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학의 오늘 69화
[대문 사진] 장 에슈노
확실히 모든 점에서 장 에슈노(Jean Echenoz)는 프랑스 문학이 요구한 포스트모던 작가였다. 이 새롭게 등장한 포스트모던 작가는 『호수(Lac)』로 말미암아 작가적 명성을 쌓기 시작한 1989년부터 작가 스스로 『호수』와는 다른 소설을 쓰겠다고 다짐한 뒤 세상에 발표한 『금발을 한 큰 키의 여인들(Les Grandes Blondes)』의 1995년에 이르기까지 보기 드문 찬사를 한몸에 받은 어느 모로 보나 포스트모던 작가였다. 그러나 이 후자의 작품 『금발을 한 큰 키의 여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 에슈노만의 독특한 표현이 고스란히 되살아난 소설에 해당했다.
1989년과 1995년 사이에 또 다른 작품 하나가 두 시기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온전히 작가 스스로의 의도에 따라 이 두 시기를 단절하고 있는 작품은 다름 아닌 ‘장르에 관한 작업’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우리 셋(Nous trois)』(1992)이었다.
부연하면, 장 에슈노가 『우리 셋』으로 완결한 장르에 관한 작업이란 다름 아닌 다음의 세 작품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먼저 추리소설로 분류되는 『체로키(Cherokee)』(1983) – 이러한 유형의 소설은 로브-그리예나 뷔토르에 의해 이미 시도된 바 있다 – 모험소설로 일컬어지는 『무모한 짓(L’Équipée malaise)』(1986), 그리고 탐정소설로 불릴 만한 『호수』가 바로 그 예에 속한다.
장 에슈노의 이러한 구분은 그러나 어떤 점에서도 그만의 독특한 문화적 식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왜냐면 나는 단지 그의 소설 『호수』에서 유희와도 같은 글쓰기의 전형만을 읽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혀 의미가 없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이름자를 나열해 가는 작곡가의 성씨(姓氏)와도 같이(비탈 베버(Vital Veber), 프랑크 쇼팽(Franck Chopin), 카알하인츠 슈만(Karlheinz Schumann) 등) 비토 피라네스(Vito Piranese)가 검은 안경을 쓴 채 앞을 예의주시하면서 뒤따라가는 기계적인 걸음걸이 하며, 초췌한 몰골의 노인네 같은 전직 영어 선생 출신의 스테판 말라르메(Stephan Mallarmé)의 재등장이 그러하다고 여겨진다.
로마 가(街)로 말할 것 같으면, 이른바 말라르메를 중심으로 한 문학예술인들의 동인 모임인 <화요회>가 열리던 장소였으며, 『호수』에서 수지 끌레흐가 사는 거리는 『금발의 큰 키를 한 여인들』에서 또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있다.
페르소네타즈 탐정은 파리 생 라자르 역 부근을 자주 오고 가는데, “철길 위로 비쭉이 올라선 둑길이 철길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 로마 가의 중간쯤에서 길을 가로지르듯 서로 다른 쪽으로 나 있는 또 하나의 길인 바티뇰 거리 쪽으로 오르내리[곤]” 했던 것이다. 로마 가 아래쪽으로 길게 뻗어 나간 철길 위를 달리는 기차는 말할 것도 없이 페르소네타즈 탐정이 찾고 있는 여자를 생 라자르 역에 내려놓기도 하고, 아니면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기도 하면서 그와 숨바꼭질을 벌이곤 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말라르메적 관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전혀 중요성을 띠지 않는다는 것이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다시 말해, “도망치지 않는 날아오름에의 투명한 빙하”와 같은 표현 즉, 비의적인 표현이라 여겨질 만한 이러한 표현조차도 암시하는 바가 대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의미가 전혀 게재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에노슈의 소설에 언급되고 있는 미셸 뷔토르(Michel Butor)의 처녀작 『밀라노 가로지르기(Passage de Milan)』(1954)를 생각한다면, 에노슈 소설의 무대가 바로 유럽의 한복판이라 할 수 있는 파리의 한 구역임을 실감할 수도 있다.
