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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브-그리예의 자서전

프랑스 문학의 오늘 68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누보 로망의 기수 알랭 로브-그리예



기저 문화에로의 복귀 현상이란 중요하고도 특징적인 예는 작가 자신이 원하였든 원치 않은 것이었든지 간에 누보 로망의 작가로, 또한 누보 누보 로망의 작가로 불렸던 알랭 로브-그리예(Alain Robe-Grillet)의 소설에서 중요하고도 특징적인 면모를 읽을 수 있다.


알랭 로브-그리예(Alain Robe-Grillet)


소설『황금 트라이앵글에 대한 추억(Souvenirs du triangle d’or)』(1978)으로 정점에 선 알랭 로브-그리예는 『신령(Djinn)』(1981)과 함께 이후로 전개될 아주 단순하고도 기교에 넘치는 글쓰기를 통해 80년대의 변혁기를 온몸으로 소화해 낸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신령(Djinn)』(1981)과 『황금 트라이앵글에 대한 추억(Souvenirs du triangle d’or)』(1978).


이 누보 로망의 교과서로 불린 1981년의 소설 『신령(Djinn)』은 색다른 문법 교과서로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글쓰기를 보여주었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신령(Djinn)』, 미뉘출판사, 파리, 1981.


1984년에 들어서면서 로브-그리예는 전기적인 삼부작 집필에 골몰하는데, 1984년 『마음에 드는 거울(Le miroir qui revient)』을 시작으로 1988년에 발표한 『안젤리크 매혹적인 만남(Angélique ou l’enchantement)』을 거쳐 1994년(『코린트 최후의 날들(Les Derniers jours de Corinthe)』)에 완성한 삼부작은 『로마네스크(Romanesque)』라는 포괄적인 제목 하에 간행되었다.


로브-그리예의『안젤리크 매혹적인 만남』(독일어 판) 및 『코린트 최후의 날들』과 『마음에 드는 거울』.


이러한 시도는 마치 마르그리트 요르스나(Marguerite Yourcenar)의 『세상이란 미로(Le Labyrinthe du monde)』를 방불케 한 것이다.


마르그리트 요르스나(Marguerite Yourcenar)의 삼부작 『세상이란 미로(Le Labyrinthe du monde)』.


삼부작 형식의 요르스나의 소설은 제1부, 『더없이 소중한 기억(Souvenirs pieux)』(1974)과 제2부 『북부 지방의 고문서(Archives du Nord)』(1977), 그리고 제3부 『뭐라 영원이라고(Quoi, l’Éternité)?』(1988)로 구성되었다.


삼부작 형식의 요르스나의 소설 가운데 제3부 『뭐라 영원이라고』, 제1부 『더없이 소중한 기억』 그리고 제2부 『북부 지방의 고문서(Archives du Nord)』.


요르스나가 전통의 창작 태도를 고집했다면, 로브-그리예는 실험정신에 입각한 새로운 소설들을 추구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양극화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자서전적 소설 경향을 보여준다는 지점에서 행복하게 조우하고 있으며, 또한 문화사적 인식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에서도 서로 일치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요르스나는 『세상이란 미로』 제3부 소제목 『뭐라고? 영원이라고?(Quoi, l’Éternité)』을 랭보의 시구에서 따왔다. 참고적으로 파트릭크 그랭빌(Patrick Grainville) 역시 “그래, 동쪽으로, 강어귀로, 바다를 향해”라 끝을 맺고 있는 1986년작 소설 『뇌우가 몰아치는 천국(Le Paradis des orages)』에서 랭보의 시구로부터 제목을 따왔다.


요르스나의 『뭐라, 영원이라고』와 랭보의 문학과 삶을 소개하는 DVD 및 파트릭크 그랭빌 소설 『뇌우가 몰아치는 천국』.


로브-그리예는 『로마네스크』의 둘째 권에서 안젤리크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이는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 문학에서 비롯된 것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로브-그리예의 소설에 등장하는 안젤리크는 부아아르도(Boiardo)의 『사랑스러운 롤랑(Roland amoureux)』에서의 음모를 획책하거나 저주에 가득 찬 말들을 내뱉는 안젤리크이거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연인들을 만나고 있는 『분을 이기지 못한 롤랑(Roland furieux)』에서의 우아하면서도 가냘픈 안젤리크의 모습으로 제시되고 있다.


