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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로의 이사

『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183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마네가 그린 「벨비유 병원 정원에서의 마네 부인(Madame Manet)」, 1880.



17장-7
(1882)



파리를 떠나야 한다고? 또다시? 이번에는 병은 물론이고 아픈 통증마저 잊어버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기에 자신과 관련한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었다. 천만다행인 것은 마침내 작품을 출품하고 전시하는 것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졌다는 것일 테고, 어느 모로 보나 모든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었다. 콩쿠르에서의 열외가 그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들어준 덕분이다!


하지만 더 이상 벨비유 요양원엔 찾아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고통만 가중시킬 뿐인 물 치료는 이미 무익하다고 판명되었다. 의사는 마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바닷가에 가는 것도 금지했다. 습기가 병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세느 강변을 끼고 있는 쥬느빌리에흐에 가는 것마저도 삼갔다. 쥬느빌리에흐에는 마네 홀로 빠진 채, 오직 친구들만 모여 세느 강변에서 그림을 그렸다.


마네는 기분 좋을 리 없었을 뿐 아니라 결코 행복해질 수조차 없었다. 자! 이젠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에 갇힌 사자처럼 마네는 이리저리 어슬렁거리기만 했다. 그때 한 개인 소장가가 마네에게 베르사유 궁전 인근에 집 한 채를 빌려 기거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넌지시 제안을 해왔다. 그러면 조용하고 쾌적한 집에서 그림 그릴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는 것이었다.


마네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러고는 파리 인근에 위치한 베르사유 궁전 근처의 셋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집은 누추했으며, 정원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마네는 왕비들의 정원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만을 고대했다. “분홍빛 대리석으로 만든 돌계단 3개를 건너뛴 채…….”


그해 유월이 끝나가던 때, 미술전람회는 마침내 공개적으로 마네에게 상을 주고자 결정하고 수상메달을 수여했다. 마네의 이름이 더 이상 증오의 외침이나 경멸이 담긴 욕설을 토해내지 않을 것을 기대하지 않은 바가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이번에는 마네를 경모 하는 자들이 열광적으로 쳐대는 박수소리에 파묻힐 수 있었다.


수상메달은 부쩍 기생오라비 같은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레옹이 찾으러 갔다. 자식의 선정이고도 도발적인 옷차림과 또한 급선회한 태도에 수잔은 적잖이 불안해했다. 레옹은 마네에게 증오에 찬 온갖 으르렁대는 소리를 전하진 않았지만, 일제히 ‘구원의 수상메달’에 대한 비난으로 여론몰이를 하고 있는 언론들의 참담한 소식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팡탱은 박수를 쳤다. 카롤루스 뒤랑 역시 그에 호응했다. 르누아르는 마네에게 뜻밖의 전갈을 보냈다. “당신은 옛날 옛적 골루아 족처럼 인간에 대한 증오도 없이 재미 삼아 싸움질이나 하는 이 같소. 불공정하게 그와 같은 놀이에 빠져든 당신이 맘에 드오.” 더군다나 같은 날 아침 <가제트> 신문에 실린 “민주주의가 예술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졸라가 마네의 회화에 대해 논하다”란 기사가 마네를 괴롭혔다.


마치 모네가 드가보다도 우위에 있다는 식으로 그와 같은 어리석은 마네에 대한 특별 대우는 마네가 다른 이들보다도 훨씬 우위에 있다는 식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마네는 그들보다 우위에 있지만은 않았다.


베르사유로 거처를 옮긴 뒤로 모든 게 실망스러웠던 탓에 마네는 그나마 조금씩 걷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정원에서 떠날 수조차 없게 되었다. 더군다나 날마다 걸음을 내딛는 반경이 줄어들기만 했다. 이후로 마네는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걷잡을 수 없이 쇠약해져만 갔다. 갑갑증을 못 이겨 무릎 위에 스케치북을 올려놓은 챠 하루도 빼놓지 않고 수채화로 그림 그리는 일을 계속하던 중에 두 달이 흘러갔다. 두 달 반 동안 마네가 완성한 유화는 모두 합해 2점, 3점에 불과했다!


마네는 그림에 대한 의욕마저 상실했을 정도로 쇠잔해져 갔다. 말라르메가 마네를 보고자 자주 찾아온 덕에 말라르메가 그더러 읽어보라고 가져온 원고를 틈나는 대로 읽을 수 있었던 덕분으로 그나마 겨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마네의 심신상태를 지극히 걱정하고 간호하고 돌본 말라르메야말로 마네가 잠잘 때만이라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도록 아주 세심히 그를 보살폈다.


그 어떤 의사도 마네의 병을 함부로 말할 수 없을 지경으로 마네의 건강상태는 심각하게 위중해져만 갔다. 8월 15일 소나기가 줄기차게 퍼붓던 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갑갑증이, 다시 시작된 통증이, 쓰라림과 회한이 마네의 가슴을 저몄다. 그렇기는 하지만 미래를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선 과거를 잊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붓 쥔 손을 결코 풀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파리에서는 벌써 마네가 끝장났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고 프루스트가 전해왔다.


끝장났다고? 좋아. 그렇게 내 몰골을 보고자 안달이 났다면 보여주리라! 마네는 금방이라도 파리로 달려갈 기세였다!


파리로 돌아가자마자 마네는 쉬지 않고 오로지 작업에만 임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도저히 가만있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왼쪽 다리의 통증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혀댔다. 그러자 마네는 또다시 여인네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로 줄달음쳤다.


히스테릭 증세와도 같은 장난 삼아 연애질을 하는 것도 부쩍 늘어만 갔다. 물론 그러한 마네의 행동은 건강이 호전되리란 어떤 희망도 없는 상태에서 건강을 오히려 악화시킬 뿐인 행동일 수도 있었으나 다리의 통증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한 방편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더군다나 파리 분위기가 마네의 건강에 더욱 치명적 이리란 확실한 근거도 없었다. 베르사유에서 오히려 그의 병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신경통쯤은 문제가 안 된다는 듯이 마네는 다시 지팡이를 짚고 실크해트 모자를 쓰고 최신 유행의 술집들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홀리 베르제흐 공연장에 이끌려 ‘미술전람회 출품 작품’을 제작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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