더하여 『오디세이(L’Odyssée)』에서 율리시스가 폴리페모스(Polyphème) 앞에서 밝힌 자신의 가명을 떠올린다면, 에노슈의 소설에 등장하는 페르소네타즈(Personnettaz)라는 낯선 이름조차도 전혀 난해한 이름으로는 읽히지 않는다. 『오디세이』에서 율리시스는 폴리페모스에게 자신의 이름을 우티스(Outis) 즉, 그 누구도 아닌 익명의 사람(Personne)이라 하지 않았는가? [여기서 ‘우티시’란 말의 어원을 살펴보자. 트로이 원정을 마친 율리시스(그리스어로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본국 이타케로 돌아오는 도중 외눈박이 거인족들이 사는 키클로프스의 나라에 도착한다. 율리시스는 이 섬에서 식량을 구할 작정으로 몇 명의 부하만 이끌고 선물할 술단지를 안고 섬으로 들어가는데, 동굴에 사는 양치기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에게 붙잡혀 부하들은 거의 죽고 동굴 안에 갇히게 되었다. 동굴을 탈출할 결심으로 폴리페모스에게 술을 먹인 율리시스는 폴리페모스가 이름을 묻자 ‘그 누구도 아닌 익명의 사람’이란 뜻의 ‘우티스’라 이야기한다. 사람 고기와 함께 술을 먹은 폴리페모스가 곯아떨어지자 율리시스는 그의 외눈을 나무창으로 찌르고 동굴을 무사히 빠져나와 다시 본대와 합류한다.]
에슈노의 소설이 지닌 포스트 모더니티가 비록 누보 로망의 모더니티를 넘어선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작가가 자신의 소설에서 노린 것은 등장인물의 영도화(零度化 : 인칭의 무화(無化)를 통한 등장인물의 익명화)였음은 자명하다.
장 에슈노는 등장인물 그것도 전적으로 여성으로 등장하는 인물에게 기존의 소설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깊이를 부여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의 소설을 읽어가면서 그가 설정한 인물의 투명함과 무중력 상태 그리고 가벼움에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결국 에슈노는 이러한 시도를 통하여 “여인의 초상과 빼어 닮은 그 어떤 것을 노린” 것이 아닌가 하는 결론에 망설이게 된다. 여기에서 인용한 구절은 작가가 실뱅 부르모와 마크 바이츠만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헨리 제임스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데, 바로 그 자신 스스로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또한 에슈노는 “정신적으로 아무 문란한 상태에 빠진 한 여인의 초상에 최대한 다가가고자” 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마저 들게 한다. 이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2명의 금발을 한 여인들 가운데 한 명인 글로리아다. 이어 그녀와 일시적으로 함께 하는 라쉘의 경우라 할 수 있다.
항상 문화적 교양 수준에서 시작하고 있는 에슈노의 소설들의 출발점은 고대 문화에 대한 식견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현대 문화에 대한 나름의 이해에서 주어진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1995년의 소설만을 예를 들어도 이 텍스트는 미국 화가 짐 다인(Jim Dine)의 「금발을 한 아가씨들(The blonde girls)」(유화, 목탄, 노끈, 1960)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에슈노가 이미 시준한 바 있듯이, 짐 다인의 작품은 에슈노 소설의 출발점일 뿐만 아니라 소설의 제목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표제어-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에슈노의 다른 작품의 제목들도 역시 이러한 영향 관계 속에 놓여있다. 예를 들어 「뜨거운 기후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개들, 혹은 중요성을 상실한 짐승들」이 그에 해당한다. 문제는 에슈노가 자신의 작품 제목을 위한 자료들을 자신이 태어난 스페인의 마드리드 클럽 도서관에서 참조하였다는 사실에 있으며, 이러한 자료들은 선반 위에서 찬란한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소설들은 영화에 대한 작가의 집착이 만들어 낸 산물이라는 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영화에 대한 집착은 제일 먼저 히치콕의 영화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졌다. 작가는 이상할 것도 없이 “얼음처럼 차가운 금발을 한 여자들”에게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베르티고(Vertigo), 프시쇼즈(Psychose), 마흐니(Marnie) 등은 책 속에다가 그들의 형적을 남겨 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텔레비전 방송국의 시리즈물 제작자인 폴 살바도르가 이들과 관련된 방송을 계획했던 것을 막 실행에 옮기려 하면서도 이를 영화로 제작할 또 다른 연출가를 찾는가 하면, 삶 속에 실제 존재할 수도 있는 금발머리들을 찾아 나서기까지 한다.
로브-그리예의 『고무지우개들(Les Gommes)』에 등장하는 술주정뱅이의 의문들처럼 에슈노의 작품을 점철하고 있는 이러한 의문들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다시 말해, 에슈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실제 인물인가 아니면 허구의 인물인가? 온갖 추잡한 행동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눈짓하고 있는 이 여자들은?
그녀들은 냉혈 인간인가 아니면 냉혹한 인간인가? 그녀들은 잔혹한 여인들인가 아니면 전혀 악의 없는 여자들인가? 글로리아 스텔라 – 주민등록상으론 글루아르 압그릴 –처럼 말이다. 마치 작은 고기잡이배에나 어울릴 법한 이 이름은 그녀와 함께 했던 남자들을 허무감으로 물들게 하지 않았는가? 살바도르는 베르티고에 대한 강박관념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고백에 따르면 그 역시도 이 여인의 사랑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해야만 하는 운명으로부터 벗어난다. 소설의 끝부분은 주인공인 그가 글로리아와 함께 전화 부스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처음 장면으로 되돌려진다.