부아아르도(Boiardo)의 『사랑스런 롤랑(Roland amoureux)』와 아리오스트의 『분을 이기지 못한 롤랑(Roland furieux)』.


로브-그리예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의 추억을 관통하는 모험으로 가득 찬 상상 세계를 추구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런 의도는 자연히 요술쟁이의 주문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하게 될 마술에 걸렸지만, 결국은 항상 작가 자신의 환상 속에 등장하는 사디즘으로 치료를 받는다는 ‘귀여운 소녀’의 등장으로 귀결되고 있다.


로브-그리예는 또한 중세 소설로부터 바그너의 음악을 관류하는 드라마들(「니벨룽겐의 반지」에 나오는 브룬힐트)에 이르기까지 무궁무진한 이야깃거리들로부터 문학, 예술의 모든 레미니선스의 상상 세계 속을 정처 없이 헤매고 있는 것이다.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 한 장면 및 DVD.


그리스 로마 신화나 성서에 등장하는 지명이나 인물 또는 이야기 등속에 의존한 듯한 고대적인 요소들은 요르스나의 『하드리아누스(Hadrien ; 서기 76-138, 서로마 제국의 황제)의 회고록(Mémoires d’Hadrien)』(1951)에서도 그렇거니와 로브-그리예의 소설 속에서도 여전히 중요하고도 이전의 소설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들이다.


요르스나의 『하드리아누스의 회고록』


엄밀한 의미에서 로브-그리예가 작가 자신의 전기를 다룬 기술체에서조차 이 같은 이야기가 상상적 모험으로 가득 찬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리기가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브-그리예의 기술체에 등장하는 코린트란 그리스 한 지방 출신인 앙리란 이름은 오이디푸스를 떠올리기에 충분한, 그러면서도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와 대결을 벌이는 코린트란 마을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지방의 이름이란 점에서 그의 기술체야말로 전기와 상상물을 오가고 있다는 점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누보 로망의 전형으로 자리 잡은 『고무지우개들(Les Gommes)』 또한 그 배경이 그리스의 북쪽 한 작은 마을인데, 탐정 왈라스는 코린트라 불리는 이 작은 마을의 어느 거리인가에서 현대판 오이디푸스에 관해 조사를 벌인다.


누보 로망의 전형으로 자리 잡은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 『고무지우개들』.


그리스 북쪽의 한 마을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거리에서 왈라스 탐정은 이른바 희생자 뒤퐁 교수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라이오스(Laïos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이디푸스의 부친) 등의 은신처 구실을 한 주아르 박사의 병원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로브-그리예는 『안젤리크』 전편에 걸쳐 작가 자신의 이야기임을 밝히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젤리크』에서 전개되고 있는 이야기는 실상 코린트의 앙리에게서 빌려온 듯한 모험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사실은 “펄펄 뒤는 준마들과 적극적인 알고라니(algolagnie : 그리스어 álgos(‘고통’이란 뜻)과 lagneía(‘친밀한 성교’란 뜻)에서 유래한 말로 ‘에로티시즘과 고통을 연관시키는 성적 행위에 있어서 가해자의 적극적인 역할을 가리키는 용어)와 사춘기의 신비의 베일을 막 벗은 듯한 매력들을 한데 뒤섞어 놓은” 『황금 트라이앵글에 대한 추억(Souvenirs des triangles d’or)』에서 선명히 확인된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안젤리크(Angélique)』와 『황금 트라이앵글에 대한 추억(Souvenirs des triangles d’or)』.


그렇다면 로브-그리예의 자서전에 있어서 새로움의 요소란 결국 실상과 허구를 적절히 혼용한 박진감에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러한 반은 자서전이고 반은 상상물에 가까운 기술체는 이미 장 도르므송(Jean d’Ormesson)의 『신의 기쁨을 위하여(Au plaisir de Dieu)』(1974)를 통해 그 형태가 어떠하다는 것을 시준한 바 있다.


