 죽지 않으니 걱정 마요.”하며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그녀를 향해 피식 웃으며 “제발 옷 좀 갈아입게 내일 아침에 속옷 좀 가져다줘요.” 그녀에게 사정했다. 잠시 입원해 있는 동안, 그녀는 내게 온갖 배려를 다해주었다. 내 군 생활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그 상황을 평생 잊을 길이 없다. 유격훈련을 받던 뜨거운 봄날의 대낮도 선명히 기억되지만, 찬물로 머리를 감던 조치원 훈련소의 수도꼭지도, 고열에 시달려 의무실로 실려간 상황조차도, 이후에 나를 찾아온 사촌 동생의 친구 모 중사의 얼굴마저 또렷이 기억될 만큼 나는 허약했고 군에 아무런 의지가 없었다.


그런 내가 남의 나라 남의 땅에서 그것도 천 년 전이나 20세기에 지상 최대의 군사 작전이 펼쳐진 노르망디에서 군 생활을 떠올린다는 것이 우습기도 했다. 머쓱해진 나는 아내에게 돌아가자 말했던 것 같다. 어디로 다시 떠나고 싶었다. 무작정 유타 해변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부끄러운 건지 창피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의 감정은 석연치 않은 것이었을 뿐이고, 나는 마냥 해변에서 달아나고만 싶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운전대를 잡고 향한 곳이 빅토르 위고가 망명을 떠난 영국령 건지 섬에 가까운 대서양 바닷가 작은 포구 마을 바흔느빌 꺄흐트레(Barneville Carteret)였다.


유타 해변 바닷가에 둥둥 떠있는 난파선.







[1] 노르망디 상륙 작전 전쟁 박물관 홈페이지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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