에슈노의 소설에서 금발을 한 여인들보다 더 중요한 요소는 작품의 주제라 할 수 있는 소멸에 있다. 그러나 이 소멸이란 주제는 조르주 페렉의 소설에서와 같이 문자의 소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더구나 아우슈비츠에 강제 수용된 남녀들에 비추어 본 인간 소멸이라는 주제와도 무관하다. 솔직히 말해 이 소설이 다룬 소멸이란 주제는 다름 아닌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고 있는 실종 사건과 그리 무관하지 않다.
예를 들어 매스컴에서 한창 그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 물론 에슈노의 소설 출간 이후로 – 벨기에 샤를르화(Charleroi)에 사는 뒤트루(Dutroux)라는 살인자에게 희생당한 가엾은 소녀들의 실종 사건과도 같은 성격을 띤 이야기들이 그렇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매스컴은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를 전해주고 있다. 1996년 8월 27일 자 신문의 기사 제목은 「이번의 실종사건 역시 같은 자의 잔인한 수법」이다.
글로리아 스텔라는 실종된 지 벌써 4년째이지만, 그녀는 실종되기 전에 자신의 얼굴이 담긴 사진들과 함께 그녀의 목소리가 마흔다섯 번이나 녹음된 디스켓을 남겨 놓은 덕분에 살인을 당한 사람치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대중의 스타로까지 자리 잡았다.
에슈노는 바로 이러한 사실에 포착하여 그녀에 관한 글을 쓴 것이며, 우리는 바로 그의 글을 통해 해마다 발생하는 수수께끼 같은 수많은 사람들의 실종사건에 접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먼저 실종당한 여자를 찾기 위한 조사 위원회가 구성되고 이후로 3단계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살바도르는 대단히 폭넓은 여러 범주들 가운데 금발머리에 가장 근접한 모델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금발머리를 한 여자들을 다룬 방송 시리즈물 때문이었다.
이 여자들은 어떤 존재가 되는가? 쥬브에 의해 운영되는 조사 위원회는 3명의 탐정과 함께 실종자의 흔적을 따라 추적에 나선다. 3명의 탐정 가운데 한 사람은 장-클로드 카스트너였는데, 그는 밤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금발머리 여자에 홀려 브르타뉴 해안의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두 번째 탐정으로 나선 보카라는 인물은 사건을 수행할 만한 능력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단지 페르소네타즈와 함께 일하게 된 것에 만족할 따름이다.
브르타뉴를 떠난 글루아르가 프랑스로부터 더 멀리 칩거하기로 결심한 은신처는 다름 아닌 프랑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나라들인 오스트레일리아와 인도였다. 프랑스로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그녀는 이른바 오늘날 세상 한쪽 구석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사악한 일들을 그녀 스스로 저지르는 인물에 해당했다. 마약을 비롯하여 매춘, 매혈 등 온갖 추잡하고 사악한 매매 행위가 그녀를 점점 시궁창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프랑스에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초청장을 받기에 이른다. 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돈을 벌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의사 고빨과 창녀촌(lupanar)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고빨의 조수 무빠나르(Moopanar)의 초상을 떠올리게까지 만든다. [창녀촌을 가리키는 루빠나르란 어휘와 작중인물의 이름인 무빠나르의 유사성을 의심해 보자.] 이들 정면에는 금발머리 여자로부터 보호받는 듯한 –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지곤 하는 – 꼬마 난쟁이가 아주 나약한 모습으로 대조적인 모습을 한 채 등장한다. 이 벨리아르라는 이름을 지닌 꼬마 난쟁이는 불안한 존재로 스스로를 방치하지는 않는다. 에슈노는 ‘수호천사’의 이름을 구약 성서에서 발견한 것이며, 그가 인도에 갔을 때 “이 이름이 악마의 이름”을 뜻하고 있음을 수호천사와 함께 환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에슈노는 폴 클로델(Paul Claudel)의 『새틴 구두(Soulier de satin)』를 패러디화한 것도 아니며, 여행 문학의 한 유형에 해당하는 그 무엇을 추구하고자 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컨대 문학보다는 영화 쪽에 더 가까운 장르를 추구하고자 노력한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에슈노의 소설을 읽다 보면 그의 소설이 마치 제임스 본드가 나오는 007 영화의 한 시리즈물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가 어려운 것이다. – 해피엔드(happy end)의 복사판이란 것도 그렇고 글로리아와 살바도르의 허무한 사랑과는 달리 거의 순수한 사랑을 추구하는 페르소데타즈/도나티엔느(살바도르의 비서) 부부에 이르기까지 제임스 본드 풍의 영화 대본을 떠올리게 만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에슈노의 『금발의 큰 키를 한 여인들』은 이미 여러 차례 분명한 예시들을 통해 밝혔듯이 방법적인 차원에서 대단히 폭넓은 범주를 지닌 소설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이 소설은 추리소설과 탐정소설 사이에 위치한다는 점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에슈노는 장-파트리크 망슈트(Jean-Patrick Manchette)의 추리소설들이야말로 자신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띤다고 밝힌 바 있는데, 1995년 6월에 사망한 장-파트리크 망슈트는 1971년부터 81년까지 약 10년에 걸쳐 “동시대적인 현실과 직결된” ‘새로운 탐정소설(néopolar)’을 개척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소설은 한 마디로 작가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동시대의 리얼리티에 긴밀히 잇닿은” 작품들이었다.