장 도르므송의 소설 『신의 기쁨을 위하여』


그러나 알랭 로브-그리예의 기술체들은 여러 면에서 누보 로망 작가들의 작품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 것만은 틀림없다. 다시 말해 어떤 면에서는 누보 로망의 잘못된 글쓰기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장 도르므송의 소설에서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의 이름을 작가의 실제 이름에서 차용하지는 않았지만, 로브-그리예는 자신의 고유한 이름을 실제 소설에서 화자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균열은 순수하게 귀족 계급을 형성하고 있는 층과 돈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신흥 귀족 계급 사이에서 점점 더 극심한 현상을 띠게 된다. 로브-그리예에게 있어서 이 내면의 존재 안에 발생한 갈라진 틈이 중요하다. 로브-그리예가 삼부작의 마지막 권에서 “존재를 규정하고 있는 모든 이성적인 것과 확고한 것 속에서 나(moi)와 그 자신(내면의 존재)과의 일치에 대한 불가능성”을 제시했을 때, 로브-그리예는 내면의 존재를 더욱 강조했던 것이다. 더더욱 로브-그리예는 “이렇듯 정신분열증에 걸린 나(Je)”를 “생생하고도 살아있는 순간들 속에서 인식하는 것만큼 사실에 입각한 그 자체의 실증적인 이야기들처럼 내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허구 속에서조차 구현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코린트에서 발생한 “신분의 점차적인 변화”는 뒤이어 『기쁨의 점진적인 변화(Glissements progressifs du plaisir)』(1974년에 발표한 로브-그리예의 영화-소설의 제목)에서 성공적으로 구현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브라질 남쪽 국경지대에서 맹활약을 떨치고 있는 선동가와 음흉한 상인이나 뉴욕의 로브-그리예 교수, “전자나 후자나 할 것 없이 이 모두는 브르타뉴의 한 외진 곳에 버려진 성채에서 드라큘라 약혼녀에게 물어 뜯겨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영화-소설 『기쁨의 점진적인 변화(Glissements progressifs du plaisir)』, 미뉘출판사, 파리, 1974.


전기는 이 시대에 유행하고 있는 글쓰기의 한 방법일 수 있다. 자서전은 이러한 글쓰기가 가져다 줄 금전적인 이윤 없이는 유행을 타지 않지만, 자서전을 하나의 장르로 보자면 천태만상인 것도 사실이다. 더군다나 자서전이란 장르는 내면의 일기인가 아니면 자서전적 소설이냐에 따라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예를 들어 줄리앙 그린(Julien Green)의 작품은 이 둘 사이를 넘나드는 경계의 언저리에 놓여있는 작품이다. 다니엘 마들레나(Daniel Madelénat)가 1985년에 발표한 날카롭고도 예리하면서도 정치한 에세이에서 이미 언급했거니와 전기나 장르적 관점에서 볼 때, 자서전은 분명히 비평적 인식을 새롭게 해 줌과 동시에 그 지평을 넓히는데 일조하는 장르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다니엘 마들레나(Daniel Madelénat)의 저술 및 줄리앙 그린(Julien Green)의 자서전.


필리프 르죈느(Philippe Lejeune)의 일련의 인상적인 작업들은 이러한 사실을 확신케 해 준다. 그가 펴낸 『자서전적 조약(Le Pacte autobiographique)』(1975)이나, 『나는 타인이다(Je est un autre)』(1980), 『나 또한(Moi aussi)』(1985)은 확실히 “자아의 세계 그 영역에 대한 탐험”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필리프 르죈느가 펴낸 『나는 타인이다(Je est un autre)』, 『자서전적 조약(Le Pacte autobiographique)』 및 『나 또한(Moi aussi)』.


미셸 레리스(Michel Leiris)에서 로브-그리예에 이르기까지 비록 작가가 자신에 관한 자서전을 썼다 할지라도 이것은 작가 자신을 다룬 전기물 이상의 것이라는 점에서 자서전이란 한 장르의 변화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더해 요르스나의 『세상이란 미로(Le Labyrinthe du monde)』에서 보듯, 전기물이라 해서 하나의 닫힌 형식으로 단순화되지도 않을 것이다.


미셸 레리스(Michel Leiris)의 『예술에 관한 글쓰기』 및 요르스나의 『세상이란 미로』.


이런 점에서 마르그리트 요르스나의 주장은 재삼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다. 요르스나는 수많은 서론에서 밝혔듯이, 자서전이야말로 정칙에 준해 씌어진 전기물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시간을 거슬러가면서 인간에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달리 이야기하면,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가계의 혈통에 기댄다는 것은 “시간에 의해 창조된 소설적 체계를 폐기하는” 것과 같으며, 따라서 정칙에 준한 자서전적 기술이란 “끊임없이 내면에서 갈등을 빚고 있는 작가의 한 거대한 혈통 순환 체계”를 따라 전기를 기술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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