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길」 전시평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123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마네, 「철길」



13장 9
(1873-1874)



관전에 의한 미술전람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격론의 장이 되었다.


하지만……. 또다시 개 취급을 당하기는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관전 심사위원회가 마지못해 「철길」을 통과시키긴 했지만, 나머지 작품은 모두 반송 처리했다. 그 가운데에는 「무도회」도 끼어있었다. 「오페라에서의 무도회」가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고? 오늘?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그림이야말로 올해 가장 시사성이 높은 작품이 아니던가! 놀랄 일이었다! 그것도 「맛 좋은 맥주 한 조끼」가 환영을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 이런 일이 터지다니! 마네는 다시 한번 아무 생각 없이 되는 대로 그림이나 그리는, 이제 막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완전 초자에 지나지 않는, 화가의 아틀리에나 끼웃거리며 어깨너머 실기를 익히는 저 맨 밑바닥 인생의 어설픈 환쟁이 취급을 당하고 만 것이다.


올해에는 심사 규정을 완화하여 작가당 세 작품씩 통과시키기로 규정을 까다롭지 않게 조정했지만, 마네는 보기 좋게 거부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마네가 그린 「오페라에서의 가장무도회」는 마네만의 또 하나의 걸작임이 분명했다! 심사위원들은 그의 「어릿광대」 역시 마크 마옹의 작품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판단하고 심사에서 탈락시켰다.


Manet, Bal masque de l'opera (1873).jpg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오페라에서의 가장무도회(Bal masque de l'opera)」, 1873.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마네의 작품이 마크 마옹의 작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메쏘니에가 꾸민 음모가 판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것이다! 예술에 정치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일이 또다시 발생했다. 그 선봉에 메쏘니에가 있었다.


1873, Polichinelle.jpg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어릿광대(Polichinelle)」, 1873.


낙선! 그것도 인상파 화가들의 ‘리더’가 심사에서 탈락한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인상적일 것이 없는 「무도회」가 검열을 당하기까지 했다. 단지 「철길」만이 전시되는 바람에 마네의 작품들에 더 가까이 접근하는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 현상마저 빚어지게 되었다.


모두가 마네를 한낱 야외에서 그림이나 그리는 화가쯤으로 취급하는 일마저 벌어졌다. 그의 그림이 밝아진 것도 그와 같은 해석을 가하는데 한몫을 했다. 그가 온갖 기법을 다 활용하여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하려 들었다.


5월 중순 미술전람회가 개최되었을 때, 자신의 작품이 환영받으리라는 기대 또한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반응만 쏟아졌다. 마네는 또다시 자신을 물어뜯을 개들에게 먹이로 던져진 꼴이었다. 단 한 작품만이 전시된 까닭에 마네가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오인받을 소지는 충분했지만, 대부분 마네가 작품을 통해 리얼리즘을 부추기는 특징만을 고집했다고 간주했다.


더 지독한 혹평은 마네가 미술전람회에마저도 인상주의를 도입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러대며, 마네와 뜻을 함께한 동료들처럼 마네 역시 내던져버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왜 아이는 지 엄마한테 등을 돌렸지?”


“왜냐면 화가는 아이의 얼굴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게야.”


여염집 여인네의 옷차림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얼굴 또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 맞아.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 등장하는 여자야. 「올랭피아」 바로 거기에 나오는 창녀가 맞아. 어느 구석 하나 틀리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그대로 그렸잖아! 자신이 속한 사회 계층을 완전히 무시한 온갖 추잡한 것들을 다 드러내질 않나, 사회 계층을 무시하고 모독하려 들지 않나, 참! 어이없는 짓은 그것도 선한 사람들 면전에서 그 같은 개수작을 벌였다는 것이지.


1863, Le Bain ou Le Déjeuner sur l'herbe.jpg
1863, Olympia.jpg
에두아르 마네, 「목욕 또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Le Bain ou Le Déjeuner sur l'herbe)」 및 「올랭피아(Olympia)」, 1863.


이 무슨 수치이자 모욕이란 말인가? 심지어는 매춘굴에서 마네가 나오는 걸 보았다는 이야기까지 떠돌았다. 그림에 묘사된 철책에 대해서도 온갖 해괴한 해석이 덧붙여졌다. 마네가 표현한 철책은 “공공 구역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결여된 오직 감옥 같은 인상만 불러일으키는” 아둔하고 어리석은 묘사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에서는 오로지 야외에서 있을 법한 순간적이면서 덧없는 인상만이 읽힌다. 그가 살아가는 일상적 삶의 주제에 입각하여 아주 하찮을 수도 있는 순간을 포착하여 이를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자 애쓴 작품이라 할 것이다. 나다르의 아틀리에에서 보았던 작품들처럼 온갖 기교를 구사하여 멋들어지게 그리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마네에게 가장 호의적이라 할 작품평마저 이런 수준이었다.