장-파트리크 망슈트의 『사건 일지(Chroniques)』는 1996년에 재 간행되었으며, 당해 8월 30일 <책 세상(Le Monde des livres)>에 미셸 아베스카에 의해 “수준 높은 지시적 악보”로 소개된 유작 『흡혈 공주(La Princesse du sang)』가 간행되기도 했다.
에슈노의 『금발을 한 키 큰 여인들』에서 사건의 추이는 마치 히치콕의 영화나 텔레비전 시리즈물의 그것만을 방불케 하지는 않는다. 에슈노는 작품의 행간마다 누보 로망의 방법까지 도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소설의 첫 부분에서 익명의 ‘당신(Vous)’에게 말을 거는 수법은 뷔토르의 『변모(La Modification)』를 떠올리게 하며, 서로 대비를 이루는 문장 구조나 의미(Vous êtes / Vous n’êtes pas)는 로브-그리예의 『엿보는 자(Voyeur)』와 같은 원리에 입각해 있다.
몇몇의 예문에서 읽히듯, 묘사의 치밀함(수영복들, 손들, 레몬을 넣은 페리에 탄산수, 자동차 수리, 페르소네타즈의 얼굴, 조무래기)은 『고무지우개(Les Gommes)』의 토마토를 연상케 하며 – 극히 일부분만을 언급한 것이지만 – 우리가 간혹 누보 로망으로 치부해 버리는 이런 유형의 사물 문학(littérature de l’objet)마저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에슈노의 소설을 기교적인 작가의 능란한 짜집기나 거장으로 불릴만한 젊은 작가의 실험작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소설을 읽는 중에 받게 되는 냉혹함에 대한 강렬한 첫인상(금발을 한 키 큰 여자들은 확실히 냉혹함에 비유될 수 있다)은 어떤 따듯한 열기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이는 에슈노가 페렉처럼 자신이 찾아낸 이야기이자 역사의 도끼(Hache de l’Histoire)이며, 무엇보다도 그의 주인공들이 재차 고안해 낸 말과 사물 사이의 관계에 해당한다. (글로리아가 휘두르는 이 도끼는 패러디에 있어서 이보다 더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처음의 신선함 속에 이루어질 사랑의 행위들이 어떠해야 할지를 궁구하기에 앞서 살바도르야말로 파트너를 위해서라면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꽃의 이름을, 훨훨 나는 새의 이름을 정확하게 말할” 줄 아는 능력의 소유자인 것이다.
작품 전체에 걸쳐 암시적인 표현들, 이를테면 말의 유희나 익살을 비롯하여 기발한 발상에 근거한 그 무언가를 상기시켜주는 표현들은 에슈노 특유의 완만함에 의해 강한 인상을 받게 되는 표현의 급류 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아가고 있다.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가 프랑스어로 직접 써 내려간 첫 소설 『완만함(La Lenteur)』(1995)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완만함을 탐사한 그 순간에조차 – 그러나 완벽히 성공에 이르지는 못했다. – 에슈노는 글루아르를 발견하기에 이르는데, 이 금발의 여인은 바로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풀의 완만함”이며, “나무늘보와 아교의 느림”인 것이다.
이 완만함은 속도의 세계에서의 투사를 통한 세계의 경과이었듯이, “부동의 문턱에 중압감을 주면서 맥이 빠지는 것은 물론이고 완만함 그 자체에 의해 배가된 완만함이란” 시간의 경과에 대한 경험을 하게 해 준다. 이 완만함은 또한 에슈노와 같은 브르타뉴 태생의 한 작가에 의해 제시되고 있듯이, 조수간만의 차에 의한 운동의 완만함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닌 지구가 태양과 달과 일직선상에 위치할 때 발생하는 삭망(朔望) 현상이자 밀물과 썰물 운동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