이 같은 환영의 논평은 귀류법적으로 마네가 자신의 존재를 좀처럼 드러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비열한 행동을 하기까지 한 인상파 화가들의 리더라는 점을 공공연하게 유포시키고자 한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마네는 말을 빙빙 돌려서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이러한 작품 평에 대해 반감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자신은 미술전람회를 위해 자신이 속한 집단과 함께 연대하는 것조차 스스로 거부했다는 것이다.


“나는 기존 질서를 무너뜨릴 만한 전시를 기획한 적도 이를 시도한 적도 없다. 나야말로 저 커다란 문으로 당당히 관전을 통과하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내가 당신들에게 맞서 투쟁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관전을 통과할 티켓을 거머쥐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극히 부당한 방법을 통하여. 남의 얼굴에다가 담배연기를 날리는 짓 같은 모욕을 주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마네는 이미 결전을 벌일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누구하고 결투를 벌인다는 말인가? 이런 와중에 온 파리가 그가 그린 「무도회」를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언론은 아주 미온적인 태도로 마네를 옹호하면서 작품의 검열에 대한 진상조사에 착수했지만, 목소리는 그리 높지 못했다. 마네를 새로이 옹호하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가운데 독특하게도 자신의 작품이 월등하다는 점을 용납하기가 애당초 불가능한 관전 심사위원회에 대해 마네가 분개했음은 물론, 치욕스러운 일을 당하기까지 했다는 동정론이 미묘하게 전개되는 기류가 형성되어 갔다.


이러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니나 집을 드나들면서 알게 된 젊은 영어 선생이었다. 하지만 몇몇 상징주의 시인들을 제외하고는 그를 아는 이가 없었다. 그는 스테판 말라르메란 이름으로 불리는, 그 자신도 시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내였다. 그는 마네가 검열을 당한 작품을 통하여 그만의 재능을 십분 발휘했듯이, 그야말로 채색에 능란한 화가이자 회화에 있어서 인물 묘사에 탁월한 연출 능력까지 재능을 겸비한 화가란 사실을 이미 완벽하게 꿰뚫어 보고 있던 시인이었다.


그런 연유로 말라르메는 마네의 검열당한 작품의 면모를 직접 확인해 보기 위해 마네의 아틀리에까지 찾아가려 했다. 말라르메는 마네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재능에 대해서나 그에게 쏟아지는 온갖 비난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하지만 이윽고 두 사람은 조우하기에 이르렀고, 말라르메는 비로소 마네의 작품에 쏟아지는 온갖 무성한 이야기들이 어떤 이야기에 해당하는지를 파악할 수가 있었으며, 마네의 작품에서 도덕적이고 정신적이며 정치적인 국면까지 제대로 짚어낼 수가 있었다.


4월 12일 자 <예술의 르네상스> 잡지에 기고한 「회화예술 부문 심사위원회」란 글에서 말라르메는 이를 상세히 표명하고 있다.


확신컨대 마네는 항상 적대적이었던 이들의 지지까지도 이끌어낸 것에 지극히 만족스러워했다. 인색하기 짝이 없는 글을 쓰는 걸로 소문난 볼프조차도 <르 골루와(Le Gaulois) >에서 기다란 논조로 마네라는 인물과 작품을 조명하기까지 했다. 이 작자가 바로 드가를 가리켜 “이 나무 저 나무 건너뛰면서 살다가 끝내는 나무둥치에서 내려와 파리까지 날아온 원숭이 같은 인물”이라고 혹평한 볼프였다.


화가 드가는 예술가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비난하는 걸 서슴지 않는 이런 류의 인간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전혀 개의치 않았을 뿐 아니라, 아예 그런 족속들의 도움을 받고 싶은 맘도 없었다. 더군다나 꼴불견에 가까운 볼프의 비열한 흠집 내기는 드가가 동성연애를 한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까지 확대되었다.


원래 태생이 독일계 유태인이었던 드가는 저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본능에 따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다. 드가는 난생처음으로 세상 사람들 앞에서 상스러울 정도로 비열한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지닌 유태인 배척자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드가는 어린 시절에 독실한 가톨릭 귀족 집안에서 크고 자랐다. 그런 뒤에 그는 자발적으로 가장 보수적이면서 반동적이고 썩은 악취마저 진동하는 중산층(부르주아지)으로 개종했다. 그의 광포할 정도로 정결함에 대해 집착하는 버릇 역시 이때 형성되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보다 더 좋아지는 쪽으로 나아갔지만, 그의 생각만큼은 점점 더 나쁜 쪽으로 기울어져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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